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어린 황제가 또 등극하다.
한영제(漢靈帝) 건녕(建寧)원년(168)1)-통감 권56
1 봄, 정월 3일 성문교위(城門校尉) 두무(竇武)가 대장군이 되고 전 태위(太尉) 진번(陳蕃)이 태부(太傅)가 되었다. 두무와 진번, 사도(司徒) 호광(胡廣)이 함께 녹상서사(錄尙書事)의 일을 맡았다.2)
이때 마침 황제의 대상(大喪: 붕어)이 있었으나 후사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에 모든 상서(尙書)들이 두려워한 나머지 칭병(稱病)하고 조회(朝會)에 나오지 않자 진번이 꾸짖어 말했다.
“옛 사람들은 절의를 세우면서 사망여존(事亡如存: 망자를 살았을 때처럼 섬김)했소.3) 지금 새 황제가 아직 서지도 않고 국가의 정사가 날로 급박한데 제군(諸君)들은 어찌하여 도요지고(荼蓼之苦: 씀바귀를 먹은 듯한 고통)를 피한 채 편히 쉬려고만 하는 것이오.4) 그러고도 의리상 편할 수가 있소.”
상서들이 황공해 하며 모두 입조(入朝)하여 일을 보았다.
2 20일 해독정후(解瀆亭侯: 영제)가 하문정(夏門亭)에 도착했다.5) 두무에게 지절(持節)의 권한을 주어 청개(靑蓋)를 가지고 가 영접해 입궁케 했다.6)
21일 황제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녕(建寧)으로 바꿨다.
3 2월 13일 환제(桓帝)를 선릉(宣陵)에 예장하고 묘호를 위종(威宗)이라 했다.
4 23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5 당초 호강교위(護羌校尉) 단경(段熲)이 정벌에 나서 서강(西羌: 서쪽의 강족)은 평정이 되었지만 동강(東羌: 동쪽의 강족)은 아직 귀순하지 않았다.7) 탁료장군(度遼將軍) 황보규(皇甫規)와 중랑장(中郞將) 장환(張奐)이 해마다 정토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항복과 반란이 거듭되었다.8) 일찍이 환제가 단경에게 조서를 내려 이같이 하문한 적이 있었다.
“선령(先零)9)과 동강이 반란을 일으켜 황보규와 장환이 각기 정예병을 이끌고 가 무시로 그들을 평정했다. 이제 단경에게 병사를 이동시켜 동강을 토벌케 하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가히 잘 생각하여 술략(術略: 전술전략)을 세워보도록 하라.”
이에 단경이 건의하며 말했다.
“신이 보건대 선령과 동강이 비록 수차 반기를 들었으나 황보규에게 투항한 자는 이미 2만여 호에 달하고 있어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구분이 이미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투항하지 않은 나머지 적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장환이 주저하며 진군하지 않는 것은 단지 항복한 강족과 반기를 든 강족이 서로 내통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군이 한 번 움직이면 그들은 필경 크게 놀라 두려워할 것입니다.
더구나 반적들은 작년 겨울에서 올 봄까지 수비병력을 해산치 않은 까닭에 사람과 짐승이 모두 피리(疲羸: 지쳐 쇠약함)해져 스스로 멸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투항을 유인하는 방안을 생각해 이들을 앉아서 제압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오랑캐는 야심(野心: 짐승의 마음)을 지니고 있어 은덕으로 감화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세력이 약할 때는 일단 항복하지만 대군이 일단 철수하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오직 유일한 방법은 백인(白刃: 시퍼런 칼날)을 그들의 목에 갖다 대는 길 뿐입니다.
대략 항복하지 않은 동강의 수는 3만여 호로 이들 대부분은 새내(塞內: 만리장성 안) 부근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특별히 험한 길도 없고 우리에게는 연(燕)․제(齊)․진(秦)․조(趙)와 같은 연합세력이 없습니다.10) 결국 이로 인해 오랜 기간에 걸쳐 병주(幷州)와 양주(凉州)가 소란해지고 삼보(三輔)까지도 침해되는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11) 서하(西河: 감숙성 난주 부근의 황하상류)와 상군(上郡:섬서성 수덕현)을 급히 새내로 옮기고 안정(安定: 감숙성 고원현)과 북지(北地: 감숙성 영현)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된 것도 모두 이 때문입니다.
