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열의 얼이 깃든 황석산(黃石山)
함양군의 '안의(安義)'는 본래 '안음(安陰)'이라 부르던 고장이었다. 그런데 안의현에 사는 7세 여아가 아이를 낳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자 조선 영조는 '안음(安陰)'을 '안의(安義)'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그 고장의 음(陰氣)가 너무 센 것을 걱정해서였다. 이 고장이 말하는 황석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황석산은 거창 남녘에 솟은 범상치 않은 바위산이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 내린 네 개의 산 기백·금원·거망·황석 가운데 가장 끝 자락에 흡사 비수처럼 솟구친 이 봉우리는 덕유산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가을철에는 거망에서 황석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광활한 억새밭이 특히 장관이다.
황석산은 향양군 안의(安義)의 진산(鎭山)으로 정상은 북봉과 남봉(정상)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두 봉우리 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졌다. 그 산정 일대에는 황석산성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수풀 길을 헤치고 능선을 바라 오르다 보니 거북이 등 같이 조각 조각 갈라진 무늬의 바위 위에 오가는 사람들이 서낭당 같이 돌을 얹어 놓았는데 거기서 비로서 잠깐이나마 황석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른 쪽에 높이 솟아 있는 피라미드 모양이 황석산 같은데 왼쪽의 봉은 그보다 크고 거대한 바위가 허리를 들어내고 있고 머리에는 푸른 숲을 이은 것이 우람하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이정표가 있었다. 드디어 황암사에서 4.2km를 올라 정상이 1.0km가 남은 것이다.
고추잠자리 같이 주저앉을 자리만 있으면 수없이 앉아 쉬엄쉬엄 기진맥진 가다보니 정상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우리 일행이 바위 끝마다 서서 정상 정복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거기서 점심을 하고 있나 보다.
그 정상까지 0.6km 남았다는 이정표 옆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저 아래 산기슭에서 청아한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들려온다.
*. 황석산성
출처: 한국의 산하
정상 부근까지는 약간의 경사가 있는 오름 능선 길이었다. 그 능선 끝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황석산성이다. 봉우리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 동문이다. 내가 알기에는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산성인데 복원한 산성이 고풍스런 맛이 전혀 없다. 여기가 바로 정유재란 때 조총으로 무장한 왜놈들을 맞아 싸우다가 동문을 지키던 조방장(助防將) 김해부사 백사림(白士林)이 도망하는 바람에 성이 함락되고, 그 바람에 함양군수 조정도와 안의현감 곽준과 그 군민 500여명이 장렬히 순국한 황석산성이다.
산성은 황석산 정상을 두고 칼날 같은 자연 암릉 보완하면서 높이 3m, 길이 2,700m로 쌓아 이어 주고 있다.
정상은 등산로에 있지 않고 안부에서 가파른 경사의 순 암벽을 타고 50m나 계속 올라야 있는데 튼튼한 굵은 흰 밧줄이 있어서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위에 지친 등산객들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았다.
정상에 서니 직사각형의 정상석은 작은 막대기를 하나 세워 놓은 것 같이 초라하고 나무 한 구루 없는 뾰족한 바위들의 모임이라서 변변한 앉을 자리 하나 없지만 가리는 것 없어서 전망만은 일품이었다.
출처 칠전팔기
그 중에 황석산성이 동문에서 남문으로 뻗어 있는데 그 코스 따라 가면 왜놈과 싸우다가 패함에 몸을 던져 절개를 지켰다는 피바위가 있고 그 길은 거연정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산 너머 산이요, 그 산 너머 또 산이라
그 산하 한 가운데 나라 위해 바친 목숨
500명
충혼의 넋이
피바위를 맴돈다.
정상에서는 올라온 방향으로 곧장 절벽을 받줄 타고 내려갈 수도 있다지만 일행을 따라 다시 내려왔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지
황석산성
* 지정번호 : 사적지 제 322호
* 지정일자 : 1987-09-18
* 규모 : 면적 446,186m
* 건축시대 : 신라.고려시대
* 위치 : 함양군 서하면 우전마을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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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함양군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는 능선을 따라 하나의 계곡을 감싸면서 형성된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위치가 영호남의 관문으로 전라도의 장수, 진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점과 구조로 보아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고 백제와 대결하게 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성으로 성곽의 총 연장은 2.75Km이다.
"동국여지승람" 안음현(安陰縣: 지금의 안의면) 성곽조에 따르면 둘레가 29,240척이고 성 안에는 시내와 군창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성 가운데로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조선태종 10년(1410)에 경상도의 6개의 성을 수축할 때 화왕산성, 조혜산성, 금조산성, 염 산성, 부 산성과 함께 수축한 기록이 있고 성내의 넓이는 34결 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8월에 이르러 체찰사 이원익이 수축과 수성의 명을 받고 안음, 거창, 함양의 3읍 주민을 동원하여 성을 보수 한 바 있으나 격전으로 함락된 곳이기도 하다.
역시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前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그 해 8월에 함락되어 500여명이 순국한 곳이다.
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으로 쌓은 부분이 섞여 있는데 석축 부분은 자연암반이 노출된 산 위이며, 토석 혼축부분은 일반 능선부분이다. 성문은 동, 서, 남, 북동쪽에 나무로 문루(門樓)를 갖춘 작은 것이 배치되었고 성안 동쪽에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동의 건물지가 보이고 있는데 규모나 위치로 보아 성안의 중심 건물로 추측된다. 축조 수법은 산탁(山托)과 협축(夾築)을 겸하고 있는데 기단부는 산탁 또는 내탁 수법을 쓰고, 윗부분은 협축한 것이 보통이다. 이 산성은 1991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황석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