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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원소전(袁紹傳)

작성자역풍|작성시간04.07.09|조회수338 목록 댓글 1
 

삼국지 정사(正史)


위서(魏書)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원소전(袁紹傳)


  원소는 자가 본초(本初)이고,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그의 고조부 원안(袁安)은 한나라 조정의 사도를 지냈다. 원안 이후 사대가 모두 삼공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원씨 집안의 세력은 전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었다. 원소는 풍모가 빼어나고 위엄스런 용모가 있었으며, 지위가 낮은 선비들에게도 허리를 굽혀 존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선비들이 그에게로 귀의했다. 조조는 젊었을 때 그와 교제를 했다. 조조는 대장군 하진과의 인연으로 시어사가 되었으며, 점점 중군교위로 승진하고, 사예교위에 이르렀다.

  한나라 영제가 붕어한 후, 태후의 오라버니며 대장군이었던 하진은 원소와 함께 환관을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태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탁을 불러서 태후에게 압력을 가했다. 중상시와 황문시랑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하진을 찾아가 사죄했으며, 오직 하진이 조처하는 대로 따랐다. 이때 원소는 하진에게 이 기회를 시작으로 하여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재삼 진언했지만, 하진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진은 원소에게 낙양 안의 무관들을 시켜 환관들을 감시하도록 했다. 또 원소의 동생 호분중랑장 원술로 하여금 부하 근위병 중에서 온후한 성격을 가진 2백 명을 선발하여 곧 황궁으로 들어와 무기를 들고 환관과 교체시켜 궁중 문을 경호했다.

  중상시 단규 등은 태후의 명을 빌려 하진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궁중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하진을 살해하니, 궁중은 혼란스런 상태가 되었다. 원술은 근위병을 인솔하여 남궁(南宮) 가덕전(嘉德殿)과 청쇄문(靑瑣門)을 불지르고, 단규 등을 핍박하여 축출하려고 했는데, 단규 등은 떠나지 않고 황제와 황제의 동생 진류왕을 위협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도주하였다.

  원소는 환관을 참수하였고 사예교위 허상(許相)을 죽이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모든 환관들을 붙잡아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죽였다. 어떤 이는 환관이 아니고 본래 수염이 없는데 잘못 죽임을 당하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은 스스로 몸을 완전히 노출시켜 검사를 받은 후에야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15) 환관 중에는 품행이 바르고 자기 분수를 지킨 자도 있었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으니, 함부로 죽이는 행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원소가 급히 단규 등을 추격하자, 단규 등은 모두 황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결국 황제는 궁전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원소를 불러 황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세워 황제로 삼으려는 것을 상의하려고 했다. 이때 원소의 숙부 원외(袁隗)가 황제의 태부였으므로, 원소는 동탁에게 거짓으로 응답했다.

  “이 문제는 큰 일이니, 제가 돌아가서 태부와 상의하겠습니다.”

  동탁이 말했다.

  “유씨의 씨를 더 이상 남길 수는 없소.”

  원소는 대답하지 않고, 긴 칼을 옆으로 비껴 예의를 갖추고 갔다. 원소는 돌아온 후, 곧바로 기주로 도망갔다. 시중 주밀, 성문교위 오경, 의랑 하옹 등은 모두 망명있는 사람으로 동탁에게 신뢰를 받았지만, 은밀하게 원소를 도왔는데, 동탁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황제를 내쫓는 큰 일은 평범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원소는 대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 달아난 것이지, 결코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상금을 걸어 급히 붙잡으려 하면 반드시 병력에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원씨 일가는 4대에 걸쳐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그 식객들과 부하 관리들이 천하에 퍼져 있습니다. 만일 호걸을 규합하여 무리들을 모으고, 영웅들이 이것을 기회로 하여 일어선다면, 효산(崤山)의 동쪽은 공의 손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를 사면하고 어떤 군의 태수로 임명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면 원소는 죄를 용서받아 기뻐할 것이니 걱정이 없게 됩니다.”

  동탁은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하고 항향후(邟鄕侯)로 봉했다.

