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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위서(魏書) 삼소제기(三少帝紀) 고귀향공기(高貴鄕公紀)

작성자역풍|작성시간04.07.07|조회수313 목록 댓글 0
 

삼국지 정사(正史)


위서(魏書)


삼소제기(三少帝紀)


고귀향공기(高貴鄕公紀)


  고귀향공(高貴鄕公)은 휘가 모(髦)이고, 자가 언사(  士)이며, 문제의 손자이고, 동해정왕(東海定王) 조림의 아들이다.

  정시 5년(244)     담현(郯縣)의 고귀향공으로 봉해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업을 일찍 이루었다.9) 제왕이 쫓겨나자, 공경들이 상의하여 조모(曹髦)를 맞아들여 즉위시켰다.

  10월 4일     고귀향공이 현무관(玄武館)에 도착하자 대신들은 상주하여 전전(前殿)에 머물기를 요청했지만, 조모는 선제가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하며 피하고 서상(西廂)에 머물려고 했다. 대신들은 또 법가(法駕)로 그를 맞으려고 했지만, 조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5일, 조모가 낙양으로 들어가자 대신들은 서액문(西掖門) 남쪽에서 맞아 배례하였으며, 조모가 수레에서 내려 인사에 답하려고하자, 옆에서 안내하는 자가 말했다.

  “의례에 따르면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모는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하요.”

  그리고 인사에 답했다. 지거문(止車門)에 이르러서 조모는 수레에서 내렸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옛날에는 수레를 타고 궁궐까지 들어갔습니다.”

  조모는 말했다.

  “나는 황태후의 부름을 받았을 분이지, 어떻게 하는 바를 모르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태극동당(太極東堂)까지 걸어가 태후를 만났다. 그 날, 조모는 태극전전(太極前殿)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즉위식에 참가한 백관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다. 조모가 조서를 내렸다.

  -----  옛날, 삼조(三祖;武帝․文帝․明帝)는 신과 같은 용감함과 성스러운 덕이 있었으며 천명에 응하여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제왕(齊王)은 황제의 자리를 이은 후, 법도를 위반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선조의 덕을 뒤엎었다. 황태후는 사직의 중대함을 깊이 생각하고 정치를 보좌하는 대신들의 계획을 받아들여 제왕을 내쫓고 천하를 다스리는 중대한 임무를 나 한 사람에게 주었다. 나는 보잘것없는 몸으로 왕공의 위에 자리하여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며, 선조들의 큰 가르침을 이어 중흥의 대업을 회복시킬 수 없을까 깊은 계곡에 처한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금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수족이 되어 나를 보좌하고, 사방의 장수들은 병사를 이끌고 무위를 떨쳐 나를 도우며, 모두 덕을 쌓고 공적을 쌓아 황제의 궁전에 충성하고 있다. 선조․선부의 덕 있는 신하나 측근에 있는 관료들에 의지하여 국가를 안정되게 한다면 나는 비록 어리석지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군왕의 도는 덕망의 두터움을 천지와 같게 하고, 은혜를 온 세상에 펼치며, 자애를 으뜸으로 하고, 좋고 나쁨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그런 연후에 윗쪽에서 교화를 실시하면 아래쪽에서 모든 백성들이 따라한다고 들었다. 나는 비록 덕이 없고 군왕의 큰 도리와는 멀지만 천하 사람들과 함께 도를 따라가고 싶다. 《상서》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은혜이고, 만인이 이것을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아울러 황제가 사용하는 수레, 옷, 후궁의 비용을 줄이고, 또 상방(尙方)과 어부(御府)에서 각종 사치스럽고 호화로워 실제적인 용도가 없는 물건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원(正元) 원년(251) 겨울 10월 7일     시중에게 부절을 갖게 하여 사방으로 분산 파견하여 풍속을 관찰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으며,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 직업을 잃은 사람을 살피도록 하였다. 8일, 대장군 사마경왕에게 고급관원을 상징하는 황금 월(鉞)을 주어 조정에 들어올 때 빨리 달리지 않고 어떤 일을 상주할 때는 자신의 관직만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검을 차고 신을 신고 궁전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13일, 황룡이 업현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10) 19일,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황제를 폐립하는 문제에 관한 정책을 결정한 공적을 논하게 하도록 하여 각기 차이를 두어 작위를 봉하고 식읍을 증가시켰으며, 관직을 올려주고 하사품을 주었다.

  2년(255) 봄 정월 12월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다. 25일, 대장군 사마경왕이 이들을 정벌했다. 30일, 거기장군 곽회(郭淮)가 세상을 떠났다.

