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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주석

작성자역풍|작성시간04.07.07|조회수458 목록 댓글 0
 

●주  석


1)  조등의 아버지 조절(曹節)은 자가 원위(元偉)이며, 평소 인자하고 정이 깊었다. 하루는 이웃집 사람이 기르던 돼지를 잃어버렸는데, 조절의 집에 있는 돼지와 비슷했다. 남자는 문밖까지 와서 자기 돼지라고 우겨댔지만, 조절은 그와 다투지 않았다. 얼마 후에 도망갔던 돼지가 다시 돌아왔고, 이웃 남자는 대단히 부끄러워 하며 가져갔던 돼지를 돌려주고 진심으로 사과하자, 조절은 웃으면서 받았다.


2)  이를테면, 조숭이 하후씨(夏候氏)의 아들이며 하후돈(夏候惇)의 숙부라는 견해도 있다.


3)  조조는 어린 시절, 매 날리기와 개를 달려 사냥하기를 좋아하였다. 또 끝도 없이 놀았다. 그의 숙부가 자주 이 일을 조숭(曹嵩)에게 말하니, 조조는 이것을 근심하였다. 그후 조조는 길에서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것처럼 했다. 숙부는 괴이하게 여기고 이 까닭을 물었다. 조조는 “갑자기 마비증상이 온 것입니다”라고 했다.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숙부의 말이 네가 마비증상이 있었다는데, 이젠 괜찮으냐?”라고 묻자, 조조는 “본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조조와 숙부의 말이 맞지 않자 조숭은 동생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 이후, 숙부가 와서 무엇인가를 알려와도 조숭은 다시는 믿지 않았고, 그 결과 조조는 더욱 자유롭게 놀수 있었다.


4)  교현은 조정에서 삼공을 역임한 관료였는데, 그가 무명(無名)인 조조에게 이런 평가를 내리게 된 것은 조조의 앞날에 큰 보탬이 되었다. 사실 조조는 훗날(건안 7년) 군대를 초현에 주둔시켰을 때, 교현의 고향인 저양(雎陽)에 부하를 먼저 파견하여 제사지낼 준비를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으면서 교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깊이 간직했다.


5)  효렴이란 본래 전한(前漢) 무제(武帝)시대 때 관리를 뽑던 두 가지 과목으로서, 한 군(郡)과 국(國)에서 효자〔孝〕와 청렴한 인사〔廉〕를 각각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대체로 인구 20만 중에 한 명이 할당되었다. 나중에 가서 이 둘을 합하여 ‘효렴’이라고 했다.


6)  위는 큰 현에는 두 명, 작은 현에는 한 명을 배치하여 치안을 담당하도록 했는데, 응소(應昭)의 한관(漢官)에 의하면, 낙양에는 효렴 출신의 좌위(左尉)와 우위(右尉)를 배치하였으며, 봉록은 최고 4백 석을 받았다.


7)  큰 현을 다스리는 자를 령(令)이라고 하였는데 1천 석을 주었으며, 작은 현을 다스리는 자를 장(長)이라고 하여 3백 혹은 4백 석을 주었다.


8)  기도위는 황제의 경호나 수도의 경비를 담당하는 우림기(羽林騎), 즉 금위군(禁尉軍)의 통솔관이다. 도위란 장군․교위 다음 가는 무관이다.


9)  《한서(漢書)》에 의거해 보면, 현의 높은 관리를 가리켜 장리(長吏)라고 불렀는데, 《삼국지(三國志)》에서는 령과 장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10)  주의 장관을 시대에 따라 목(牧) 혹은 자사(刺史)라고 불렀는데, 《삼국지》의 기술은 자못 혼란스럽다. 자사는 중평 5년부터 목이라고 칭해졌으며, 군의 태수와 마찬가지로 2천 석을 주었다.


11)  유씨의 일족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름은 상세하지 않다.