운중(雲中: 내몽골 탁극탁)과 오원(五原: 내몽골 서북방)에서 서쪽의 한양(漢陽: 감숙성 천수 서쪽)에 이르기까지 2천여 리인데 흉노와 모든 강족이 이 일대를 점거하고 있어 마치 농창(膿瘡)이 겨드랑이에 숨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이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장차 큰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 전차(戰車) 3천 대로 3동2하(三冬二夏: 2년반)의 시간이면 그들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용은 대략 54억 전(錢) 가량이 드나 강족을 모두 궤멸시키고 흉노를 장기적으로 귀복(歸服)시키면 새내(塞內)로 옮긴 군현이 본거지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영초(永初: 107~113) 연간에 강족의 각 부락이 반기를 들어 길게는 14년에 걸쳐 모두 2백40억 전이 들었고 영화(永和: 136~141) 말년에 또 7년이 걸려 모두 80여억 전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막대한 비용을 쓰고도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잔존한 오랑캐들이 또 일어나 해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백성들로 하여금 잠시의 어려움을 참게 하지 못하면 장차 영원히 안녕을 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노열(駑劣: 우둔하고 못난 재주)을 다할 것이니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황제가 청한 바대로 모두 들어주었다. 이에 단경이 15일분의 군량에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팽양(彭陽: 감숙성 진원현)에서 고평(高平: 감숙성 고원현)으로 진격해 봉의산(逢義山)에서 선령 등의 강족들과 교전했다. 단경이 병사들에게 장족이인(長鏃利刃: 장거리 활과 날카로운 칼)을 잡게 한 뒤 장모(長矛: 장창부대)를 3중으로 배열하여 강노(强弩: 쇠뇌부대)를 잡게하고 경기(輕騎)를 좌우로 벌여 두 날개로 삼았다. 이어 장병들에게 하령하여 말했다.
“우리는 지금 집에서 수천 리나 떨어져 있다. 전진하면 성공하고 후퇴하면 모두 죽게 된다. 모두 함께 공을 세우자.”
이에 큰소리로 외쳐대며 병사들이 달려나가고 기병들이 양옆에서 날듯이 돌격하자 적군이 궤멸되었다. 단경이 8천 명의 수급을 베자 두태후(竇太后)가 조서를 내려 포미(褒美: 공을 표창함)하여 말했다.
“동강이 평정되었으니 반드시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다. 지금 단경에게 20만 전을 내리고 그의 가족 중 한 사람을 낭중(郎中)으로 삼는다.”
또 칙령으로 중장부(中藏府)에서 돈과 채단 등을 내어 하사하고 군사비를 증액원조하는 한편 단경을 파강장군(破羌將軍)으로 삼았다.12)
6 윤3월 갑오일 황제의 할아버지를 효원황제(孝元皇帝), 할머니 하씨(夏氏)를 효원왕후(孝元皇后), 아버지를 효인황제(孝仁皇帝)로 추존하고 황제의 생모 동씨(董氏)를 신원귀인(愼園貴人)으로 삼았다.13)
7 여름, 4월 1일 태위 주경(周景)이 세상을 떠났다. 사공(司空) 선풍(宣酆)이 면직되고 장락위위(長樂衛尉) 왕창(王暢)을 사공으로 삼았다.14)
8 5월 1일 일식(日食)이 있었다.15)
9 태중대부(太中大夫) 유구(劉矩)를 태위로 임명했다.
10 6월 경성(京城)에서 큰 수재가 났다.16)
11 6월 17일 논공행상을 하여 두무를 문희후(聞喜侯)에 봉하고 그의 아들 두기(竇機)를 위양후(渭陽侯), 형의 아들 두소(竇紹)와 두정(竇靖)을 각각 호후(鄠侯)와 서향후(西鄕侯)에 봉했다. 이어 중상시(中常侍) 조절(曹節)을 장안향후(長安鄕侯)에 봉하는 등 모두 11명을 후(侯)에 봉했다.17) 탁군인(涿郡人: 탁군은 지금의 하북성 탁군) 노식(盧植)이 두무에게 상서하여 간했다.18)
"족하(足下)는 단(旦)과 석(奭)이 주나라 종실을 보좌했듯이 성주(聖主)를 옹립하고 천하를 장악하니 모든 사람이 족하의 공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사실 동종(同宗)에서 뒤를 잇고 친소관계 등에 따라 인선을 하는 것이니 무슨 공이 있다고 하겠으며 어찌 천하의 공을 자신의 역량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소. 마땅히 중상(重賞)을 사양하여 명성을 온전히 해야 할 것이오.“
두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식은 키가 8척2촌이었는데 목소리가 마치 커다란 종소리 같고 성정이 강의(剛毅)하며 큰 절조가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마융(馬融)을 모셨는데 마융은 사치를 좋아해 항시 여창(女倡)의 가무를 즐겼다.19) 그러나 노식은 오랫동안 시강(侍講)을 하면서도 한 번도 곁눈질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마융이 그를 매우 공경히 대하게 되었다. 태후가 진번을 옛 공훈을 기려 특별히 고양향후(高陽鄕侯)에 봉하자 진번이 이를 사양하며 상소문을 올려 간하여 말했다.
