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꾸자의 항전 "오사카 전쟁(大阪戰爭)"
"골리앗 조직에 대항한 다윗 조직"의 말로
일본 최대 조직폭력단체 야마구찌 구미(山口組) 두목 타오까(山口組, 田岡組長) 저격사건

30, 40년 전에는 흥행사로 일본전국에 이름을 날린 실업가이며 야꾸자의 대부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 組長), 1952년
두목 타오까(田岡組長) 저격사건 발발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1978년(昭和 53年) 7월11일 오후 9시30분 무렵, 교토 히가시야마구(京都 東山區)에 있는 나이트 클럽 "베라미"(ベラミ)에서 부하와 영화관계자 4명과 함께 쇼를 즐기고 있던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두목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 組長, 당시 65세, 1913-1981)는 댄스쇼가 막 끝난 순간, 한 괴한으로부터 38구경 권총으로 저격을 받았다.
저격 직후 도주한 "히트맨"은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와 적대관계인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소속의 조직원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 1952-1978)라는 인물이었다.
이 사건은 오사카 전쟁(大阪戰爭)으로 불리는 항전으로 발전했으며, 피비린내 나는 조직간의 보복전은 8월에서 10월에 걸쳐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소속원 7명을 사살하고, 9월17일 "히트맨" 하루미의 시체는 고베시 록코산(戶神市六甲山) 산속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 오사카 전쟁(大阪戰爭)의 폭력단 희생자 명단
8월17일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산하 무라타 구미(村田組 祖) 간부 사망.
9월 2일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산하 니시쿠찌 구미(西口組) 조직원 2명 사망.
9월18일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간부 사망.
9월24일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산하 스기타 구미(杉田組) 구미쵸(組長) 사망.
10월 5일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산하 무라타 구미(村田組) 간부 부상.
10월 8일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산하 이시이 구미(石井組) 조직원 사망.
10월24일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간부 부상.
※ 사상자들은 각각 공중 목욕탕, 길거리 그리고 택시 안에서 희생되었다.
uTube ⇒ 오사카 전쟁(大阪戰爭)과 항쟁종식선언 기록
"두목을 쏜 사나이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 1952 - 1978)
나이트 클럽 "베라미"(ベラミ)에서 쏜 총알 가운데 1발은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두목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 組長)의 목을 관통해 전치 2개월의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근처 테이블에 있던 두목의 주치의 2명도 유탄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 범인은 폭력조직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소속의 조직원 하루미였으며 클럽의 컵에 남긴 지문으로 그의 신분이 경찰에 의해 판명되었다.
일단 그의 신분이 판명되자 경찰은 살인미수혐의로 행방을 쫒고 있었으며,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두목 암살 미수범으로 그의 행방을 전조직을 총동원해 색출을 개시했다.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조직의 보스를 지키지 못한 반성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찰보다 한 발 앞에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 범인 잡아, 범인은 물론 배우조직을 분쇄해야 했다.
한편 이때 하루미는 구미쵸(組長, 두목)를 저격한 직후 클럽을 빠져 나와 한큐전차(阪急電車)로 도주했다. 두 조직 폭력단(야꾸자)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와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의 대립은 1975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원래 이 조직간의 분쟁 원인은 1975년7월26일 오사카 토요나카시(大阪府 豊中市)에서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계열의 하부조직 토쿠모또구미(德元組)의 조직원들이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이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끈질기게 방해와 시비를 걸어오자, 대일본정의단 조직원이 토쿠모또 구미(德元組) 3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豊中事件)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대해 토쿠모또구미(德元組)의 조직원들은 보복으로 상대인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의 두목 요시타 요시히로(吉田 芳弘) 회장을 오사카 번화가 닛뽄바시(浪速區 日本橋) 길거리에서 사살했다. "히트맨" 하루미는 죽은 회장을 존경하고 있었으며 그는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에 대해 재보복을 결의하고, 노린 것은 물론 역시 같은 적대 조직 두목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 組長)였다.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심볼 로고 "山"과 "口"로 디자인한 뛰어난 "일본 최고의 로고 디자인"
2010년 현재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구성원은 약 20,300명, 준구성원 약 16,100명, 총 약 36,400명으로
이 인원수는 일본 전국 광역폭력단 전체 약 84,200명 가운데 46.3%를 차지하는 최대 조직이다.