  윤달 16일     낙가(樂嘉)에서 문흠을 쳐부수자, 문흠은 도주하여 오나라로 달아났다. 21일, 안풍진의 도위가 관구검을 참수하고 머리를 수도로 보내왔다. 29일, 또 회남의 사대부와 백성들 가운데 관구검과 문흠에게 속은 사람을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 진남장군 제갈탄(諸葛誕)을 진동장군으로 삼았다.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사망했다.

  2월 5일     위장군 사마문왕을 대장군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했다. 12일, 오나라 대장 손준(孫峻) 등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수춘(壽春)에 도달했지만, 제갈탄이 이들을 맞아 싸워 격파시켰으며, 오나라 좌장군 유찬(留贊)을 죽이고 승전보를 수도로 보냈다.

  3월     변씨(卞氏)를 내세워 황후로 삼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여름 4월 3일     황후의 부친 변륭(卞隆)을 열후로 봉했다. 23일, 정남대장군 왕영을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정동대장군 호준(胡遵)을 위장군에, 진동대장군 제갈탄을 정동대장군에 임명했다.

  8월 2일     촉나라의 대장군 강유가 적도(狄道)를 침범하자, 옹주자사 왕경(王經)이 조서(洮西)에서 강기와 대전하였는데, 왕경은 크게 패하고 돌아와서 적도성을 지켰다. 22일, 장수교위 등애(鄧艾)를 안서장군 대리로 임명하고, 정서장군 진태(陳泰)와 힘을 합쳐 강유를 방어하도록 했다. 19일, 또 태위 사마부를 보내 뒤를 잇는 부대가 되도록 하였다.

  9월 21일     황제는 《상서》공부를 끝마치고, 경전을 직접 강의한 사공 정충(鄭沖), 시중 정소동(鄭小同) 등에게 각기 다르게 하사품을 주었다. 25일, 강유가 물러나 촉나라 경내로 돌아갔다.

  겨울 10월     조서를 내렸다.

  -----  나는 덕이 부족하여 외적의 포악한 행위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촉나라의 적군들로 하여금 국경지대를 침범하도록 하였다. 조서 싸움에서 져서 사망한 장수의 수가 모두 천여 명이나 된다. 어떤 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원귀가 돌아오지 못했고, 어떤 이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타향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이 때문에 깊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지금 관련있는 군의 전농(典農) 및 안이호군(安夷護軍)․무이호군(撫夷護軍) 등 각각 부에서, 관리들로 하여금 이런 사람들이 있는 가솔들을 위문하도록 하고, 1년간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힘을 다해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옛 제도에 따라 조치하고 누락되는 바가 없도록 하라.

  11월 16일     농우(隴右)의 사군(四郡;농서․남안․천수․광위)과 금성은 매년 적군의 침공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모반하여 적에게 투항하기도 했는데, 그 친족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12월 5일(?)     조서를 내렸다.

  -----  지난번 조서 싸움에서 장수와 관리․병사․백성들 중에 전쟁터에서 싸우다 사망했거나 조수에 빠져 익사한 사람들이 있는데, 유골을 거두지 못하고 들녘에 방치해두었으므로 항상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지금 정서장군과 안서장군은 각각 부하들을 시켜 전쟁터나 해안가에 버려진 시체를 찾아내어 거두어들이고 주검은 매장하여 유족이나 죽은 자를 위로하도록 하라.

  감로(甘露) 원년(256) 봄 정월 24일     청룡이 지현(軹縣)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는데, 28일 패왕(沛王) 조림이 죽었다.

  여름 4월 4일     대장군 사마문왕은 곤룡포와 면류관을 하사받고 붉은 신발이 여기에 첨가되었다.

  10일, 조모는 태학(太學)을 시찰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하문(下問)을 했다.

  “성인은 신비한 도를 깊이 통찰하고, 천지를 관찰하여 처음으로 8괘를 만들었으며, 후대의 성인이 다시 이것을 둘로 겹쳐서 64괘로 만들었소. 효(爻)를 조합시킨 그 수는 극치에 달하오. 이 《역(易)》에 관한 대의는 모든 형상을 포괄하는데, 하대에는 《연산(連山)》이 있었고, 은대에는 《귀장(歸藏)》이 있었으며, 주대에는 《주역(周易)》이라 하였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오?”

  역학박사 순우준(淳于俊)이 대답했다.

  “복희는 수황(燧皇)의 그림에 따라 팔괘를 만들었으며, 신농이 이것을 발전시켜 64괘를 만들었습니다. 황제․요․순은 그 변화에 통달하고 하․은․주 삼대는 시대에 따라 마땅하게 만들었으니, 질(質;질박함)과 문(文;우미함)이 이 일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때문에 《역》이란 바뀌는 것입니다. 《연산》이라고 한 것은 산으로부터 운기가 나와 천지에 이어지는 것 같은 것이고, 《귀장》이라는 것은 모든 사물이 그 속으로 돌아가 숨는 것을 뜻합니다.”