“신이 듣건대 땅을 떼어 분봉(分封)하는 것은 마땅히 공덕에 근거한다고 합니다. 신은 비록 소결(燒結)한 행위는 없으나 ‘군자는 정당하게 얻지 않는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겨왔습니다.20) 신이 사양치 않는다면 하늘의 진노를 사고 백성에게 재화(災禍)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신은 과연 어디에 몸을 둘 수 있겠습니까.”
태후는 허락지 않았으나 진번은 10여 차례에 걸쳐 상주문을 올리고 끝내 봉작을 받지 않았다.
12 단경이 경병(輕兵: 경무장 부대)을 이끌고 강족을 추격했다. 교문곡(橋門谷: 섬서성 안정현)을 출발해 밤낮으로 달려가 사연택(奢延澤)과 낙천(落川), 영선수(令鮮水)에서 강족을 연파한 뒤 영무곡(靈武谷)의 교전에서 강족을 마침내 대파했다.
가을, 7월 단경이 경양(涇陽: 감숙성 평량현)에 도착하니 나머지 강족 4천여 호가 모두 한양의 산곡으로 숨어들었다. 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郞將) 장환이 상언하여 말했다.
“동쪽의 강족을 비록 대파하였으나 잔당을 완전히 없애기가 어렵습니다. 단경은 경솔히 결단을 내리려 하나 응당 승패가 무상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땅히 은혜를 베풀어 항복을 권함으로써 결코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조서를 내리자 단경이 상서하여 건의했다.
“동강의 인구가 많다고는 하나 매우 연약하여 쉽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의 우견(愚見)을 진술해 영녕(永寧: 영구평화)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중랑장 장환이 적이 강대하여 깨뜨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초항(招降: 항복을 권유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행히 주상이 영명하여 신의 우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상황이 과연 그의 짐작과 정반대로 전개되자 시한(猜恨: 시기하고 원망함)한 나머지 강족의 주장을 믿고 교묘히 말을 꾸며 신의 군사가 여러 번 절뉵(折衄: 좌절)했다고 무함했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강족 역시 하늘의 영기를 받아 태어났으니 절멸시킬 수 없고 산과 계곡이 광대해 사람이 살지 않도록 할 수 없으니 피가 들을 오염시키면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고 재난을 초래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는 융적(戎狄)의 해가 가장 컸고 한나라의 중흥 이후에는 강족이 가장 심합니다. 이는 이들에 대한 주살(誅殺)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항복과 반란이 거듭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령 등의 강족이 반복(反覆)하여 마을을 공격해 백성을 약탈하고 분묘를 파헤쳐 시신을 훤히 드러내고 있으니 재화가 산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에 하늘이 진노하여 우리를 통해 그들을 토벌케 하는 것입니다.
옛날 형(邢)나라가 극도로 혼란하여 위(衛)나라가 그들을 정벌코자 군사를 동원하자 하늘이 때맞춰 비를 내려주었습니다.
교문(橋門)에서 서쪽으로 낙천(落川) 이동까지는 오래된 읍현(邑縣)들이 서로 이어져 있는 지역으로 심험절역(深險絶域:깊고 험한 지세의 변방)이 아니라 수레와 말이 모두 편히 다닐 수 있는 곳이어서 절뉵을 당할 일이 없습니다.
장환은 한나라의 관원으로 변경에서 2년 동안 주둔하면서 적들을 평정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수문집과(修文戢戈: 글을 숭상하고 무력을 거둠)하여 야만적인 적들을 초항해야 한다며 허황되기 그지없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처럼 말하겠습니까.
전에 선령족이 침범해 왔을 때 조충국(趙忠國)이 그들을 거내(居內: 한족 거주지역)로 이주시켰습니다.22) 이후 변경침입을 걱정한 나머지 마원(馬援)이 다시 이들을 삼보로 옮겼지만 처음에만 복종하고 끝내 반기를 들어 지금에 이르러 골경(骨鯁: 생선가시)이 되었으니 식견 있는 인사들은 깊은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23)
지금 변경 군(郡)의 인구가 희소하여 누차 강족의 침해를 받았으니 만일 항복하는 강족과 한인을 섞여 살게 하면 이는 좋은 밭에 지극(枳棘: 탱자와 가시나무)을 심고 방 안에서 사훼(蛇虺: 살무사)를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한(大漢)의 웅혼한 위엄을 받들어 장구한 계책을 세운 것으로 이는 그들로 인한 화란을 근절하여 다시는 이같은 우려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래 3년간의 군비로 마련된 54억 전 중 겨우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아 채 반도 사용치 않았고 남아 있는 적들 또한 점차 잔신(殘燼: 사르러짐)하는 양상입니다. 신은 매번 조서를 받을 때마다 조정은 군무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원컨대 이같은 태도를 관철해 신이 전권을 쥐고 시의에 맞게 일을 처리해 군기(軍機: 군사적 호기)를 놓치지 않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13 사공 왕창이 면직되고 종정(宗正) 유총(劉寵)이 사공이 되었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