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원양(元壤). 패국 초 출신. 하후영의 후예. 조조의 본가쪽 친척.
위나라 제일의 고참장수이며, 조조와 나이가 비슷했다. 열 네살때, 어떤 사람이 스승을 모독하자 그를 죽였다. 이 사건으로 하후돈의 기개가 알려졌다. 특기는 창술이며, 조조 거병때부터 하후연과 함께 따랐다. 동탁을 추격할때 동탁의 상장 서영으로부터 조조의 목숨을 구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한호와 전위를 추천하여 조조에게 천거하였다. 장막이 모반할때 조조의 가족들은 아직 견성에 있었으므로, 가벼이 무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성으로 달려가다가 여포와 마주처 전투를 벌였다. 여포가 북으로 물러나자 군수품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조조를 따라서 여포를 토벌하던 도중, 고순과 마주쳐 싸우게 되었다. 고순도 맹장이었지만 하후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에 여포군 진중에서 조성이 활을 쏘아 하후돈의 왼쪽눈을 맞혔으나 "부모가 주신 몸을 버릴 순 없다" 며 눈을 뽑아 삼킨것으로 유명하다. 원술과 싸움에서 교수를 베어 죽였는데, 교수는 후한 조정에 있다가 원술을 따라 내려온 명성있던 장수였다. 그 후 하후돈은 진류태수와 제음태수를 겸임하였고, 건무장군의 지위가 더해지고 고안향후가 되었다.
당시 큰 가뭄과 병충이 들자, 하후돈은 곧 태수의 물을 끊어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때 하후돈이 몸소 흙을 지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모내기를 권장하였으므로 그곳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때 대장군이 되어 후방을 방어했다.
원소 정벌 이후에는 복파장군으로 승진했으나 여전히 하남윤을 맡았고, 그의 판단에 따라서 적절히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법령에 구애받지 않도록 허락받았다. 9년 후, 조조가 손권과 싸우고 돌아온후,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삼고 거소에 머물게 했다. 조조는 그를 특별히 존중하고 친근하게 지냈으니, 다른 장수들 중 그와 비길 자는 없었다. 이후 전장군에 임명되었고, 수춘에 있었다. 조비가 즉위한 후에는 하후돈을 가장 높은 자리인 대장군으로 임명했으나 조조의 뒤를 따르듯 몇 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하후돈은 조조와 한 수레를 타고 다니며, 조조의 침소에 칼을 차고 드나들 정도로 조조의 신뢰를 받았다. 비록 군중에 있었으나 스승을 직접 영접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성격이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남는 재물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풀고, 부족하면 관청에 도움을 받았으며, 재산관리를 일로 삼지 않았다. 입담이 좋아서 농담하기를 좋아했으며, 호탕하고 쾌활했다. '맹하후'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예형이 눈 하나가 없는 하후돈을 빗대어 '완체장군'이라는 별명도 붙여주었다.
시호는 충후(忠侯)이며, 아들 하후충이 후사를 이었다. 조비는 하후돈의 공훈을 헤아려서 그의 아들 전부를 제후로 봉했다. 하후돈의 동생 하후렴과 둘째아들 하후무는 스스로의 공적으로 열후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