  조모가 또 물었다.

  “만일 복희가 수황에 의거하여 ‘역’을 만들었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수인씨(燧人氏)가 죽은 후 복희씨가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소?”

  이 질문에 대해 순우준은 대답할 수 없었는데, 조모가 또 하문했다.

  “공자가 연(掾)․상(象) ----- 《역》의 괘(卦) 및 효(爻)의 해석 -----을 만들고, 정현(鄭玄)이 주를 달았으니, 비록 성인과 현인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해석한 경전의 의미는 한 가지요. 그러나 지금 연․상은 경전의 본문과 이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것을 주해에 연결시키면 어떻소?”

  순우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정현이 연과 상을 경전에 합친 것은 학자들의 성찰을 줄이고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모가 또 하문했다.

  “만일 정현이 이것을 합친 것이 학문하는 사람에게 진실로 편리하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이것들을 합쳐 학자들이 이해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순우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공자는 아마 그의 해석이 주 문왕이 만든 문과 서로 뒤섞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합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인이 겸허한 태도로 합치지 않는 것입니다.”

  조모가 하문하여 말했다.

  “만일 성인이 합치지 않은 것을 겸허한 태도라고 한다면, 정현은 무엇 때문에 혼자 겸허한 태도를 갖지 않았나?”

  순우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옛날 도리는 광대하고 심원하며, 폐하의 질문은 심오하고 원대하니 신은 상세히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조모가 또 물었다.

  “《역》의 〈계사전(繫辭傳)〉에서 ‘황제․요․순은 옷을 늘어뜨리고 천하를 다스렸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복희․신농 시대에는 옷이 없었다는 것이오. 그러나 성인이 천하를 교화시키는 데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가?”

  순우준이 대답했다.

  “삼황의 시대에는 사람이 적고 새와 짐승이 많았기 때문에, 그 깃털이나 가죽을 얻어 천하 사람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새와 짐승의 수가 적어졌기 때문에 옷을 만들게 되었으니,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입니다.”

  조모가 또 질문했다.

  “《역》〈설괘전(設卦傳)〉에는 건괘를 하늘을 대표하는 것으로 삼고 있지만, 또 금․옥, 노둔한 말로도 삼을 수 있고, 자질구레한 사물과 나란히 제시할 수도 있겠는가?”

  순우준이 대답했다.

  “성인은 《역》을 해석함에 있어서, 멀리 있는 것으로 예를 들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것으로 예를 들기도 합니다. 가까운 것으로는 몸 주변의 여러 사물을 사용하고, 멀리 있는 것으로는 천지를 사용합니다.”

  《역경》강의가 끝나자, 조모는 또 《상서》를 강의하도록 명했다. 조모가 질문했다.

  “정현은 ‘계고(  古) ----- 《상서》〈요전(堯典)〉에 약계고제요(若  古帝堯)라고 되어있다 ----- 가 하늘과 같다는 것은 요가 하늘과 같음을 말한다’라고 했고, 왕숙은 ‘요는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고 실행한다’고 했다. 이 두 해석은 다른데, 어떤 것이 옳은가?”

  박사 유준(庾峻)이 대답하여 말했다.

  “전대의 학자들이 내린 해석에는 각기 차이가 있으므로 저에게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서》의 〈홍범(洪範)〉에서는 ‘세 사람이 점을 쳤는데 그 중 일치한 두 사람의 말을 따랐다’11)라고 했습니다. 가규(賈逵)․마융(馬融) 및 왕숙(王肅)은 모두 ‘옛날 돌에 따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홍범〉편의 견해로부터 보면, 왕숙의 해석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조모가 질문을 했다.

  “공자는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크므로 요는 하늘을 법으로 삼았다 ----- 《논어(論語)》〈태백(泰伯)〉’고 했소. 요의 위대함은 하늘의 위대함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아 그것에 의지한 것이며,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지고함과 차이가 있소. 지금 전적을 펼쳐 의미를 열어 성인의 덕을 밝히는데, 요의 성덕을 버리고 달리 미세한 점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어찌 작가의 뜻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유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은 스승의 견해를 받아 따르고 있으므로 아직 《상서》의 대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학설의 좋은 점을 선택하는 것도 폐하께서 결정하십시오.”

  이어서 《상서》〈요전(堯典)〉의 사악(四嶽)이 곤(鯀)을 추천한 일에 이르게 되었다. 조모는 또 질문했다.

  “고대 대인(大人)은 천지와 그 덕을 일치시켰고, 해와 달과 그의 밝은 지혜를 일치시켰으므로 생가을 함에 있어 치밀하지 않음이 없고, 밝은 지혜는 비추지 않는 곳이 없었소. 지금 왕숙은 ‘요는 곤이 어떠한 인물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시험삼아 임용한 것이다’라고 했소. 이와 같이 성인의 밝은 지혜도 부족한 점이 있는가?”

