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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창작문학강좌<수필쓰기 실전 4> - 수필의 결말

작성자엄지바우|작성시간18.12.27|조회수626 목록 댓글 0

수필쓰기 실전 4

 

 

수필의 결말

 

   결말이란 서술한 내용을 통괄하는 결론부위로서 그 글의 마무리다. 하지만 진리보다는 진실, 논리의 체계화보다는 정서의 구체화를 체질로 하는 수필에서의 결말은 주제의 핵을 가장 효과적으로 장전(裝塡)하는 결구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15매 내외로 한 편의 수필을 쓰는 대개의 작가들은 마무리 부분, 즉 그 글의 결말 부위의 한 두 문장에다 예외 없이 중심사상을 농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안톤 체홉의 말대로, 실패의 원인이 그 글의 서두에 있다면, 오 헨리의 수법대로 결말은 그 글의 성공을 좌우한다고도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단편소설의 귀재인 오 헨리는 작품의 결말에다 늘 역점을 두는 재치를 부리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창문 밖을 좀 내다봐, 저 담벽 위의 담쟁이의 마지막 잎새를, 바람이 불어도 까딱하지 않고 팔딱거리지도 않는 게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얘 존시, 저것이 베르만의 걸작이거든....... .마지막 잎새가 지던 밤에 그가 저기다가 그려놓았어.”와 같은<마지막 잎새>의 결구가 그 좋은 예다. 그래서 이런 결말을 일러 오 헨리식 종결법이라 하여 많은 작가들이 참고하고 모방하는 것이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다는 말이 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좋은 결말을 위해 역시 좋은 서두가 필요했다는 말도 된다. 그만치 결말은 중요하다 하겠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든가,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라는 것도 모두 결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1) 결말의 여러 유형

 

1) 요약하고 결론짓는 마무리

쥘부채의 여러 살을 한 곳으로 모아 사북으로 조이 듯, 늘어놓은 사단이나 주장을 귀납하여 결론짓는 방법이다. 설득, 요망, 논리성이 짙은 내용을 미괄식으로 구성할 때 적절한 결말이다.

 

일찍이 디오게네스는 그의 조그만 통 속에서도 극히 쾌활하게 살았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겐 이 세상 전체가 한없이 작은 것이었다. 여기 만일에 사람이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부()를 더욱 큰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면 그의 청빈은 확실히 적은 재산(財産)’은 아니다.

- 김진섭 <청빈예찬> 결말

 

그러므로 연애는 저와 같은 인내와 집중을 가지고 모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만이 확고한 사랑을 이룩하며, 저러한 시련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것이 되고 그 가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 구상 <청춘과 연애> 결말

 

2) 공명 공감을 유도하는 마무리

어떤 일화를 차용하거나 상황을 제시해놓고 작가의 내면적 요구에 동화시킴으로써 주제의식을 객관화하는, 매우 세련된 마무리 방법이다.

제시된 사실이나 상황이 작가의 사상과 일치할 때 빚어지는 동조(同調)현상은 곧 독자의 공감으로 이어져 글의 효과를 배가 시킨다. 이런 마무리는 대개 두괄식 구성을 하는, 비교적 짧은 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천재작곡가도 기발한 운명의 신의 작희로 나이가 서른이 될락말락해서 귀머거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된 후에도 명곡대작을 많이 지어놓고는 58세를 일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마니, 그의 이름은 <월광곡>과 함께 천추에 빛날 것입니다.

- 홍란파 <월광곡> 결말

 

내가 바빌종(바르비종)에 찾아가서 그곳의 자연을 바라보고, 아직도 소박한 그 고장 농민들을 만나보았을 때 밀레를 사모함이 간절했다. 그리고 인류의 가슴에 사랑과 진실이 있는 한, 자연과 전원이 있는 한 밀레의 생명은 영광 속에 계속할 것이다. 어찌 밀레뿐이랴. 인행의 모든 광영은 언제나 가시밭에서 자란다.