  원소는 결국 발해군에서 군대를 일으켜 동탁을 정벌하려고 했다. 이 일은 《무제기》에 기록되어 있다.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불러 맹주가 되었으며 기주목 한복과 더불어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삼으려고 사자를 보내 인장을 주었지만, 유우는 받지 않았다. 후에 한복은 안평(安平)에 주둔했는데, 공손찬에게 무너졌다. 공손찬은 군대를 인솔하여 기주로 들어왔다.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은 한복을 습격하려는 것이었다. 한복은 마음속으로 불안했다. 마침 동탁이 서쪽에서 함곡관으로 들어갔으므로, 원소는 군사를 돌려 연진(延津)에 주둔했다. 그는 불안해하는 한복의 마음을 움직여 진류 사람 고간(高干), 영천 사람 순심(荀諶) 등을 한복에게 보내 설득조로 말했다.

  “공손찬은 승리하여 남쪽으로 가고 있고, 여러 군도 그를 호응하고 있습니다. 원소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는데,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의도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군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복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소?”

  순심이 대답했다.

  “공손찬은 연(燕)․대(岱) 두 군의 군대를 인솔하고 있으므로 그의 예봉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원소는 일대의 호걸이니, 반드시 장군의 밑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주는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만일 공손찬과 원소의 두 영웅이 힘을 합쳐 성 아래에서 싸운다면, 기주의 위험과 망함은 경각에 달려 있게 됩니다. 원소는 장군과 옛날에 사귄 적이 있고 함께 맹약도 맺었습니다. 지금 장군을 위해 생각해 보면 모든 기주를 원소에게 주는 것만 못합니다. 원소가 기주를 손에 넣으면, 공손찬은 그와 싸울 수 없을 것이고, 원소는 틀림없이 장군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기주가 친교있는 사람(원소)에게 옮겨지면 장군은 현명한 인물에게 나라를 양도했다는 명성을 들을 것이고, 장군의 입장은 태산보다 더 편안할 것입니다. 모쪼록 장군께서는 이 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한복은 본래 담력이 작았으므로 그의 계책에 동의를 표했으나, 한복의 장사(長史) 경무(耿武), 별가 민순(閔純), 치중(治中) 이력(李歷)이 한복에게 권고했다.

  “기주는 비록 치우쳐 있지만, 군대가 백만이고 10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습니다. 원소는 고립되어 원조가 없다면 군세는 곤궁한 상태가 되어 우리들의 원조에 기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의 손에서 우유를 빼앗는 것과 같아 즉시 굶주려 죽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기주를 그에게 주려 합십니까?”

  한복이 말했다.

  “나는 원씨(원소)의 옛날 부하이고 재능도 그만 못하오. 덕망있는 자를 뽑아 내세워 양도하는 것은 옛 사람들이 받들었던 것이오.16) 여러분들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이오?”

  종사 조부(趙浮)와 정환(程奐)이 병사를 출동하여 저항하기를 원했지만, 한복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곧바로 원소에게 기주를 넘겨주니, 원소는 드디어 기주목이 되었다.

  종사 저수(沮授)가 원소에게 진언했다.

  “장군은 약관의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천하에 명성을 떨쳤고, 황제를 폐위하고 옹립할 때, 충의로운 마음으로 병사들을 일으켰으며, 단독으로 달려나가 동탁을 두렵게 했고,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진군하여 발해군이 머리를 조아려 복종하도록 했습니다. 발해 한 군의 군대를 발동시켜 기주의 대군을 모았으므로, 그 위세는 하삭(河朔)을 진동시키고, 명망은 천하를 덮고 있습니다. 황건 무리들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흑산의 도적이 날뛰어도 군대를 인솔하여 동쪽으로 향해 나아간다면, 그 본거지인 청주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고, 군사를 돌려 흑산을 토벌하면 장연(張燕;우두머리)을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대를 인솔하여 북방으로 가면, 공손찬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고, 만족을 위협하면 흉노는 틀림없이 복종할 것입니다. 황하 북쪽에 있는 네 주(기․청․유․병)를 병합하여 영웅의 자질을 가진 인물들을 받아들이고, 백만 군사를 갖고서 장안에서 ‘황제를 공손히 맞이하고, 낙양에서 유씨 종묘를 회복시키고, 천하에 호령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하고, 이 세력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과 싸우면 누가 뛰어넘을 수 있겠습니까? 몇 년 후에는 큰 공을 세우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원소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이 점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오.”