  유준이 대답했다.

  “비록 성인이 광대함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임금은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 명지(明智)인데, 요가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성인과 현자를 받아들여 빛나는 업적을 이룬 것은 성인의 덕을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조모가 또,

  “각기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성인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오. 만일 시작을 좋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성인이라 할 수 있겠소? 우가 말하기를, ‘요제는 이것을 어려워했다’고 했지만, 최종적으로 성인과 현자를 임명할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진가를 바르게 알았다는 말이고, 성인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성인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오. 경전 ----- 《상서(尙書)》〈고요모(皐 謨)〉 ----- 에는 ‘다른 사람의 진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명지이고, 이 명지가 있다면 사람을 바르게 임명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소. 만일 요가 곤의 능력을 의심하여 9년간 시험삼아 임용하고 사람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를 성인이라 할 수 있겠소?”

  유준이 대답했다.

  “제가 경서나 전(傳;주석)을 보면, 성인의 행동에도 과실이 있습니다. 때문에 요는 사흉(四凶;요 임금 시대의 사악한 사람)에게 잘못을 범했고, 주 공단은 이숙(二叔;관숙․채숙)에게 잘못을 범했으며, 공자는 재여(宰予;복상 기간의 단축을 제창하고, 낮잠을 자서 공자에게 비난당한 제자)에게 잘못을 범했습니다.”

  조모가 질문했다.

  “요가 곤을 임용하여 9년간 이룬 것이 없었고, 5행의 배열을 혼란하게 하고 ----- 《상서(尙書)》〈홍범(洪範)〉, 백성들은 어둠속에 있었고, 공자가 재여에게 잘못을 범한 것에 이르러서는 단지 말과 행위 사이의 문제이므로 일의 중요성은 요의 과실과 같지 않소. 주공의 관숙․채숙에 대한 일은 《상서》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박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유준이 대답했다.

  “이는 모두 선현들도 의심하는 바이므로, 신의 짧은 식견으로는 연구하여 논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백성들 중에서 우순(虞舜)이라 부른 환(鰥)이 있다.(《상서》〈요전〉;순이 직접 후계자에 대해서 사악에게 추천을 구한 사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모가 질문했다.

  “요의 시대에는 홍수로 재해가 생기자 사흉을 조정에 임명했소. 이것은 현인을 빨리 등용하여 백성들을 구제해야만 되었던 것이오. 순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성덕이 빛났지만 오랫동안 임용되지 못했는데, 무엇 때문이오?”

  유준이 대답했다.

  “요는 탄식하여 현자를 구하여 직접 자리를 양도하려고 했지만, 사악은 ‘우리는 덕행이 없으면 제위를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는 또 사악에게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현자이면 추천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순이 추천되었던 것입니다. 순이 추천된 근본 원인은 사실 요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인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모가 질문을 했다.

  “요는 이미 순에 관한 평판을 들었으면서도 때에 이르러 등용하지 못했고, 또 그 당시 충성스런 신하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으며, 사악에게 신분이 낮은 현자를 추천하도록 한 이후에야 천거되었소. 이것은 적극적으로 성인을 임용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소.”

  유준이 대답했다.

  “이러한 점은 신과 같이 어리석은 견해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모는 또 《예기》를 강의하도록 명했다.

  조모가 말했다.

  “태고시대 백성들은 덕을 세웠고, 다음 시대 백성들은 도덕을 널리 전하는 데 힘썼소 ----- 《예기》〈곡례상〉. 나라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리든지 교화에는 각기 차이가 있소. 어떤 정치를 실시하면 덕행을 세울 수 있고, 어떤 정치를 실행하면 이룰 수 없겠는가?”

  박사 마조(馬照)가 대답했다.

  “태고시대 백성의 덕을 세웠다는 것은 삼황오제(三黃五帝)시대에 덕으로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을 가리키고, 다음 시대에 널리 전하는 데 힘썼다는 것은 삼왕(三王;夏․商․周)의 시대에는 예로써 국가를 다스렸음을 말합니다.”

  조모는 질문했다.

  “이 양자의 교화 결과에는 두터움과 엷음의 차이가 있음을 말하는가, 군주의 자질에 우열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마조가 대답했다.

  “사실 시대에 따라 순박함〔質〕과 수식〔文〕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교화에도 두터움과 얇음이 있는 것입니다.”

  5월     업성과 상락(上洛)에서 모두 단 이슬이 내렸다고 보고를 했다.