- 유달영 <씨 뿌리는 사람> 결말

 

3) 이해와 반성을 촉구하는 마무리

작가의 주장이나 견해를 앞세우고 이에 동조를 구하는 마무리다. 권유나 교시성이 짙은 수필에서 흔히 취하는 수법으로 목적달성은 용이하나 문예성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주장이나 견해에 대한 자기반성을 앞세워 독자의 이해를 구하기도 한다.

 

예술에 있어서도 학문에 있어서도 나는 나 자신과 친한 벗에게는 이 고상한 섭생법을 권하고 싶다. “일체(一體), 그렇지 않으면 무()?” 예술도 학문도 이 두 단애의 절정을 가는 것 같다. 평온을 바라는 시민은 마땅히 기어내려가서 저 골짜구니 밑바닥의 탄탄대로를 감이 좋을 것이다.

- 김기림 <단념> 결말

 

그러므로 공무원으로서 사슴을 사슴이라고 정당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명랑해 갈 것이요. 사슴을 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문란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 국민생활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록위마! 이 술어는 누구나가 다 항상 명심하고 경계해야 할 잠언이 아닐까 한다.

- 정비석 <지록위마(指鹿爲馬)> 결말

 

4) 긴장미를 고조시키는 마무리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종국에 가서 긴장미를 고조시키는 마무리다. 긴축구성으로 문정(文情)을 농축시키는 경우도 있고, 병렬구성으로 문의(文意)를 유현하고도 운치 있게 귀납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치밀한 구성력이 없고서는 성공하지 못하는 결말이다.

 

8월이 자연의 가장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달이라면, 8월의 산은 내가 그 자연의 의지와 더불어 끊임없이 승부를 겨뤄볼 수 있는 가장 유쾌한 결전장이 아닐 수 없다.

- 박두진 <8월의 산> 결말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하면 이즘의 섭버들 또는 임간(林間)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 그이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한 향훈, 참으로 놀랄만한 자연의 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할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 이양하 <신록예찬> 결말

 

(2) 결말의 요령

   수필은 소설과는 달리, 의식의 형상화나 정서의 구체화만이 주제 전달이 가능한 문학이다. 인물이나 사건에 의한 대단원이라면 발단, 전개의 수순만 질서화 하면 무난하겠지만, 허구가 용허되지 않을뿐더러 주어진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작자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으로 소화시켜 자기화는 물론, 끝내는 인간화에 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유도해야 하는 문학이기에 그 결말은 어느 장르보다도 어렵고 중요하다.

   그래서 수필가들은 주어진 상황이든 아니면 스스로 끄집어낸 경험이든 간에 결말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서는 결코 붓을 들지 않는다. 흔히 초심자에게서 쓰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결말이 되어버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는 주제를 사전에 정하지 않았거나 정했다 해도 그 의식의 구체화가 덜 된 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작품화에 성공하는 확률은 극히 낮다.

   어쨌거나 15매 내외의 짧은 형식의 글인 수필에서의 결말은 생명적이라 할 수 있다. 명수필에서 보인 좋은 결말들을 예로 들어가며 그 요령을 유형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여운(餘運) 여정(餘情)을 남기는 결말

독자에게 강한 영상과 심상을 주기 위해서다. 이른바 동양화에서 보이는 여백과도 같은 것으로,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여운과 여정을 남김으로써 독자 나름대로 유추하고 사고할 수 있는 상상의 폭을 넓혀주는 수법이다.

여기서 상상의 폭이란 것도 대개는 문의(文意)의 한계를 넘지 않는, 어디까지나 계산된 범부에 속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런 결말은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이 사전에 계획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여운과 여정이 담긴 결말들을 예시하자면,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본 적은 일찍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윤오영 <달밤> 결말

 

세상이 어찌 꽃과 미녀와 길고 슬기로운 마음씨만으로 가득차기를 희망하랴. 다만 이 세 가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끝없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났음을 고맙게 생각하며 슬픈 이야기들은 잊고 살아간다.