조직원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와 두목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는, 1952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처음 야채장사를 하다 노동자 상대의 식당을 경영했다. 그의 성격은 비교적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중학교 졸업 뒤로 집 부근의 공장에서 일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17살 때 상해치사사건으로 소년원에 보내졌다. 출소 뒤에는 토목작업원 등으로 하다 근처에 사는 여성과 사귀다 결혼해, 집을 개조해 "하루미 식당"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자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다 지역의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과 친하게 지내며 자신의 등에 "天女" 문신(Read more : Click Here!)을 세겨 정식 조직원이 되었다. 닛뽄바시(浪速區 日本橋) 사건으로부터 1년9개월 뒤,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두목 다오카 카즈오(田岡 一雄)가 교도 영화촬영소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이트클럽 "헤라미"를 방문했다.
이 때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가 가끔씩 이곳을 찾는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약 1개월 전부터 잠복대기하고 있던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에게 저격당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구했으나 - 자살 혹은 자멸을 초래할 공산이 큰 특공적인 저격사건은 - 당시 초거대 조직으로 성장한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보수의 생명을 노린 사건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두목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는, 1913년 시코쿠 토쿠시마현(四國 德島縣)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946년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3대째 두목으로 취임했다. "3대째"란 단어가 붙으나, 사실은 타오카(田岡 一雄)가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를 창설하고 세력을 확장시켜온 "대부적 존재"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타오카(田岡 一雄)는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조직원들에게 "정업(正業, 합법적 수입원)에 종사하라"고 지도해 왔다. 야꾸자(깡패, 폭력단)라 해도 도박만으로는 밥 먹고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조직의 힘을 살려 고베항(神戶港)의 선내하역작업에 진출했다.
이것은 한국전쟁의 특수가 맞물려 순조롭게 세력을 확대해 가면서 이어졌다. 그 뒤로 "고베 예능"을 설립해 일본 엔터테이먼트 업계에도 본격 진출해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일류 경영자"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의 기치 아래 창설 당시 겨우 33명에 지나지 않았던 야마쿠찌 구미(山口 組)는, 그의 1대에 일본 전국에 460단체(組), 1만 5천명의 일본 최대 조직으로 키워온 인물이었다.
1981년 야마쿠찌 구미(山口組)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는 급성심부전으로 죽었다. 향년 68. 구미쵸(組長)의 장례식에서는 일본 대표적인 엔카 가수 故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동구미 프로덕션 소속)씨가 조사를 읽어 내려갔다. .

가수.여배우 故미소라 히바리(1937-1989)는 쇼와(昭和)의 대스타 혹은 은막의 대스타로 불리며 일본 여성으로 첫 국민영예상까지 수상한 그녀는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의 귀여움을 받으며 대스타로 성장했다. 통산 레코딩 곡수 1,500곡, 오리지날 곡 517곡, 통상 레코드 판매 8,000만장 기록. 그리고 그녀의 전설은 "영원한 가희"로 불린다. 1989년6월24일 간질성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5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7월22일 그녀의 장례식에는 4만 2천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 프로야구 홈런왕이며 사상첫 3루 번트를 친 왕정치(王政治, Click!)씨가 대표해 조사를 읽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표곡 "川の流れのように"가 합창되었다.