  여름 6월 1일     연호를 감로(甘露)라고 고쳤다. 20일, 청룡이 원성현(元城縣) 내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가을 7월 5일     위장군 호준(胡遵)이 세상을 떠났다. 9일, 안서장군 등애가 촉나라 대장 강유를 상규에서 크게 무찔렀으므로 조서를 내렸다.

  우리 군대는 온 힘을 다해 출동하지 않았지만 적군을 무너뜨렸으며, 사로잡은 자와 죽인 자가 만여 명이나 된다. 최근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지금 사자를 파견하여 장수와 병졸을 포상하고 대연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여 온종일 즐겁게 술을 마시도록 할지니 나의 마음을 전하라.

  8월 26일     대장군 사마문왕에게 대도독(大都督)의 칭호를 더하고, 조정에 들어와 어떤 일을 상주할 때에 이름을 적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황금 월을 주었다. 29일, 태위 사마부를 태부로 삼았다.

  9월     사도 고유를 태위로 삼았다.

  겨울 10월     사공 정충(鄭沖)을 사도로 삼고,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노육(盧毓)을 사공으로 삼았다.

  2년(257) 봄 2월     청룡이 온현(溫縣)의 우물에 나타났다.

  3월     사공 노육이 죽었다.

  여름 4월 3일     조서를 내렸다.

  -----  현도군(玄 郡) 고현현(高顯縣)의 관리와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현장(縣長) 정희(鄭熙)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평민 왕간(王簡)은 정희의 시체를 등에 엎고 밤을 낮으로 이어서 달려가 정희의 고향까지 운반했으니 그의 충의와 정절은 칭찬하고 장려할 만하다. 지금 특별히 왕간을 충의도위(忠義都尉)에 임명하고, 그의 특출난 행위를 표창하라. 24일, 정동대장군 제갈탄을 사공으로 임명했다.

  5월 1일     조모가 벽옹으로 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시를 짓도록 명했다. 시중 화유(和逌)와 상서 진건(陳騫)등은 제한된 시간을 초과하여 시를 지었으므로, 담당관리는 그들의 관직을 파면하라고 상주하였다. 조모가 조서를 내렸다.

  -----  나는 우매하지만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시부(詩賦)를 모아 정치의 득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처럼 혼란스러움은 사람을 진실로 불안하게 하오. 지금 화유 등을 파면시키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 여러 신하들은 모두 옛날의 올바른 도리를 깊이 음미하여 배우고 경전을 밝히고 닦아 얻어서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라.

  5일, 제갈탄이 나아가 복종하지 않고 군대를 출동시켜 반란을 일으켜서 양주자사 낙림(樂  )을 살해했다. 6일, 조정에서는 제갈탄에게 협박당한 회남의 장수․병사․백성을 사면시켰다. 7일, 조서를 내렸다.

  ----- 제갈탄은 흉악한 반란을 일으켜 양주를 혼란 속에 빠지게 했다. 옛날(전한 초기)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 고조는 직접 정벌하였고, 외효(隗囂)가 조정을 등지고 저항하자 광무제 유수(劉秀)는 서쪽으로 정벌을 나갔다. 또 우리 위왕조의 열조(烈祖), 명황제는 직접 오와 촉을 정벌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모두 격노하여 군대의 위세를 떨쳐서 조저으이 위엄을 지킨 것이다. 지금 황태후와 나는 직접 정벌하여 약한 반란자를 빨리 평정시켜 양주를 안정시켜야만 할 것이다. 9일, 조서를 내렸다.

  ----- 제갈탄은 반란을 일으켜 충의로운 사람들을 협박하였지만, 평구(平  )장군 임위정후(臨渭亭侯) 방회(龐會), 기독(騎督)편장군 노번(路蕃)은 각각 부하를 이끌고 성문을 부수고 뚫어 나와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용맹성과 장렬함은 응당 장려해야 한다. 방회를 향후(鄕侯)로 봉하고, 노번을 정후(亭侯)로 삼으라.

  6월 6일     조서를 내렸다.

  ----- 오나라는 하구(夏口)의 여러 군사를 감독하는 진군장군(鎭軍將軍)․사흠후(沙  侯) 손일(孫壹)에게 부절을 주어 감독하도록 했는데, 손일은 본래 적국 왕의 같은 족속으로서 상장(上將)의 위치에 있지만, 하늘을 두려워하고 운명을 깨닫고 화복에 대해 깊이 이해하여, 후회하고 깨달은 군사들을 이끌고 멀리 우리 나라에 의탁했다. 비록 은나라 말기 미자(微子)가 은나라를 떠났고, 악의(樂毅)가 연나라로 도망갔을지라도 또한 이런 행위에 불과하다. 오늘 손일을 시중거기장군으로 삼아 부절을 주고 교주목(交州牧)과 오후(吳侯)에 임명하고, 부서를 개설하여 뜻있는 자를 초빙하여 삼공과 똑같은 대우를 누리도록 하고, 고대에 후백(侯伯)을 임명할 때의 팔명(八命)의 예법에 따라 천자의 곤룡포․면류관․붉은 신발을 하사하여 모든 대우를 후하게 하라.