- 김태길 <아름다운 세상> 결말

 

2) 주제의식을 은유하는 결말

수필은 깨닫는 문학이기보다는 느끼는 문학이다.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데는 직접성이 유효하겠지만, 느끼고 공감하는 데는 직접성보다는 간접성이 보다 효과적이다.

특히 관념적인 주제를 문예화할 때는 흔히 은유의 문장으로 결말을 짓는다. 은유야 말로 간접적이면서도 가장 운치 있고 세련된 강조법이기 때문이다.

 

, 그는 산에만 있지 않았다. 평지에도 도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나를 가끔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산이었다.

- 김태준 <> 결말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아주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겨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나도향 <그뭄달> 결말

 

우리가 수목에서 받는 이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한 기쁨과 즐거움과 위안과 그리고 마음의 안정은 어디서 연유하여 오는 것일까? 그것은 흡사 기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신에게서 받는 그것과도 같다. 수목은, 아니 자연은 동양인에게 있어 성격이 다른 신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 김동리 <식목일> 결말

 

3) 주제의식을 상징하는 결말

상징적 표현이란, 어떤 사상이나 개념에 대해 그것을 상기시키거나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감각적인 말로 바꾸어 나타내는 문장 행위이다.

이를테면 비둘기평화, ‘붉은 장미정열을 바꾸어 나타냄을 이른다. 수필에서 이런 상징적 수사가 요구됨은 두말할 것 없이 정서를 이미지화 하고,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의 무리, 은성(殷盛)한 상점의 쇼윈도, 우리가 흔히 거리의 동화(童話)에 가슴이 환영을 여러 가지고 추리하는 기회를 여기서 가짐이 무엇이 나쁘랴. 도시의 가로는 그만큼 충분하다. 달아나는 창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더 잘 보여준다.(밑줄 친 부분은 필자, 상징 부분임)

- 김진섭 <> 말미

 

나무는 견인주이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밑줄은 필자)

- 이양하 <나무> 결말

 

4) 생략 설의법(設疑法)의 결말

생략은 지나치게 깎아서 제 살에 상처만 내지 않는다면, 즉 주제 전달에 손해가 되지 않게 줄이기만 한다면 가장 경제적인 표현수단이다. 10매 내외의 짧은 수필에서 흔히 취하는 결말로써 여운과 암시적 효과가 크다.

설의법 또한 쉽게 이해되는 내용을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단히 줄여서 그렇지 아니한가식의 의문형을 만듦으로써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결말법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시작한 이 글의 마무리가 어렵게 되었다. 공연히 인생자()를 꺼냈기 때문이다. 인생 두 글자만 나오면 마무리는 어렵게 되는 법이다. 인생을 제대로 마무리 지은 사람 있는가. 모두 중도에서 팽개치고 떠나는 것이 아닌가.

- 김원태 <빗소리를 들으며> 결말

 

아마 학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젊어 보지 못했겠지만 그 대신 다른 사람보다 훨씬 오랫동안 젊음을 가졌었다.” 포앙카레는 <학자와 작가>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지만, 나도 오늘 자고 겨울에는 동면하는 대신 오래오래 젊어서 쓰고 싶은 글을 다 써야겠는데…… .

- 김동석 <나의 서재> 결말

 

이러고 보면 사진이나 추억도 도무지 미덥지 않다. 산영처럼 흐르지 않는 추억이 안타깝다. 추억을 통해서 만나는 아이들이나 꿈에 혹시 보는 아이들의 얼굴은 내가 떠날 때 그대로다. 통 나이를 먹을 줄도, 클 줄도 모른다. 나는 세월이 빨리 흐르기를 바라야 할 것인지, 흐르지 말기를 바라야 할는지를 통 모르겠다.

- 강소천 <세월> 결말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괴로워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些事)에 창조적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결말

 

5) 암시 상상 영탄의 결말

이치나 지시를 담지 않은 말이나 기타의 자극으로써 독자의 결심과 행동 관념 등을 유발하는 암시법,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관념을 기조로 하여 새로운 사실이나 관념을 만드는 마음의 작용인 상상법, 그리고 마음속에 내재된 심원한 정회(情懷)를 터뜨려 내는 영탄법이야 말로, 이해와 공감을 생명으로 하는 대우(對偶)적인 문학인 수필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결말이다.

