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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작성자맘비니|작성시간06.07.24|조회수517 목록 댓글 0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서기 800년 12월 25일 대관식에서 카를 대제가 신성 로마제국을 세워 카롤링 왕조를 세운 사건을 자신의 표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대관식도  카를 대제와 비슷하게 치르려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왕관을 받으로 로마로 간 것이 아니라 교황 피우스 7세에게 파리로 직접 오라고 명했던 것이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는 바로 다비드와 앵그르였다.

두사람 모두 역사화, 초상화 부문에서 19세기의 대가이다. 앵그르는 스승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여러점 남겼다. 그러나 어느 화가도 앵그르만큼 그로테스크하거나 아주 우스꽝스럽게 신격화하고 우상 숭배적으로 나폴레옹 초상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화가인 아버지의 배려로 어린 시절부터 회화 수업을 받았다. 지방의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 한참 혁명이 무르익을 즈음인 1797년 루브르 궁전에 마련된 다비드의 작업실에 입문하게 된다. 앵그르 역시 스승 다비드와 함께 대관식 한 쪽에 서서 영광스런 그 장면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승이 황제의 대관식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더니 1806년 마침내 그는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렸다

 

황금월계관을 쓴 나폴레옹은 전지전능한 신처럼 정면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옥좌에 앉아 있다. 오른 손에는 카를 대제의  '정의의 손' 지팡이를 쥐고 있다. 엄지, 집게, 가운데 손가락만 편 손은 선서, 선언 등을 의미하는데 그 기본 정신은 바로 정의이다

 

흰색 족제비 털을 댄 망토, 금실 자수로 장식한 붉은 새틴 의상, 신발의 금은보석 장식등은 제국의 부와 위대함을 드러낸다. 바닥에 깐 융단에 날개를 활짝 펼친 갈색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대 로마의 용맹스러운 군단의 군기이지 카롤링 왕조의 상징이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을 그릴 때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고대적이며 기독교적 이미지를 합성시켰다. 일반적인 왕족이아 귀족의 초상화는 대부분 몸을 4분의 3쯤 앞쪽으로 돌린 프로필로 그려진다. 그러나 앵그르는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을, 그리스도를 그리는 고전적 방식인 정면형으로 그렸다. 특히 앵그르는 1799년부터 1816년까지 루브르 궁전에 전시된 얀 반 에이크의 '헨트 제단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이교도인 고대 최고신의 모습에서 앵그르가 차용한 것은 지팡이를 든 유피테르(제우스)의 좌상이다. 신 중의 신 유피테르의 상징물은 번개와 지팡이, 독수리이다. 그는 항상 오른손에 번개를 들고 왼손에 긴 지팡이를 쥐고 있으며 그의 옥좌 아래에 늘 독수리가 앉아 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을 재현하는데 유피테르 도상학 이외의 것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앵그르는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로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을 완성했고, 나폴레옹은 서른 다섯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젊은 화가의 눈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젊고 강인한 황제는 아마 인생의 해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황제가 모든 문제를 다  안고 해결할 것이며, 프랑스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적어도 앵그르에게는 나폴레옹이 우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앵그르는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것이가. 그리고 이 작품을 1806년 살롱 전시회에 출품했다.한 사람의 인간을 그토록 완벽하게 신격화시킨 모습은 당시의 비평조차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앵그르의 나폴레옹 초상화가 괴이하며 퇴행적이고 중세의 요람으로 돌아갔다는... 

 

 

- 홍진경 지음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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