uTube ⇒ "美空ひばり" 川の流れのように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가 남긴 일화로는, 하루미에게 저격받아 병원에 옮겨졌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노린다는 정말 대단한 놈인데...그러나 자신이 살려고 쏘기 때문에 실패한 거야. 만약 자신이 죽을 셈으로 저격하려면, 더 가까이 다가와, 상대가 죽을 때까지 더 쏘아야 했다". 그리고 유탄에 부상당한 자신의 주치의를 걱정하며 "나는 괜찮으니깐 다른 사람이나 먼저 도와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uTube ⇒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의 3주기
1990년1월28일 오사카 고법의 공소심에서 재판장은 "객관적인 증거와 모순하며, 부자연스런 수사 과정이 인정되며 수사관의 유도와 조작의 의심이 있어 신용할 수 없다 "며, 고베 지법의 1심을 파기하고 세명의 살인죄에 대해 무죄로, 체포감금 그리고 방조죄 만으로 징역 8개월에서 1년을 선고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형식적으로는 종결되었으나, 하루미의 살해진범은 오리무중인 채 동사건은 미해결로 1993년 시효만료를 넘겼다.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의 고베시(戶神市) 총본부
두 조직간의 항쟁의 서곡
상대 두목의 암살 미수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히트맨" 하루미는 수일 뒤에 오사카의 석간신문을 통해 의도적으로 도전장을 보내고 있었다. 영웅심에 들뜬 하루미는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 너희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가?, "일본 최고라면, 진정한 두목이라면 치욕을 알아야한다. 그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한 쓰래기에 지나지 않는가?", "이 대로 자기의 힘을 과신하면, 그 과신의 너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치게 한다. 그것은 천벌이다!, 반듯이 기억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등 석간에 게제된 내용을 본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으며 조직력을 총동원해 복수를 다짐하며 전국 규모로 하루미 수색이 전개되었다.

고베시 록코산(戶神市六甲山) 산정의 가든 테라스 "그라니트 카페"의 라이업된 모습
그리고 뒤로 멀리 보이는 불빛은 오사카의 번화가 모습.
"히트맨"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의 최후
한편 행방을 찾고 있던 하루미는 9월17일 고베시 록코산(六甲山, 표고 880m)의 즈이호우지(瑞寶寺)란 절 부근 골짜기에서 잠옷을 입은 채 심하게 부패된 시체로 되어 발견되었다. 시체의 상태는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지 10일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처음에는 신분확인이 불가능했으나 경찰의 적외선을 동원한 과학수사로 시체의 등에 희미하게 나타난 "천녀의 문신"을 발견해 하루미인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천녀의 문신"의 이미지
Read More! ⇒ 문신(紋身,Tattoos)의 미학과 인류문화학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살해된 두목의 유회(遺灰 즉 가루가 된 뼈:粉骨) 일부를 부적으로 지니고 있던 것도 의류 주머니에서 같이 발견되었다. 발견당시 백골화에 가까운 시체의 몸 여기저기에는 테이프로 감겨있었으며, 복부 등에는 칼에 찔린 흔적이 여러 곳, 앞니가 부러지고, 남근과 모든 손톱이 빠져 있었다. 이것은 살해당하기 전에 얼마나 심한 린치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하루미는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를 저격하기 전, 아내와 애인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자신에게 만약 무슨 일이 발생하면, 서로가 도우며 살아 가도록 설명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처자를 애인이 살고있는 아파트에 숨겼다. 나이트 클럽 "베라미"로부터 도주한 뒤로 자신이 소속한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 2대째 두목(회장)의 알선으로 동조직 산하 츄세이카이(忠誠會)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10월8일 츄세이 카이(忠誠會) 간사장 등 세명이 하루미를 살해했다고 경찰에 자수했다. 그 자수 동기는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의 격렬한 복수의 대상이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라고 하는 것이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이 세명이 경찰서에서 밝힌 공술에는 각각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 결과 주시하고 11월1일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 조직폭력단이 기자회견을 갖은 전대미문의 사건 - 기자회견을 통해 오사카 전쟁(大阪戰爭)의 항쟁종식선언을 발표했다.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의 붕괴
이 조직은 거대조직과 항쟁 뒤로, 조직과 조직원들의 약체화 그리고 자금난 등의 이유로 5년 뒤 조직을 자진 해산해 "야꾸자 세계"에서 모습을 완전히 감추게 되었다. 한편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더욱 견고한 조직으로 발전해 가는 가운데 보스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의 사후에 포스트 타오카(田岡)를 둘러싸고 같은 야마쿠찌 구미 소속의 이치와카이(一和會)와의 항쟁으로 발전해 간다.