12)  원소에 대한 조조의 반박 편지는 다음과 같다. “동탁의 죄는 천하에 폭로되어야만 하오. 내가 대군을 모으고, 정의로운 병사를 일으킨 결과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호응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 이것은 정의로서 행동했기 때문이오. 지금 천자는 미약하고 간신에게 제어당하고 있지만, 창읍왕(昌邑王)처럼 국가를 멸망시키지는 않았소. 그런데 하루아침에 천자를 바꾸면 천하 사람들이 어찌 편안하겠소? 그대는 유우(劉虞)가 있는 북쪽을 향하시오. 나는 서쪽을 향하겠소.”


13)  이때 진번(陳蕃)의 아들 진일(陳逸)은 방술사(方術士)인 평원(平原)의 양해(襄楷)와 왕분(王芬)이 주최한 자리에 출석했다. 양해가 “천문(天文) 현상이 환관에게 이롭지 않으니, 황문(黃門)과 상시(常侍) 등 고관일족은 멸망할 것이오”라고 하자 진일은 매우 기뻐했다. 왕분은 “그렇다면 내가 제거된다는 말이오?”라고했다. 그래서 허유(許攸)등과 결탁했다. 영제(靈帝)는 하간(河間)에 있는 옛날 저택을 순행하려고 하였는데, 왕분 등은 그 기회에 난을 일으키려고 계획하고는 곧바로 상소를 올려 흑산적이 군현을 공격하고 협박하니 군대를 출동시킬 것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마침 그때, 북쪽에 붉은 기운이 동서로 지나가고 있었다. 태사(太史)가 “음모가 있으니 북방을 순행하기에는 적당치 않습니다”라고 했으므로, 황제는 중단했다. 왕분에게 군대 출동을 중지하라고 칙명을 내리고, 급히 그를 불러오도록 하자, 왕분은 두려워 자살했다.


14)  영제는 장제(章帝)의 현손(玄孫)으로서 낙양에서 하간왕(河間王)의 뒤를이어 제위에 올랐다.


15)  하진(河進)의 여동생으로 영제의 황후, 즉 하태후(何太后)이다.


16)  《후한서(後漢書)》〈백관지(百官志)〉를 보면, 대장군은 삼공(三公)과 동등한 지위에 속하며, 태위(太尉)와 동격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태위보다 높다. 대장군은 주로 정벌과 반란진압을 담당하였다.


17)  조조는 이것을 듣고 조소하며 말했다. “거세된 환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연히 있지만, 그 시대의 군주가 그들에게 권력이나 은총을 주지 않아 이런 사태를 초래하게 되었소. 만일 그들의 죄를 다스린다면 장본인을 처형하고, 한 사람의 옥리(獄吏)로 충분하오. 무엇 때문에 밖에 있는 장군을 불러올 필요가 있겠소? 그들을 죽이려고 하면 일은 반드시 드러나니 나는 그들의 패배가 보이오.”


18)  정(亭)은 행정단위의 하나로서 진나라 때 생긴 제도인데, 가장 낮은 단위는 리(里)이다. 10리마다 한 개의 정이 있고, 정에는 한 명의 정장(亭長)이 있다. 십정(十亭)이 일향(一鄕)이고, 그 향마다 삼노(三老)가 있다. 향 위에 현(縣)이 있고, 현 위에는 군(郡) 혹은 국(國)이 있고, 군 위에는 주(州)가 있다. 정장은 주로 경찰 사무를 맡았다.


19)  낙양에 있는 동탁을 포위하는 데 있어서 서쪽만 제외하는 형세를 말한다.


20)  동주(東周)의 시대에 주(周)왕실은 하남(河南)과 낙양(洛陽)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주(二周)란 이것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후한(後漢)의 수도 낙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가리킨다.


21)  장수들은 모두 돌아가서 스스로를 구하려고 주장했지만, 조조는 말하기를 “손빈(孫臏)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를 공격하고, 경엄(耿弇)은 서안(西安)으로 가려고 임치(臨菑)를 공격했소. 적은 우리 군대가 서쪽으로 향한다는 것을 들으면 돌아올 것이고, 무양(武陽)은 자연스럽게 위기를 벗어나게 될 것이오.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 군대는 적의 본거지를 격파시킬 수 있고, 절대로 무양을 함락시킬 수 없소”라고 하고는 진군했다.


