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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위서(魏書) 후비전(后妃傳) 문소견황후전(文昭甄皇后傳)

작성자역풍|작성시간04.07.08|조회수255 목록 댓글 3
 

삼국지 정사(正史)


위서(魏書)


후비전(后妃傳)


문소견황후전(文昭甄皇后傳)


  문소견황후는 중산군(中山郡) 무극현(無極縣) 사람으로 명제의 어머니이고, 한나라 태보(太保) 견감(甄邯)의 후예이며 집안 대대로 2천 석을 받는 관직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견일(甄逸)은 상채(上蔡)의 현령이었다. 견후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에 천하에 전란이 일어나고, 게다가 기근까지 겹쳤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금․은․구슬․옥 등의 보물을 팔았다. 그 당시 견후의 집에는 저장된 곡식이 많았으므로 보물을 많이 사들였다. 견후의 나이는 열 살 남짓하였는데, 어머니에게 아뢰었다.

  “지금 세상이 혼란스러운데도 보물을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죄가 없는 보통 남자라도 보물을 감춘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굶주리고 식량도 다 떨어져 가니 어머니께서는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곡물을 나누어 주어 널리 은혜를 베푸십시오.”

  모든 집안의 사람들은 옳은 말이라고 하고 곧바로 견후의 건의에 따랐다.

  건안 연간에 원소는 둘째 아들 원희(袁熙)를 위하여 견후를 맞아들였다. 원희가 유주태수로 나가게 되자, 견후는 남아서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기주가 평정될 때, 위나라 문제는 업성에서 견후를 맞아들였다. 견후는 총애를 받았고 명제와 동향공주(東鄕公主)를 길렀다.

  연강(延康) 원년(220) 정월에 문제(조비)가 왕위에 즉위했다.

  6월, 남쪽 정벌에 나섰으나, 견후는 업성에 남았다.

  황초 원년 10월에 조비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제위에 오른 후, 산양공(山陽公;후한의 헌제)은 두 딸을 위제(魏帝)에게 주어 빈비가 되게 했으며, 곽후(郭后)․이귀인(李貴人)․음귀인(陰貴人) 등도 모두 총애를 받았다. 견후는 갈수록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도 하였다.

  2년(221) 6월에 문제가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 견후가 스스로 죽도록 하였으며, 죽은 후에 업성에 매장했다.

  명제가 즉위하자, 담당관리가 상주하여 견후에게 시호를 추증하자고 요청하니, 명제는 사공 왕랑에게 모절(旄節)을 갖고 옥책(玉策)을 받들어, 태뢰의 희생으로 견후의 능에 제사지내게 했으며, 별도로 침묘(寢廟;능묘 옆에 설치하여 祭典을 행하는 곳)를 업성에 세웠다.

  태화 원년(227) 3월에 중산군 위창현(魏昌縣)의 안성향(安城鄕)에 있는 식읍 1천 호를 이용하여 견일을 추증하여 봉하고,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했으며 견일의 맏손자 견상(甄像)에게 조부의 봉작을 잇게 했다.

  4월, 처음으로 선조의 영묘를 세우려고 땅을 파다가 옥새를 얻었는데, 사방이 1촌 9분이었고, 그 위의 인문(印文)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천자는 자애로운 모친을 숭앙하고 그리워한다.’

  명제는 이 글씨 때문에 얼굴을 고치고 태뢰의 제의로써 종묘에 제사지냈다. 또 명제는 꿈속에서 견후를 본 후에 외가들의 친하고 소원하고 높고 낮음에 따라 차이와 등급을 주었으며, 각기 차별을 두어 임용했고 막대한 하사품을 주었으며 견상을 호분중랑장에 임명했다. 이 달, 견후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명제는 시복(緦服)5)을 만들어서 상례(喪禮)에 직접 참여했고, 모든 관료들도 배석했다.

  태화 4년(230) 11월, 견후의 옛날 능은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작게 건축되었으므로, 견상을 보내 태위를 겸임하여 부절을 갖고 업성에 가서 토지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12월에 견후를 조양릉(朝陽陵)에 다시 묻었다. 견상은 귀환하여 산기상시로 승진하였다.

  청룡 2년(234) 봄에 견후의 오라버니 견엄(甄儼)에게 안성향목후(安城鄕穆侯)의 시호를 추증했다. 여름에 오나라 군대가 양주에 침입해 오자, 견상을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하고 절을 주어서 여러 장수를 감독하고 동방 정벌에 나서게 하였으며, 돌아온 이후에 견상을 다시 사성교위(射聲校尉)로 삼았다.

  3년(235)에 견상이 세상을 떠나자, 위(衛)장군의 직위를 추증하고 봉지를 위창현(魏昌縣)으로 바꾸었고,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하였으며, 그의 아들 견창(甄暢)으로 후사를 잇게 했다. 아울러 견창 동생인 온(溫)․위(  )․염(豔)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4년(236), 견일과 견엄의 봉작을 바꾸어 위창후(魏昌侯)라고 하고, 시호는 옛날의 명칭을 답습했다. 견엄의 부인 유씨에게 동향군의 직위를 주었고, 또 다시 견일의 부인 장씨에게 안희군(安喜君)의 작위를 추증했다.

  경초 원년(237) 여름에 담당관리가 칠묘(七廟)6)의 제도를 의논하여 정했다. 겨울에 또 상주를 올렸다.

