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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상파 화가 / 메리 스티븐슨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 1844 - 1926) - 2

작성자맘비니이성주|작성시간10.10.20|조회수159 목록 댓글 0

 

 

 

 

 

 

 

 

 

 

 

 

유럽으로

매리 카사트는 공부를 끝마치기로 결심한다. (당시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낸 그녀는 1866년 그녀의 어머니와 가족의 친구들을 보호자로 삼아 파리로 이사했다. Ecole des Beaux-Arts는 아직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매리 카사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화가들에게 개인적으로 교습을 받기로 했다. 그녀는 장 레온 제롬(Jean-Leon Gerome)에게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는 극 사실적인 작풍과 테크닉, 그리고 이국적인 소재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명했다. 몇달 뒤 제롬은 에킨스 또한 학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매리 카사트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모작하며 그녀의 예술적인 감각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작품 모작을 할 때 필요했던 '모작허가증'을 받았다. 당시 "모작가"들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했던 증명서로, 이들 중 대부분은 수입이 적은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날마다 박물관을 가득 채우며 모작한 작품을 팔았다.) 루브르 박물관은 당시 프랑스인들이나 미국의 여학생들이 사교 미팅을 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매리 카사트와 같은 여성들은 전위 예술가들이 사교만남을 갖는 카페 등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엘리자베스 제인 가드너(Elizabeth Jane Gardner)는 대표적인 아카데미 예술 화가였던 윌리엄 부게로(William Adolphe Bouguereau)와 결혼하게 된다.

 

1866년이 끝날 즈음, 그녀는 찰스 채플린(Charles Chaplin)이 가르치던 그림 교실에 합류하게 되었다. 1868년, 그녀는 또다른 화가 토마스 쿠쳐(Thomas Couture)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된다. 그의 작품의 소재는 대다수가 로맨틱하거나 도시적인 소재를 택하고 있었다. 야외로 스케치 수업을 나갈 때 학생들은 종종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데 소재로는 종종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그리곤 했다. 1868년에 그려진 그녀의 작품 중 A Mandoline Player라는 작품은 파리 살롱에서 처음으로 심사위원에 의해 채택되어 살롱 내에 전시되게 된다. 이 작품은 코로와 쿠쳐의 로맨틱한 작풍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작품은 화가로서의 그녀의 생애에 있어 가장 초기 시절의 작품으로 기록되는 두 개 중의 하나의 작품이다.

 

이 즈음 프랑스의 미술은 점점 작풍이 변화해가는 단계에 있는데, 그 중에서도 쿠르베마네와 같은 화가들이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거부하는 풍조가 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인상파 양식의 주춧돌을 세우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매리 카사트의 친구인 엘리자 할데만(Eliza Haldeman)은 "현 시대의 화가들은 전통적인 미술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작풍과 방식을 찾으려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보인다" 라고 쓰고 있다. 매리 카사트는 그러나 계속해서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공부했으며 10여년간 여러 좌절을 겪으면서도 파리 살롱에 그림을 제출했다..

 

귀환

1870년 늦여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매리 카사트는 알투나에서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의 직업에 대해 반대했으며 그녀의 생활비를 대주기는 했으나 미술용품에 관련한 비용은 지원해주지 않았다. 매리 카사트는 뉴욕 겔러리에 그녀의 작품 두 개를 전시했다.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리 카사트는 또한 가족들과 여름을 지내는 동안 미술을 공부할 곳을 찾았으나 공부할 곳이 많이 부족한 것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족들과 떨어져 독립생활을 하기 위해 미술을 포기할 것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1871년 7월,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내 개인 화실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초상화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6주 동안 붓을 한번도 들지 않았으며 유럽으로 돌아갈 때까지 붓을 다시 들 생각조차 없다. 나는 이 다음 가을에 어서 서쪽으로 가고 싶고 일자리도 구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17] 매리 카사트는 그녀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 씨카고에 들렀으나 1871년 일어났던 씨카고 대 화제사건 (Great Chicago Fire)로 그녀의 초기 작품들을 잃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작품들은 피츠버그의 대주교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카사트에게 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있는 코레지오의 작품들을 모작해줄 것을 부탁했으며, 일의 대가로 받는 비용은 그녀의 여행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게 된다. 카사트는 이 일에 대해 매우 들뜬 마음으로 이렇게 적어두었다. "나는 지금 어서 일을 시작하고 싶다. 내 손가락은 간지럽고 눈은 좋은 그림을 보고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카사트는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예술가 가문 출신인 에밀리 사테인(Emily Sartain)과 함께 유럽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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