  원소는 즉시 저수를 감군(監軍)․분위(奮威)장군으로 임명했다.17)

  동탁은 집금오 호무반(胡毋班)과 장작대장(將作大匠) 오수(吳修)에게 조서를 갖고 원소를 설득하도록 했지만, 원소는 하내태수 왕광을 보내 그들을 죽였다.18) 동탁은 원소가 관동지역을 수중에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소와 동족인 태부 원외 등을 죽였다. 이때 영웅호걸 대다수가 원소에게 귀의했으며, 모두들 그를 위해 동탁에게 복수하려고 생각하였으므로 각 주나 군에서 봉기하였는데, 모두들 원외 때문에 복수한다는 명분을 거병(擧兵)의 이유로 삼았다. 한복은 두려워하며 원소에게 떠날 것을 청하고19) 장막에게 몸을 의탁했다. 후에 원소는 사자를 보내 장막을 만나게 했고, 사자는 상의할 일이 있어 장막과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한복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자신에 대한 처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곧 자리에 일어나 측간으로 가서 자살했다.

  처음, 천자(헌제)를 즉위하게 한 것은 원소의 본의가 아니었다. 천자가 하동에 있을 때, 원소는 영천의 곽도(郭圖)를 사자로 파견하였다. 곽도는 돌아와 원소에게 천자를 맞아 업현에 수도를 세우라고 권하였으나, 원소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침 조조가 천자를 맞아 허창에 수도를 세우고 황하 이북 지역을 수복하니, 관중이 모두 조조에게 돌아왔다. 원소는 매우 후회하고 천자를 견성(鄄城)으로 옮기고 수도로 삼자고 요구하여 자기가 가까이 접근해 있기를 원했지만, 조조는 이를 거절했다. 천자는 원소를 태위로 임명하고, 또 대장군으로 승진시켜 업후(鄴侯)로 봉했으나,20) 원소는 업후의 작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역경(易京)에서 공손찬을 격파하고, 공손찬의 군대와 말을 합병하고는 맏아들 원담을 보내 청주를 관리하도록 하였다.21) 저수가 원소에게 간언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화(禍)의 시작입니다.”

  원소는 듣지 않고 말했다.

  “나는 여러 아들에게 각기 한 주씩 다스리게 할 생각이오.”

  또 다시 둘째 아들 원희(袁熙)를 보내서 유주를 관할하도록 하고, 외조카 고간에게 병주를 다스리게 했다.22) 또 그는 수십만 명의 군사를 모아 전풍․순심․허유를 참모로 하고 안량과 문추를 장수로 임명하여 통솔하게 했으며, 정예부대 10만 명을 선발하고, 기병 1만 기를 뽑아 허창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이보다 앞서, 조조는 유비를 서주로 파견하여 원술을 막도록 했다. 원술이 죽은 후,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패(沛) 땅에 주둔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그를 도왔다. 조조는 유대․왕충(王忠)을 보내 그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건안 5년(200)에 조조는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토벌했다. 전풍이 원소에게 조조의 배후를 몰래 습격하도록 권했는데,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하여 거절했다. 전풍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두드리며 말했다.

  “얻기 어려운 기회를 만났건만 어린 아이의 병 때문에 기회를 잃으니 애석하구나.”

  조조가 도착한 후 유비를 격파하자, 유비는 원소에게로 도망갔다.

  원소는 군대를 여양으로 나가게 했고, 안량을 보내 백마(白馬)에 있는 유연을 공격했다. 저수는 또 원소에게 간했다.

  “안량은 성격이 급하고 도량이 좁습니다. 비록 용맹하지만 그 혼자서 중임을 담당할 수는 없습니다.”

  원소는 저수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조조는 유연을 구하기 위해 안량과 싸워 그를 격파시키고 안량을 죽였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연진 남쪽에 주둔하고 유비와 문추를 보내 도전했다. 조조는 그들을 물리쳐 문추를 죽이고, 다시 싸움을 걸어 원소의 대장을 사로잡았다. 원소의 군대는 크게 흔들렸다. 조조는 관도로 돌아가고, 저수가 또 원소에게 말했다.

  “북방 군대는 숫적으로는 많지만 용맹함은 남쪽 군대에 비교되지 못하고, 남쪽 군대는 양식은 많지 않지만 재물은 북쪽에 비교되지 않으며, 남쪽 군대는 빠른 싸움에 적합하고, 북쪽 군대는 오랜 싸움에 알맞습니다. 응당 지구전을 하여 시간을 길게 하십시오.”