  ----- 대체로 제왕이 흥기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명을 받은 군주가 있어야 하고, 신령의 도움을 받는 성비(聖妃)가 있어야 하며, 그런 연후에 그의 세상을 흥성하게 이끌어 왕업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옛날 고신씨(高辛氏;제고)는 4명의 비가 낳은 아들의 운세를 점쳐보니 모두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손 제지(帝摯)․도당(陶唐)․상게(商契)․주기(周棄)가 대대로 흥성했습니다. 주나라 사람들은 위로는 시조 후직(后稷)을 공손히 받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는데, 왕의 탄생 초기까지 거슬러올라가 보면, 강원(姜嫄)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특별히 그녀를 위해 영묘를 세우고, 대대로 공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례(周禮)》〈대사락(大司樂)〉에서, ‘이칙(夷則)을 연주하고, 중려(中呂)를 노래하며,7) 대호(大濩)8)를 춤추어 죽은 어머니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시경》〈대아(大雅)〉․〈생민(生民)〉의 시인들은 그녀를 기리기를, ‘주의 시조를 낳은 것은 오직 강원이구나’라고 하여 왕노릇 하는 자에 대해 교화의 근본과 주왕조 시조가 이 여자로부터 태어났음을 설명했습니다. 《시경》〈노송(魯頌)〉․〈민궁〉에서 또 ‘닫혀 있는 강원의 영묘(靈廟)는 청정하고, 한 알 또 한 알, 한 가지 또 한 가지, 빛나는 강원이여, 그 덕은 바르구나’라고 했습니다. 《시경》이나 《주례》에서 찬미하는 희씨 성조의 성덕은 이처럼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위대하 위나라의 길운은 유우(有虞;舜)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와으이 도를 존중하고 넓혀, 하․상․주 3대에는 더욱 융성했습니다. 그 선조의 영묘는 사실 주왕조와 똑같습니다. 오늘 무선황후(武宣皇后)와 문덕황후(文德皇后)는 각자 무제․문제를 제사지내며 영원한 지위를 얻었습니다. 문소견황후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내려준 상서로움을 누리며, 영명한 폐하를 낳아 기르고, 백성들을 구하는 공업을 세웠으며, 덕은 세상에 가득하여 이 자손들이 왕실을 이을 수 있는 기초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왕조의 교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영묘를 세워 특별히 제사를 지내는 것도 강원(姜嫄)의 영묘와 똑같은 취지입니다.9) 그러나 강원의 경우와는 달리 묘를 훼손시키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없어 빛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공적을 평하고 덕을 보고하는 옛날의 가르침이 후세에 잊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효심을 분명히 하여 후세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소황후의 영묘는 대대로 공물을 바쳐 제사지내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조의 묘와 똑같이 예우하여 훼손되지 않는 법전으로 영원히 빛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명제는 칠묘 건립에 관한 상주문을 모두 금책(金策)에 새겨 금속 상자에 보관하도록 했다.

  명제는 외가(外家)의 일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경초 말년, 견창은 아직 어렸지만, 사성교위로 삼고 산기상시의 자리를 주었으며, 또한 대저택을 특별히 지어주고, 제왕이 수레를 타고 직접 찾았다. 또 그 집의 뒷뜰에 견상의 어머니를 위해서 묘를 지었고, 그 지역을 위양리(渭陽里)10)라고 이름하여 외가를 추모했다.

  가평 3년(251), 정월 제왕 조방(曹芳) 시대이다. 견창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거기장군의 직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공후(恭侯)라고 했다. 아들 견소(甄紹)가 부친의 작위를 이었다.

  태화 6년(232), 명제의 사랑하는 딸 조숙(曹淑)이 요절하였는데, 명제는 그의 시호를 평원의공주(平原懿公主)라 하고, 그녀를 위해 묘를 세웠다. 견후는 이미 죽은 종손(從孫) 견황(甄黃)의 관을 꺼내 공주와 합장시키고〔冥婚〕, 견황을 열후로 추증, 봉했으며, 부인 곽씨(郭氏)의 사촌동생 곽덕(郭悳)을 그 후계자로 하여 견씨의 성을 잇도록 하고 평원후(平原侯)로 책봉해 평원의공주의 작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청룡 연간에 명제는 또 견후의 사촌형 아들인 견의(甄毅)와 견사의 동생 3명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견안은 자주 상소하여 그 시대의 정치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였고, 관직은 월기교위까지 올랐다.

  가평 연간에 명제는 또 견창의 아들 2명을 열후로 삼았다. 견후의 형 견엄의 손녀를 제왕 방의 황후로 삼았는데, 그녀의 부친은 이미 죽었으므로, 모친에게 광락향군(廣樂鄕君)이라는 자리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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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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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황월영 | 작성시간 04.07.08 저기 오타. RJ내 -> 꺼내가 맞지 않을까요?
  • 작성자오자서 | 작성시간 04.07.08 불쌍한 견희```` 역시 난 조비가 싫다. 정말 싫어... 삼국지 게임할 때 조비 포로로 잡으면 대부분 사형시킨다는,... 오늘도 조비를 죽였지ㅋㅋㅋ
  • 작성자역풍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7.08 쓰다보면 오타 발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한번 다 읽어보시고 오타 다 집어주세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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