나이트 클럽 "베라미"(ベラミ)
이 사건 뒤로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는, "베라미"의 마마와 직원들을 요정으로 초청해 그 동안 폐를 끼친 점을 사과하고 "자신을 포함해 앞으로는 폭력단 관계자들이 일체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라미"는 이 뒤로도 영업을 계속해 번성했으나 경영의 중심이었던 마마의 죽음과 더불어 폐점에 이르게 되었다.
uTube ⇒ 大阪戰爭 & Night club "belami"
"히트맨"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는 누가 살해했는가?
(Epilogue), 1978년9월17일로 하루미는 죽은지 32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상은 수수께끼인 채 "야꾸자 항쟁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데 "히트맨"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는 누가 살해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추리와 가설로써 하루미 "살해의 진실"에 추적하여 접근해 보고자 한다.
"야꾸자의 항쟁"이란 원래가 조직확장에 있어써 필요불가결한 선택이긴 해도 서로에게 반드이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행동은 경찰의 실시간 추적대상이 되며, 오히려 경찰에게 자신들의 조직내부 사정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과 같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본문의 오사카 전쟁(大阪戰爭)과 같은 대규모 조직간 충돌로 결국에는 양쪽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따라서 양 조직은 서로가 치명적 타격을 입기 전에 서로가 일정한 면목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수습의 길"(항쟁종결)을 선택하는 것이 도리이다.

"두목을 쏜 사나이",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의 전설은 소설로 출판 그리고 영화로 상영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이 사건에서 조직력의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하루미 소속의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은 항쟁이 점차 길어자자 "하루미의 존재"는 - 신발 속에 낀 돌맹이와 같은 존재로 - 조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고성능 다이나마이트"로 전락되고 말았다. 한편 골리앗 조직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자신의 보스에 대한 보복으로 상대 보스를 암살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면목은 세운 셈이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두 조직간의 "모종의 요구"(山口組측)와 "모종의 제안"(大日本正義團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신발 속 돌맹이"로 전락한 하루미를 산채로 인계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 요구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은 하루미를 눈, 입과 손발을 테이프로 묵은 다음, 자동차에 실려 모종의 장소에서 비밀리에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두목 암살살해 미수범"의 처분(살해를 의미)은 전적으로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에게 일임한 다음, 야마쿠찌 구미(山口組)는 하루미를 무참히 보복살해한 다음, 그의 시체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신체의 일부분(성기와 손톱)은 살해한 증거품으로써 타오카 카즈오(田岡 一雄)가 직접 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에게 하루미의 시체 유기 장소를 통보하고 인수하도록 했다. 이 처분에 대해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은 하루미를 자신들이 살해한 것으로 누명을 쓰는 조건으로 간부 3명이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이 방법이야 말로 약소 조직이 "조직붕괴"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여기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루미 살해"가 어떤 형태로든 야마쿠찌 구미(山口組)에게 의혹을 사게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한편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의 자수한 3명의 간부들은 "하루미 죽음"에 사실상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경찰에서 하루미의 시체 발견 당시의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구체적인 사실을 진술할 수 없었다. 사실 이것은 그들에게 전혀 알 필요없는 그리고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경찰 진술에서 직접 살해에 관여한 인물들이 아니었으므로 3명의 진술이 모두 엇갈리며, 기소에 꼭 필요한 증거품 하나 발견되지 않는 등 신빙성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게 되었다. 이 부분 역시 경찰을 현혹시키는 야꾸자들이 특기로 하는 "진술 전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Fin.
"두목을 쏜 사나이" 하루미 키요시(鳴海 淸)의 죽음에 연민의 정을
그리고 故미소라 히바리(1937-1989)씨의 21주기를 추모하며...
"54년8개월6일5시간32분20초3"의 올림픽 공식기록
17살 소년 사무라이 테러리스트 야마구찌 오또야(山口 二矢)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