22)  어부라는 남흉노 선우의 아들로서 중평(中平) 연간 흉노의 군대를 징발할 때 통솔자가 되어 한나라를 원조했다. 마침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남선우가 죽었다. 어부라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중국에 머물렀으며, 천하동란이 일어나자 서하(西河)의 백파(白波)와 합류하여, 태원(太原)과 하내(河內)를 격파하고, 여러 군을 약탈하여 도적이 되었다.


23)  조숭은 태산(泰山)의 화현(華縣)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조는 태산태수 응소(應昭)에게 명하여 곤주(袞州)까지 가족을 보내오도록 했다. 응소의 군대가 한현에 도착하기 전에 도겸(陶謙)은 기병 수천 명을 보내 조숭의 가족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조숭의 가족은 응소가 영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계하지 않았다. 도겸의 병사는 도착하여 조조의 동생 조덕(曹德)을 문 중앙에서 죽였다. 조숭은 두려워하여 뒷담을 뚫어 먼저 그 첩을 나가게 했는데, 첩이 뚱뚱하여 적들이 올 때까지 나갈 수 없었다. 조숭은 우리로 도망갔으나 첩과 함께 살해되고, 일가가 모두 죽었다. 응소는 두려워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로 몸을 의탁했다. 후에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응소는 이미 죽었다.


24)  조조가 복양을 포위하자, 복양의 호족 전씨(田氏)가 내통하여 왔으므로, 조조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군대는 패배하였다. 여포의 기병이 조조를 붙잡았으나 그가 조조인지 모른 채 심문했다. “조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자 조조는 말하기를, “황색 말을 타고 도망가고 있소”라고 했다. 여포의 기병은 곧 조조를 풀어주고 황색 말을 타고 가는 자를 추격하였다. 성문에는 불길이 치솟았지만, 조조는 불을 뚫고 성을 빠져 나왔다.


25)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천자로부터 특별히 받는 것인데, 사지절(使持節)․지절(持節)․가절(假節) 등 세 등급이 있다. 사지절은 2천 석, 자사․군수 이하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지절은 군사에 관한 일로 군령을 범한 자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또한 가절은 내외의 제군(諸軍)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26)  종묘는 선조를 제사지내는 영묘(靈廟)로써 국가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27)  거기장군은 삼공격인 대장군과 표기장군의 다음에위치하는 상경(上卿)격이다.


28)  ‘대신하게 했다’라는 말은 원문에는 ‘행(行)’이라고 되어 있는 원문을 번역한 것인데, 높은 관직을 가진 자가 낮은 직책을 겸임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바꿔 말해서 사공으로 있으면서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거기장군을 겸직하는 것을 말한다.


29)  천자가 낙양에 도착한 당초에는 성 서쪽에 있는 원중상시(元中常侍) 조충(趙忠)의 저택에 행차했다. 장양(張楊)에게 궁실을 수리하도록 하고, 궁전의 이름을 양안전(揚安殿)이라고 했다. 8월에 황제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30)  원소를 배반한 병졸이 조조가 있는 곳으로 와서 말하기를, “전풍(田豊)이 원소로 하여금 일찍 허현(許縣)을 습격하도록 하였는데, 만일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한다면, 천하는 가르쳐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조는 곧 장수(張繡)의 포위를 풀었다.


31)  후한 말에는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이 격렬하였는데, 여기에 관료들까지 가담한 복잡한 정세였다. 관료와 환관에 대한 서로의 반발은 첨예화되었고, 외척과 결탁하고 대립했다. 이 중에서 환관의 대표적 인물이 장양이다. 조조가 장양의 저택을 침입한 것도 그 이면에는 환관과의 대립이 배경이 된다.


32)  허유(許攸)가 원소에게 진언하기를, “공에게는 조조와 서로 공격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급히 군사들을 분산하여 대치시켜서 다른 길을 통해 천자를 맞이하여 일을 성공시키십시오”라고 권했으나, 원소는 허유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나는 먼저 그를 포위하여 취해야만 하오”라고 말하였으므로 허유는 화가 났다.