  원소는 듣지 않았다. 진영을 모아 점점 앞으로 나아가 관도에 접근하여 적과 싸웠는데, 조조 군대는 형세가 유리하지 않자 군영 안으로 후퇴했다. 높은 누대를 세우고 흙으로 산을 쌓고 조조의 군영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조조의 군영에서는 움직이기만 해도 화살이 날아들었으므로 모두들 매우 두려워했다. 조조는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원소의 누대를 공격하여 누대를 모두 부쉈는데, 원소의 부하들은 이것을 벽력거(霹靂車)라고 불렀다. 원소는 또 땅 밑으로 길을 파서 조조의 군영을 습격하려고 했다. 조조는 즉시 진영 안에 긴 참호를 파서 그것에 대처하고, 한편으로는 또 기병을 보내어 원소의 수송 수레를 습격하여 무찌르고 식량을 모두 불태워 없앴다. 조조는 원소와 오랜 시간 싸웠으므로, 백성들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피곤에 지쳤으며, 매우 많은 숫자가 모반을 하여 원소에게 호응했고, 식량도 많이 부족했다. 이때 원소는 순우경에게 만여 명의 병사를 주어 북쪽의 수송 수레를 맞이하도록 했다. 저수가 원소에게 말했다.

  “장군 장기(蔣奇)를 별도로 파견하여 밖에서 지원하도록 하여 조조가 약탈할 가능성을 끊어버리십시오.”

  원소는 여전히 듣지 않았다. 순우경은 오소(烏巢)에서 밤을 보냈는데, 원소의 군대로부터 40리 떨어진 곳이다. 조조는 조홍을 남겨 군영을 지키도록 하고 직접 보병․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어두컴컴한 밤을 틈타 잠행하여 순우경을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어 그를 구하려 했지만, 조조에게 패해 달아났다. 조조는 순우경 등을 무찌르고, 그들을 전부 죽였다. 조조가 귀환하는 도중 군영에 도착하기 전에 원소의 장수 고람(高覽)과 장합(張郃)등이 그의 부하를 이끌고 투항했다. 원소의 군대는 혼란에 휩싸였고, 원소와 원담은 홀로 말을 타고 황하를 건넜다. 그의 나머지 군사들은 진심으로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산 채로 매장되었다. 저수는 원소가 황하를 건널 때, 따라가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조조에게 보내졌다. 조조는 그를 후하게 대접했지만, 후에 그는 음모를 꾸며 원소에게로 돌아갈 생각만 했으므로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이전에 원소가 남쪽으로 정벌하러 갈 때, 전풍이 원소에게 진언했다.

  “조조는 군대를 잘 다루어 변화무쌍한 기술을 발휘했습니다. 그이 군사는 비록 적지만 경시할 수 없으니 지구전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군께서는 자연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하여 4주의 무리들을 끌어안고, 밖으로는 영웅들과 손을 잡고, 안으로는 농업과 군사를 정비한 후에 정예부대를 선발해 기습부대를 편성하고, 적의 허약함을 틈타 끊임없이 공격하여 하남을 혼란스럽게 하십시오. 적군이 오른쪽으로 구원하면 그의 왼쪽을 공격하고, 왼쪽을 구원하면 그의 오른쪽을 공격하여 적군을 우왕좌왕하게 하여 피곤하게 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없게 못되어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은 묘당 위에 승리의 계책을 방치해두고 한 번 싸움으로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려고 하니, 만일 원래 마음먹은 대로 승리하지 못하면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원소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전풍이 간곡하게 건의하자, 원소는 심하게 화를 내며 그가 병사들의 사기를 꺾으려 한다고 보고 형틀을 채워 옥에 가두었다. 원소의 군대가 패배한 후, 어떤 사람이 전풍에게 말했다.

  “당신은 반드시 중히 쓰일 것이오.”23)

  전풍이 말했다.

  “만일 군대가 승리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 군대가 패배했으니 나는 죽게 될 것이오.”

  원소가 돌아와서 측근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풍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결국 그에게 조소당할 것이오.”

  원소는 그를 죽였다.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고 아량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질시하고 거리끼는 것이 심했으며,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기주성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었으나, 원소는 출정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

  건안 7년(202), 전쟁에서 패한 이후 중병이 들어서 근심 속에 죽었다.

