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삼국지 19
제갈량의 호 '와룡'은 방덕공이 지었다.
사서에 의하면 제갈량은 숙부가 죽은 후에 남양군 등현의 융중에 숨어 살면서, 낮에는 밭
일을 하고 밤에는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동료들 중에서도 그는 뛰어난 존재였으며, 뜻도 원
대해 항상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었기 때문에 '와룡선생'이라는 칭호가 붙었다고 한
다.
그럼 제갈량을 왜 와룡이라 칭했는가? 와룡이라는 칭호는 자칭인가?, 타칭인가?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하는 장면에서 그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있는데,
서서는 제갈량이 살고 있는 곳에 와룡강이라는 언덕이 있어서 스스로 와룡선생이라고 칭했
다고 말한다.
그러나 와룡강이라는 지명은 후세 사람이 [삼국지연의]에 억지로 갖다붙였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당시 융중 일대에는 와룡강이라는 이름의 언덕은 존재하지 않았
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제갈량을 와룡이라고 칭했는가?
사서에 의하면,, 당시 융중에서 제갈량의 지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그의 두
스승, 곧 방덕공과 사마덕조였다. 그들은 오랜 기간의 접촉과 이해를 통해 '제갈량은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고 있고 계략을 잘 짜는 열걸'이라고 간
파했다. 그래서 방덕공은 제갈량에게 와룡이라는 아호를 내렸으며 동시에 방통을 봉추라 칭
송했다), 사마덕조는 그를 세상 정세에 밝은 준걸이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와룡의 칭호는 타칭이며 제갈량의 재능과 덕에 대한 평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
다.
또한, 융중이 위치하는 양양 일대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유명한 대
호족을 들자면 방, 황, 괴, 채, 마, 습 등의 세력이 있었다. 후한의 중, 후가 이후로 지방은
거의 호족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만일 그들의 지지와 인정이 없었다면 그 땅에 발
판을 쌓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표가 형주 입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방, 채 양 세력의 지지
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제갈량도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외지인에 이러한 지지와 인정이 없다면 그의 정치적 이
상을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융중에 있을 때에 형주의
호족세력 중에서 영향력있는 인물, 특히 덕망있는 명사와 많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들
에게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자신의 식견을 넓히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하라고 애
썼다.
양양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물산이 풍부했고 엘리트 문화인이 집중되어 있
었다. 또한, 이 지방에는 많은 인재가 나온 것 이외에도 다른 곳에서 이주한 준걸이 많았다.
제갈량도 그 중 하나로 적지 않은 사람들과 우정을 맺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예를
들면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 조카인 방통, 의성의 마량, 마속 형제, 박릉의 최주평, 영주의
서서와 속도, 여남의 맹건 등 젊은 명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들과는 우정이 특히 돈독해
왕래가 잦았다.
청년 시절의 제갈량은 비범한 뜻을 가져 스스로를 관중, 악의에 견주고 있었으므로 미친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제갈량을 잘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
었다.
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제갈량은 혼인이라는 루트를 활용했다. 그의 큰 누이는 괴기
와 결혼했고, 둘째 누이는 방산민에게 시집을 갔다. 그 자신은 황승언의 못생긴 딸을 처로
선택했다. 황승언은 체모의 매부였기 때문에 체모는 제갈량에게 처의 외숙부가 된다. 그렇게
제갈량은 양양의 여섯 대호족 모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 제갈량은 방덕공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방씨 가문의 방덕공은 양양의 호족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인물로 상당한 명망을 지닌 인
물이었다. 교류 범위가 넓고 식견이 높아 유표는 몇 번이나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 그의 신변에는 재주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들어 학문을 서로 교류하고
시국을 논했으며, 방덕공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당시 그이 인물 품평은 사대부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제갈량은 방덕공을 끊임없이 방문해 가르침을 청했다. 게다가 늘 겸허한 태도로 마루 밑
에서 절을 했고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무릎을 꿇었다.
방덕공도 항상 그에게 책을 빌려주며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인연으로 인해 서서히 그는
제갈량의 성격, 재능, 포부를 깊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와룡이라 칭한 것이다.
이 품평은 제갈량을 큰 호수에 엎드려 있는 용에 비유한 것으로, 시기가 오면 반드시 구
름 위로 날아올라 그 비범한 본 모습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와룡이라는 아호가 평가받아 널리 알려지자 제갈량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는데, 제
갈량이 이같이 와룡이라는 아호를 얻은 것은 그가 이상을 위해서 분투한 결과물이며, 당시
의 사회로부터 지지받고 인정받았다는 증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