33)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의하면, 조조는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편지를 태웠다고 한다. “원소가 막강하였을 때, 나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없었는데, 일반 백성들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34)  조괄은 조나라 맹장 조사(趙奢)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는 조괄이 장군으로 임명되자, 장군감이 아니라며 임명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35)  조조는 자신이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가 침략하러 오지 않았고, 관도(官渡) 싸움에서는 원소를 구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유표가 자기의 보존만을 바라는 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원소의 아들 원담과 원상 역시 교활하므로 이 혼란을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36)  이때는 원소가 죽은지 5개월이 되는 시기이다. 원담(袁譚)은 집을 나와 백부의 집에 있었으므로 3년상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2년 이내에 결혼을 한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37)  원담은 포위망이 풀리자 은밀히 장군의 인수(印綬)를 여광(呂曠)에게 주었다. 여광은 인(印)을 받아 조조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조조는 말하기를 “나는 당연히 원담이 계략을 꾸밀 것을 알았소. 나에게 원상을 공격하도록 하고, 그 사이에 백성들을 약탈하고 군세를 모아 원상이 패배하면 자신은 강력하게 되어 나의 피폐함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오. 원상이 패배하면 나의 군대는 강성하게 되오. 어찌 피폐함을 이용하겠소?”라고 했다.


38)  이와 관련된 조조의 포고령은 이렇다.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갖고 있는 자는 부족함을 근심하지 않고 균등하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한다. 원씨의 정치에는 권세있는 자의 생각대로 하게 하고, 친척에게는 겸병을 하도록 했다. 아래에 있는 백성들은 가난하고 약하므로 대대로 조세를 내고, 가산을 모조리 팔아도 명령에 응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심배(審配)는 친족으로 죄인을 숨겨주고, 망명자의 신분이 되도록 했다. 주민이 친해지고 군사력이 강대해지기를 희망한다고 하여 어찌 얻을 수 가 있겠는가! 땅에 대한 세금은 1묘에 4승으로 하고, 호구세로는 비단 두 필을 내도록 하고, 그외의 것은 징발하지 않겠다. 군국(郡國)의 태수와 상은 분명하게 감찰하고, 호족 백성들로 하여금 감추는 것이 없도록 하는 한편, 약한 백성들에게 이중으로 세금을 거두지 마라.”


39)  조조가 원담을 공격할 때, 해가 뜰 때부터 시작하여 하루종일 싸웠지만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조조가 친히 큰 북을 손에 집어들자, 병사들은 모두 발분하여 싸움에 응해 격파시켰다.


40)  10월 을해일에 포고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무릇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통솔하여 보좌하는 관리를 세울 때 경계해야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보는데서만 복종하는 것이다. 《시경》에서 ‘내가 도모한 것을 사용하니, 백성들에게는 큰 후회가 없을 것이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군신의 간절한 기원이다. 나는 무거운 임무를 지고 항상 중정(中正)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진언을 바라고 있지만 근래 이래로 좋은 계책을 듣지 못했다. 어찌 내가 인재등용의 길을 열어 부르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허물을 가지겠는가? 지금 이후로 여러 연속(椽屬)과 치중(治中)․별가(別駕)들은 항상 매월 1일에 각각 정치적인 잘못을 진언하도록 하라. 나는 그것을 지켜보겠다.”


41)  조조는 유비에 의하여 군선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군사들을 이끌고 화용(華容) 길을 통해 도보로 돌아오는데, 진펄을 만나 다시 길이 막혔다. 하늘에서는 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남아있는 군사 모두 풀을 등에 지고 진펄을 막도록 하니, 기병은 곧 지나갈 수 있었다. 군사들 중에서 사람이나 말에게 밟혀 진흙 속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군대가 탈출하자 조조는 매우 기뻤다. 여러 장수들이 질문하자, 그는 “유비는 나와 동등한 무리이지만, 계략을 짜는 것은 유비가 약간 늦소. 그가 만일 일찍 불을 놓았다면 우리는 전멸했을 것이오”라고 했다. 유비 또한 불을 놓았으나 역시 미치지 못했다.