  원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남 원담과 차남 원상(袁尙)이 그들이다. 원소의 처 유씨는 원상을 총애하여 그의 재능을 자주 칭찬했고, 원소 또한 원상의 빼어난 용모를 추켜세워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공표하지도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성품이 포악하고 모질어서 원소의 애첩 다섯 명도 모두 죽여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어 땅속에서 원소와 만날까 생각하여 머리를 자르고 얼굴에 묵형을 가해 그 사체(死體)를 훼손시키기조차 했다. 원상 역시 죽은 자의 가족을 모두 죽이는 참혹성을 드러냈다. 심배(審配)와 봉기(逢紀)는 신평(辛評)․곽도와 권력을 다투었는데, 심배와 봉기는 원상과 가까웠고, 신평과 곽도는 원담과 가까웠다. 사람들은 원담이 나이가 많았으므로 그를 후계자로 세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심배 등은 원담이 옹립된 후, 신평 등이 자신들의 해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원소의 평소 뜻에 따라 원상을 받들어 원소의 지위를 잇도록 했다. 원담은 청주로부터 이곳에 도착했지만, 후계자의 지위에 옹립될 수 없었으므로 스스로 거기장군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원담과 원상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었다.

  조조는 북쪽으로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러 갔다. 원담은 여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원상은 원담에게 군대를 매우 적게 주었고, 또 봉기를 보내어 원담을 따르도록 했다. 원담은 병사를 더 주기를 청했지만, 심배 등이 모의하여 병사를 더 보내주지 않았다. 원담은 대단히 노하여 봉기를 죽였다.

  조조는 황하를 건너 원담을 공격했고, 원담은 원상에게 급박함을 알렸다. 원상은 군대를 보내 원담을 증원해 주려고 생각했지만, 원담이 그 군대를 빼앗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심배를 보내어 업현을 지키도록 하고, 원상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원담을 원조했는데, 성 아래에서 크게 싸웠지만 원담과 원상은 패하여 물러나 성을 지켰다. 조조가 이곳의 성을 포위하려고 할 때, 그들은 밤에 도망갔다. 조조는 업현까지 추격하여 그의 보리를 거두어들이고, 음안(陰安)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이끌고 허창으로 돌아왔다.

  조조는 남쪽으로 가서 형주를 공격하고 군대는 서평(西平)에 이르게 했다. 원담과 원상은 서로 공격하였지만, 원담이 패하여 평원군(平原郡)으로 달아났다. 원상은 그를 사정없이 공격했고, 원담은 신비를 조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조조가 돌아와 원담을 구하였다.

  10월에 여양으로 돌아왔다. 원상은 조조가 북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원군을 버리고 업현으로 돌아왔다. 그의 장수 여광(呂曠)과 여상(呂翔)은 원상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 원담은 또 은밀하게 장군 인(印)을 새겨 여광과 여상에게 주었다. 조조는 원담의 거짓스런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인척관계를 맺어 안정시킨 후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원상은 심배와 소유(蘇由)에게 업현의 수비를 맡기고 다시 평원군으로 가서 원담을 공격했다. 조조는 군대를 나가게 하여 업현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업현으로부터 50리 떨어진 원수(洹水)에 도달했다. 소유는 안에서 호응하려 했지만, 음모가 탄로나서 심배와 성안에서 싸웠으나 패하고 조조에게로 투항했다.

  조조는 업현을 공격하러 나갔다. 땅 밑에 길을 팠지만, 심배도 안에다 참호를 파서 이에 대항했다. 심배의 대장 풍례(馮禮)가 성 아래의 작은 문을 열어 조조의 병사 3백여 명을 들여보낼 무렵에 심배가 이를 발각하고 성 위에서 큰 돌덩이를 떨어뜨려 통로에 있는 책문을 부수었으므로 책문은 봉쇄되었고, 들어가던 사람은 전부 깔려 죽었다.

  조조는 성을 포위하고 참호를 팠는데, 주위 길이는 40리나 되었으며, 처음에는 얕게 파서 넘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심배는 이것을 보고 조조를 비웃으며, 나아가 이익을 다투지 않았다. 조조는 하룻밤 사이에 또 굴을 팠는데 두 장(丈)이 될 정도로 넓고 깊었으므로, 장수(漳水)를 무너뜨려 그곳에 물을 채웠다.