 

시방 내 눈 앞에 세 송이 나팔꽃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싱싱하다. 그러나 이 아침이 다 못가서 시들고 말거다. 그리하여 씨가 안고 나면 나팔꽃이 보여주는 에 막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의 마음은 나팔꽃 아닌 또 무엇을 추구하고 있겠지…… . 마음은 영원히 뻗어가는 나팔꽃이다.

- 김동석 <나팔꽃> 결말

 

벽이 그립다. 멀찍하고 은은한 벽면에 장정 낡은 옛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그 아래 고요히 앉아보고 싶다. 배광(背光)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리운가 보다.

- 이태준 <> 결말

 

죽음의 선 위에서 다시 삶으로 켜져오는 한 줄기 불빛, 볼에 핏기가 비친다. 진실로 허허로운 새벽의 적막, 깊은 적막. 여섯 시. 아내는 눈을 떴다. “여보, 살았구려!”

- 박목월 <아내의 수술> 결말

 

간죽향수간주인(看竹香須間主人)’이라는 시구가 있다. 글도 그럴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그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고서도 없고, 난도 없이 되잖은 서화나 붙여놓은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리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 두었다면 삼공(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은가!

- 이병기 <풍란>의 결말

 

* 간죽 향수 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 : 대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보고 모름지기 그 주인을 묻는다. 즉 주인의 지조를 알 수 있다는 의미임

* 두실 와옥(斗室蝸屋) : 매우 작은 집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달 밤

 

                                                                                                                    윤 오 영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일.어느 날 밤이었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웃마을 김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좀 쉬어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달이 하도 밝기에.....""!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마침 잘 됐소. 농주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 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내의 수술

 

                                                                                                                          박목월


   아내의 수술날이다. 일찍 어린것들을 깨워 아침을 먹이기로 했다. 어린것들도 몹시 긴장한 얼굴이다. 어린것들 아침이나 먹여 놓고 나는 병원에 갈 예정이었다.

  “엄마, 오늘 수술하지?”

   국민학교 2학년 꼬마와 중·고등학교 큰것들도 이상스럽게 행동이 정숙하고 옆방에 어머니가 누운 것처럼 말소리가 조용하다.

   7시 벨이 울렸다. 병원에서 아내가 건 전화다. 고등학교 다니던 맏딸이 받았다.

   “동생들 잘 간수하라.” 는 부탁이다. 그리고는 남규, 문규, 신규 한 사람씩 전화 앞에 불러내어 그들 하나하나에 당부를 한다. 가슴이 선뜩하다. 수술하기 전에 자기로서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아이들의 음성을 들으려는 뜻이다.

   “당신예요? 곧 와요. 벌써 몽혼 주사를 놨어요. 여덟시 반에 수술실로 들어간대요.”

   비장한 목소리가 전화통으로 새어나온다. 당황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길에는 이른 아침을 짙은 안개, 찬 이슬비 같은 가을 특유의 안개가 온 천지를 싸고 있다. 이 어두컴컴한 세계에 자동차와 사람이 몽롱하게 합승 창 너머로 나타났다가는 안개 속에 사라진다. 가슴이 저리는 불안감과 고독감.

   여덟시, 병원 도착했다. 아내는 자기 손으로 수술 받을 흰 가운을 갈아입고 마취제를 맞은 것이다. 흰 수건으로 싸묵은 얼굴이 너무나 여위어 있었다. 몽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내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눈에 고인 눈물…….

   “여보, 기도드립시다.”

   나의 떨리는 음성에 아내는 의식이 드는 모양.

   “, 기도드려야지.”

   침대에서 일어나 앙상한 손을 마주 잡고,

   “주여, 목월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고, 우리 어린것들 앞길을 축복하여 주소서. 아멘.”