  25일, 조서를 내렸다.

  ----- 지금 짐이 잠시 항현(項縣)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대장군 사마문왕이 천명을 받들어 모반한 적을 징벌하기 위해 회포(淮浦)에까지 나아갔다. 옛날, 상국이나 대사마가 출정할 때는 모두 상서와 함께 갔으므로, 지금 옛날 제도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산기상시 배수(裵秀)․급사황문시랑 종회로 하여금 모두 대장군과 함께 가도록 명령했다.

  가을 8월     조서를 내렸다.

  ----- 옛날(전한시대) 연의 자왕(刺王)이 반역을 꾀하였을 때, 한의(韓誼) 등은 간언을 하다가 살해되었는데, 한 왕조에서는 그들의 아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다. 제갈탄이 포악한 난리를 일으켰을 때, 주부(主簿) 선륭(宣隆)과 보곡독(部曲督) 진결(秦  )은 절개와 의리를 지켜 일이 발생하자 굳건히 고수하다가 제갈탄에게 살해되었다. 이는 비간(比干;주왕의 포악함을 간언하다가 살해됨)처럼 신임은 없었지만, 비간과 똑같이 충간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지금 선륭과 진계의 아들을 기도위로 임명하고, 식읍과 상을 더하고, 널리 알려 그들의 성스럽고 충의로운 행위를 나타내라.

  9월     대사면을 행했다.

  겨울 12월     오나라 대장 금단(金端)과 전역(全懌) 등이 부하를 인솔하여 투항했다.

  3년(258) 봄 2월     대장군 사마문왕은 수춘성을 함락시키고 제갈탄을 참수했다.

  3월     조서를내렸다.

  ----- 옛날에 적을 이기고 적의 시체를 거두어 경관(京觀;시체를 쌓아 올려 그 위에 흙을 가득 덮는 것)을 만든 까닭은 반역자를 징벌하고 무공을 빛내기 위해서였다. 전한 효무제(孝武帝)가 원정(元鼎) 연간에 동향(桐鄕)을 문희(聞喜)로 바꾸고, 신향(新鄕)을 획가(獲嘉)로 바꾼 것은 남월(南越)이 멸망한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대장군은 직접 육융(六戎)을 통솔하여 구두(丘頭)에 진영을 두고, 안으로는 흉악한 무리들을 평정하고, 밖으로는 침략자를 무찔러서 만민을 구제하는 공을 세워 사해에 명성을 떨쳤다. 그가 적을 무찌른 곳에는 아름다운 지명이 있다. 지금 구두를 무구(武丘)로 바꾼 것은 무력으로 반란을 평정하였음을 나타내어 후대에 잊혀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것 또한 경관이나 이읍(二邑;桐鄕․新鄕)의 의미를 바꾼 뜻이다.

  여름 5월     대장군 사마문왕을 상국으로 임명하고, 진공(晉公)으로 봉했으며, 식읍 여덟 군을 주고 구석(九錫)의 예를 더했는데, 사마문왕은 아홉 차례에 걸쳐 사양하고서야 허락하였다.

  6월 13일     조서를 내렸다.

  ----- 옛날 남양군(南陽郡)의 산적이 난을 일으키고 태수 동리곤(東里袞)을 위협하여 인질로 삼으려 했을 때, 공조(功曹) 응여(應余)는 단신으로 동리곤을 지켜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응여는 뒤엎어지는 혼란 속에서 자기 몸을 죽여 주군을 구하였다. 사도는 지금 응여의 손자 응륜(應倫)을 관리로 삼아 충절을 지킨 영웅의 행운에 보답하도록 하라.

  28일, 대규모의 회남을 토벌하는 공적을 사정(査定)하고 각기 분별하여 작위와 상을 주었다.

  가을 8월 12일     표기장군 왕창(王昶)을 사공으로 삼았다. 4일, 조서를 내렸다.

  ----- 노인을 부양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는 것은 삼대(三代;夏․殷․周)가 교화를 세우고, 명성을 영원히 남긴 까닭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반드시 삼로(三老)․오경(五更)12)을 두어 숭상하고 존경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을 청하여 가르침을 받아 성실하게 사서(史書)에 기록했다. 이렇게 한 연후에 천하는 이것을 법칙으로 삼아 아랫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감화되었다. 덕을 행하는 고상한 사람을 선발하여 그 삼로․오경의 임무에 충실히 임하게 해야 되노라. 관내후(關內侯) 왕상(王祥)은 인의를 따라 행하고 평소보다 순수하고 견고한 마음을 갖고 있다. 관내후 정소동(鄭小同)은 순박하고 온순하고 공순하며 효를 행하고 우정이 두터우며 예법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지금 왕상을 삼로에 임명하고, 정소동을 오경에 임명하라.