  5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포위는 계속되었으며, 성안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원상은 업현의 사태가 긴급함을 듣고 군사 만여명을 이끌고 돌아와 구원하려고 서산(西山)에 의지하여 업현으로부터 17리 떨어진 동쪽의 양평정(陽平亭)에 도착해서 부수(滏水)에 임하여 불을 들어 성안에 알렸다. 성안에서도 불을 들어 회답을 했다. 심배는 군대를 성 북쪽으로 나가게 하고, 원상과 호응하여 포위를 뚫으려고 했다. 조조는 이 군대를 맞아 싸웠다. 그는 패하여 성안으로 도망갔고, 원상도 패하고 달아나 곡장(曲漳) 가까이에 군영을 세웠는데, 조조는 그를 포위하였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원상은 두려워하며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투항을 구걸했지만, 조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원상은 돌아와서 남구(濫口)로 달려갔지만, 조조 군사가 전진하여 또 그를 포위했다. 원상의 대장 마연(馬延) 등은 싸움에 앞서 투항하였으므로 군대는 붕괴되었고, 원상은 중산(中山)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그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원상의 인수와 절월(節鉞), 의복, 기물을 손에 넣었으며, 성안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보여주어 성안은 붕괴되었다. 심배의 조카 심영(審榮)이 동문(東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밤에 성문을 열어 조조 군대를 들어오게 하여, 조조의 군사는 심배와 성안에서 접전을 벌여 심배를 사로잡았다. 심배는 목소리와 기백이 장렬하였으며, 마지막까지 허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고간이 병주에서 투항하자, 조조는 또 다시 고간을 자사로 임명했다.

  조조가 업현을 포위했을 때, 원담은 감릉(甘陵)․안평(安平)․발해․하간(河間)을 공략하여 취하고, 중산에 있는 원상을 공격하고 있었다. 원상은 고안(故安)으로 도망가 원희에게 몸을 의탁했고, 원담은 그의 군대를 거둬들였다. 조조가 원담을 토벌하려고 하자, 원담은 평원을 공격하고 남피를 병합했으며, 자신은 용주(龍湊)에 주둔했다.

  12월에 조조가 그 성문 아래에 진영을 두었지만, 원담은 출병하지 않고 밤에 남피로 도망가 청하(淸河) 앞에서 주둔했다.

  10년(205) 정월에 조조는 원담의 주둔지를 공격해 원담과 곽도 등을 죽였다. 원희와 원상은 자신들의 부하 장군 초촉(焦觸)과 장남(張南)에게 습격을 당하여 요서 오환으로 도망갔다. 초촉은 스스로 유자자사라고 부르고 각 군의 태수나 현의 영․장을 인솔하여 달려가 원상을 배반하고 조씨에게로 투항했는데, 병사 수만 명을 포진시키고 백마를 죽여 그 피를 마시며 맹약을 하고 명령했다.

  “명령을 위반하거나 저항하면 참수한다!”

  사람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각기 순서에 따라 피를 마셨다. 별가 한형(韓珩)의 순서가 되었을 때, 그가 말했다.

  “저는 원공 부자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지금 그들은 패망했고 저의 지혜로는 그들을 구할 수 없으며, 저의 용기로는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없으니 의로움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또 북방으로는 조씨(조조)를 마주하고 있으니, 저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형의 말이 떨어지자 안색을 바꾸었다. 초촉이 말했다.

  “큰 일을 하려면 응당 대의가 분명해야 하며, 일이 성공하고 패하는 것을 한 개인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되오. 한형의 뜻을 만족시킬 수 있으려면 임금에게 충성하는 자를 격려해야 하오.”

  고간은 반란을 일으켜 상당태수를 잡고, 군사들을 출동시켜 호구관(壺口關)을 지키도록 했다. 조조는 악진과 이전을 파견하여 이들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11년(206)에 조조는 고간을 정벌하러 떠났다. 고간은 자신의 부하 장수 하소(夏昭)와 등승(鄧升)을 남겨 성을 지키도록 하고, 자기는 흉노의 선우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갔으나 구원병을 얻지 못하고, 기병 몇 명과 함께 도망가 남쪽의 형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상락(上洛) 도위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24)

  12년(207)에 조조는 요서에 이르러 오환을 공격했다. 원상과 원희는 오환과 함께 조조의 군사를 맞아 싸웠지만, 패하여 요동으로 도망갔는데, 공손강이 그들을 토벌해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조조가 있는 곳으로 보내왔다. 조조는 한형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고 몇 번에 걸쳐 초빙했지만, 모두 사양하고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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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자서 | 작성시간 04.07.09 헉~ 제가 손책전 올리나나서 보니 바로 원소전과 원술전이 올라와 있군요.^^;; 순간 놀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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