   아내의 기도다. 그리고 몸을 돌려,

   “여보, 아무 여한도 없습니다.”

   내게 말했다.

   이것이 의식이 까무러져가는 아내의 기도요, 그의 말이다. 끝내 자기의 병이나 생명보다 남편이나 자식을 생각하는 그의 크고 고된 인종의 부덕, 810. 아내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어린것들 앞길 축복하여 달라는 그의 기도에 가슴이 막힐 것 같았다.

   여덟시 반에 시작한 수술이 열한 시가 되어도, 오후 한 시가 되고 두 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다. 이런 급한 처지에 이르러, 비로소 아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가슴에 온다. 그의 평생 살아온 인생의 결산일 것이다. 또한 남편으로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든다.

   실로 나는 말로만 발라온 인생이요, 남편이었던 것이다.

   복도 이편에서 저편까지 아흔여덟 자국을 아흔 번도 넘게 내왕했다. 기별이 없다. 참다못하여 당직 간호원에게 부탁하여 수술실에 연락해 보도록 했다.

   전화기를 들고, 수술실과 통화를 하는 간호원의 표정을 무섭게 살피고 있었다.

   간호원이 나를 돌아보며,

   “허 박사님이 수술실 앞에서 뵙자고 합니다.”

   고 전해주었다. 허 박사가 만나자? 나는 불길한 예감에 목덜미가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왜 만나잘까? 그것을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수술실 앞에 이르니, 허 박사가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아내의 목에서 잘라낸 갑상선- 자그마한 달걀 같은 두 개의 살덩이를 거즈에 싸들고 와서 펼쳐 보인다. 가슴이 설레며 수술 결과가 좋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허 박사가 안내하는 대로 회복실에 들어갔다. 산소 호흡기를 물고 있는 아내- 완전히 의식이라곤 한 가닥도 없다. 심장이 뛸 뿐, 그 늘어진 말라붙은 육체에 나는 뜨거운 것이 가슴에 치솟는 것을 참지 못했다.

   오후 여섯 시가 거의 되어, 아내는 병실로 나왔다. 수술실 수레에 실려 오는, 의식이 몽롱한 그의 야윈 얼굴- 그것은 생활에 쪼들리고 자기를 다 바친 한 여인이 너무나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여보.”

   내 소리를 알아들은 것일까? 희미하게 뜨는 저 눈, 엄숙한 눈이다. 나의 일생을 심판하는 신의 눈- 그런 두려움이 가슴에 왔다.

   아홉 시경, 겨우 의식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자기 부모를 찾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 된 자기 부모를 찾으며 통곡하였다.

   열 시경, 집에서 전화. 어머니가 상경했다는 것을 알리며, 수술 결과를 딸이 묻는다. 그 옆에 이마를 마주 대고 어린것들이 둘러앉아 있다 한다.

   아내의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밤을 밝혔다. 링거 주사의 노란 액체가 밤새 아내 혈관으로 흘러드는 그 정확한 간격- 나는 생명이 돌아오는 시간의 흐름을 지켜본 것이다. 아내는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 없이 깊은 몽혼의 세계에 잠들어 있었다. 한 시가 지나자, 병실의 불이 갑자기 휘황해졌다. 이내 소등.

   가을철 든 후 처음 보는 우레와 번개, 번쩍이는 푸른 광망(光芒)이 병실을 비껴간다. 그리고 창이 덜덜거리는 우레, 번개, 우레, 창이 확 밝아지자, 푸른 광망이 번쩍하고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선명하게 그려내고는 이내 꺼진다. 동시에 으르릉 꽝, 우레.

   네 시경에 멎었다.

   죽음의 선 위에서 다시 삶으로 켜져오는 한 줄기 불빛- 볼에 핏기가 비친다. 진실로 허허로운 새벽의 적막. 깊은, 깊은 적막.

   여섯 시.

   아내는 눈을 떴다. 생기가 날아난 눈!

   “여보, 살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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