  조모는 직접 관련있는 대신들을 인솔하고, 고대 예의에 따라 삼로․오경을 존경하며 받들었다.

  감로 3년     청룡과 황룡이 돈구현(頓丘縣)․관군현(冠軍縣)․양하현(陽夏縣)의 경계지역에 있는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4년(259) 봄 정월     황룡 두 마리가 영릉현(寧陵縣) 경계지역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여름 6월     사공 왕창이 세상을 떠났다.

  가을 7월     진류왕 조준이 죽었다.

  겨울 10월 1일     신성군(新城郡)을 분할하여 또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했다.

  11월 18일     거기장군 손일이 비구니에게 살해되었다.

  5년(260) 봄 정월 1일     일식이 나타났다.

  여름 4월     관청에 조서를 내려, 이전에 내린 명을 실시하도록 하고, 또 대장군 사마문공을 상국(相國)에 임명하고 진공(晉公)으로 봉했으며 구석의 예를 더했다.

  5월 7일     고귀향공으 세상을 떠났다. 향년 20세였다. 황태후 곽씨는 명령을 내렸다.

  ----- 나는 덕이 없어 가정의 불행을 만났다. 이전에 동해왕의 아들 조모를 옹립하여 명제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은 그가 글을 좋아하고 신하들의 주장(奏章)을 헤아렸으므로 이 중임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인데, 성정이 거칠고 그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나는 여러 번 질책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마음속에 원망하는 생각을 담고, 악역무도한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 나를 비방하여 마침내 두 궁전(황제와 황태후의 궁전)의 관계는 끊어졌다. 그가 하는 말은 참고들을 수 없었는데, 하늘과 땅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은밀히 조령(詔令)을 보내 대장군에게 종묘를 받들 수 없으니 사직을 전복시킬까봐 두렵고, 죽어서 선제들을 뵐 면목이 없음을 말했다. 대장군은 그가 아직 나이 어리니 마음을 고쳐 착한 쪽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그를 두둔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반항하고 나섰으며 행동은 더욱 지나쳤고, 일찍이 활을 들어 나의 궁전으로 쏴서 나의 머리에 꽂히기를 빌었지만, 화살은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대장군에게 조모를 내쫓을 수밖에 없음을 수십 차례 말했다. 이 아들은 그 사이의 일을 상세히 듣고 자신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을 꾀하였다. 나의 측근에 있는 자들을 매수하여 내가 복용하는 약에 몰래 틈을 타서 독약을 넣으려고 몇 차례나 계획했었다. 이 일이 드러나자 그는 이 기회를 틈타 병사들을 직접 인솔하여 서궁(西宮;황태후 궁전)으로 쳐들어와 나를 죽이고, 밖으로 나가 대장군을 해치려고 했다. 그는 시중 왕침․산기상시 왕업(王業)․상서 왕경(王經)을 불러 품안에서 조서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고 오늘 이 일을 시행해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계란을 쌓아 올리는 것보다도 더 큰 위험에 빠졌었다. 나는 나이 많은 미망인인데 어찌 또 남은 목숨을 안타까워 했겠는가? 단지 선제가 남긴 뜻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며, 사직이 곧 전복되려 하는 것만이 비통했을 뿐이다. 종묘 신령의 도움으로 왕침․왕업이 즉시 대장군에게 달려가 보고하여 먼저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이 아이는 곧 측근에 있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운룡문(雲龍門)을 뚫고 나와 전쟁용 북을 천둥같이 울리며 직접 칼을 뽑아들고 측근에 있는 자들과 함께 병사들이 진을 친 사이로 들어오다가 선봉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아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반역행위를 하고, 또 자기 스스로 커다란 화(죽음) 속에 빠졌으니, 슬픈 나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옛날 한 창읍왕(昌邑王;劉賀)은 죄를 짓고 쫓겨나 평민이 되었으니, 이 아이도 평민의 예식으로 매장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고, 조정의 내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 아이의 행위를 알도록 하라. 또 상서 왕경은 흉악무도한 사람이니, 그와 그의 일족을 체포하여 모두 정위로 보내라.

  8일, 태부 사마부, 대장군 사마문왕, 태위 고유, 사도 정충 등이 머리를 조아려 상주하였다.