42)  한고조 2년, 한나라가 초나라 영양(榮陽)․경현(京縣)․색현(索縣) 사이에서 싸움을 할 때, 황하까지 연속하여 울타리를 세워 오창(敖倉)에 있는 식량을 취하였다. 응소의 주해(注解)에서 “적이 군수물자를 약탈하러 올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길처럼 담을 쌓았다”고 했다. 조조는 담을 세우지 않았고, 수레를 연결하여 울타리로 만들어 양쪽을 방어했던 것이다.


43)  12일, 천자는 답신을 하여 5천 호를 삭감하고, 양도한 세 현 1만 5천 호를 분할하여 세 아들에게 주었다. 조식은 평원후(平原侯)에, 조거(曹據)는 범양후(范陽侯)에, 조표(曹豹)는 요양후(饒陽侯)에 봉해졌으며, 식읍은 각각 5천 호를 받았다.


44)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관서(關西)의 병사는 강하고 긴 창을 사용하는 법을 익숙할 정도로 연습했으므로 선봉에 설 병사를 충분히 선발하지 않는다면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전쟁의 주도권은 우리 쪽에 있지, 적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적군은 긴 창을 사용하여 숙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날카로움을 얻을 수는 없으니, 여러분들은 단지 보기만 하시오”라고 했다.


45)  구석(九錫)은 천자가 큰 공을 세운 제후에게 주는 아홉 가지 예물로써, 거마(車馬)․의복(衣服)․악기(樂器)․주호(朱戶)․납폐(納陛)․호분(虎賁)․궁시(弓矢)․도끼․거창(耟鬯: 수수와 향초를 섞어 빚은 술)을 말한다.


46)  중평(中平) 5년(188) 8월, 처음으로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설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둔기교위이다. 서원팔교위는 후한 말에 환관들이 키운 황실경비병으로써 하진(何進)은 서원팔교위의 무력이 두려워서 지방의 군대를 불러들였는데, 결국 동탁의 난을 겪게 되었다.


47)  조조는 화흠(華歆)에게 병사를 지휘하도록 하여 궁전에 침입하여 황후의 체포를 명령했다. 황후는 문을 닫고 벽 속에 숨었지만, 화흠은 문을 부수고 벽을 열어 황후를 끌어냈는데, 황제는 어사대부 희려(  慮)와 동석하고 있었다. 황후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맨발러 와서 황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다시는 서로 살 수 없습니까” 황제는 “나 또한 언제까지 목숨이 있을지 모르오”라고 했다. 황제는 희려에게 말하기를, “희공,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소!”라고 했다. 곧 화흠은 황후를 끌고가서 살해했다. 복완(伏完)과 그 일족의 죽은 자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48)  두무는 그의 어머니가 환제(桓帝)의 황후가 되어서 대장군이 된 인물이다. 그 당시 반환관 연합의 대표가 진번(陳番)이었는데, 이들이 처형된 것은 건영 원년(建甯元年, 168) 9월이며, 중상시 조절(曹節)은 천자의 조칙에 따라 외척과 관료의 연합세력을 타파했다.


49)  실제적인 봉작은 없이 이름만 제후로서 작위는 18등급이 있었다. 진대(晋代)의 허봉(虛封)이란 여기서 비롯된다.


50)  궁주으이 여러 문을 지키고 숙직을 담당하며, 밖으로 나갈 때에는 전쟁용 수례부대나 기마부대로 들어가는 자를 관리한다. 본래 속관(屬官)이 아니며, 부승상(副丞相)도 아니다.


51)  원문은 ‘평왈(評曰)’이며, 각 권이 끝날 때마다 진수가 촌평을 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기(史記)》의 ‘태사공왈(太史公曰)’,《한서(漢書)》의 ‘찬왈(贊曰)’,《자치통감(自治通鑑)》의 ‘사마온공왈(司馬昷公曰)’과 같은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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