  ----- 신 등은 황태후의 칙령을 받았습니다. 고인이 된 고귀향공은 악역무도하고 스스로 커다란 재화 속에 빠졌는데, 한 창읍왕(昌邑王)이 죄를 지어 쫓겨난 선례에 따라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했습니다. 신 등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난을 구하여 혼란을 바로잡지도, 사악한 반란을 제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칙령을 받고 두려워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춘추(春秋)》의 대의에 의하면, 왕노릇하는 자에게는 천하가 짐입니다. 그러나 ‘주나라 양왕은 정나라에서 거주하였다 --- 《춘추(春秋)》 희공(喜公) 24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의 자격을 버린 것입니다. 지금 고귀향공은 충동적으로 행동하여 인륜을 져버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했으며, 스스로 멸망하여 사람과 신을 모두 버렸습니다.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하는 것은 확실히 옛날 제도와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 등은 황태후 전하의 자애로움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마음속에 대의가 있지만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는 정이 있으니, 신들도 마음속으로는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해 고귀향공을 왕의 예의로써 안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태후는 이 의견을 따랐다.

  곽태후는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중호군(中護軍)․중뢰장군(中  將軍) 사마염(司馬炎)을 북쪽으로 보내 상도향공(常道鄕公) 조황(曹璜)을 명제의 후계자로 맞이하도록 했다. 9일, 여러 공이 황태후에게 상주했다.

  ----- 전하(황태후)의 성덕은 빛나고 성대하여 천하를 안정시켰으므로, 조서를 내려 번국과 똑같이 ‘령(令)’으로 칭하십시오. 청컨대 지금 이후로 전하의 영서(令書)는 모두 ‘조제(詔制)’로 칭하여 선대의 선례와 똑같이 하도록 하십시오.

  21일, 대장군이 상국․진공․구석의 특별한 은총을 완강히 사양하니, 황태후는 조서를 내렸다.

  ----- 공적이 있으면 숨기지 않는 것이 《주역》의 큰 뜻이고, 사람을 완성시키는 아름다움은 옛 현인들이 존중했던 것이다. 지금 대장군의 사양을 듣고 그의 상주문을 조정 안팎에 공표하고, 그의 겸허한 아름다움을 밝히도록 하라.

  26일, 대장군 문왕이 말씀을 올렸다.

  ----- 고귀향공은 시종과 병사들을 이끌고 칼을 뽑고 금고(金鼓)를 울려 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달려왔었습니다. 저는 날카로운 무리끼리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장병들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군법에 따라 처리한다고 했습니다. 기독(騎督) 성쉬(成  )의 동생인 태자사인(太子舍人) 성제(成濟)는 병사들이 진열하고 있는 곳을 뚫고 들어가 고귀향공을 상하게 하여 마침내 생명을 잃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성제를 체포하여 군법에 따라 처리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신하된 자의 충절은 죽어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군주를 섬기는 도의는 감히 위험을 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변고가 갑자기 발생하여, 그 재화는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밀려왔지만, 실제로 저는 고귀향공에게 몸을 버려 죽을 각오로 황제만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본래 위로는 황태후를 위험하게 하고 종묘를 전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치를 보좌하는 무거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안정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데, 비록 명령에 따르다 죽어도(황태후에게 위험을 줄 경우) 그 책임이 더욱 무거울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때문에 이윤과 주공의 비상한 수단으로 사직의 어려움을 안정시키고, 부단히 사람을 보내 명령을 펴려고 했으나 황제가 있는 수레 근처에도 갈 수 없었으며, 그 사이에 성제가 갑자기 진중(陣中)으로 뚫고 들어와 큰 변고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슬프고 애상하여 어느 곳에서 이 생명을 끊어야 될지를 몰랐습니다. 법률에 따르면 임금에게 대역무도한 죄를 지으면 그 부모와 처자를 모두 죽인다고 합니다. 성제는 흉악무도한 반역자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여 주살되는 것을 용서받지 못할 만큼의 죄를 지었습니다. 즉시 시어사에게 명하여 성제 일족을 체포하고 정위로 넘겨 그들의 죄를 판단하도록 하십시오.

  황태후는 조서를 내렸다.

  ----- 다섯 가지 형벌에 해당하는 범죄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사람으로 효도하지 않는 자식이 있으면 고발하여 처벌하도록 하는데, 어찌 그 불효 아들을 군주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녀자로서 대의에 밝지는 못하지만, 성제가 대역무도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대장군의 뜻이 간절하고, 말이 애통하기 때문에 그의 상주를 따르겠다. 이 일을 컬고 가까운 곳에 알려 일의 처음과 끝을 이해시키라.

  6월 1일     조서를 내렸다.

  ----- 고대에는 군왕의 이름과 자를 만들 때, 범하기 어렵고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했다. 지금 상도향공의 휘와 자는 피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조정대신들은 어떻게 바꿀 것인지 상의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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