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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삼국지 정사 - <오서> 손책전

작성자오자서|작성시간04.07.09|조회수1,020 목록 댓글 1
손책은 자가 백부(伯符)이다.

손견이 의병을 처음 일으켰을 때,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현으로 이주했다. 그가 주유(周瑜)와 서로 우정을 맺고 사대부들을 규합하자, 장강과 회수 사이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향했다. 손책은 손견이 죽은 후, 유해를 갖고 돌아와 곡아에 안장했다. 장례가 끝나자 곧 장강을 건너 강도에 거주했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손책을 매우 꺼려했다. 손책의 외숙 오경이 당시 단양의 태수로 있었으므로, 손책은 곧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 곡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여범, 손하와 함께 오경에게 의지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수백명의 병사를 모집했다.
흥평 원년(194), 그는 원술을 따랐다. 원술은 그를 특별히 중시하여 손견의 부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태부 마일제는 부절을 갖고서 관동을 위로하고, 수춘에서 예의로서 손책을 초빙하고 표를 올려 회의교위로 임명했다. 원술의 대장 교유와 장훈은 모두 마음을 기울여 손책을 존경했다. 원술은 항상 감탄하며 말했다.
"만일 내 자식이 손랑(孫郞)과 같다면 죽어도 또 어떤 한이 있을까!"
손책의 기병이 죄를 짓고 원술의 진영 속으로 달아나 마구간에 숨었다. 손책은 사람을 시켜 쫓아가서 그를 죽이도록 했다. 그는 일을 끝낸 후 원술을 찾아가 사죄했다. 원술이 말했다.
"병사들은 반란을 좋아합니다. 우리들은 당연히 함께 그들을 증오해야만 하거늘. 무엇 때문에 사죄합니까?"
이로부터 군 안에서는 점점 더 손책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원술은 처음에는 손책과 약속하여 구강(九江)태수로 임명하였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단양의 진기로 바꾸었다. 이후에 원술은 서주를 공격하려고 여강태수 육강에게 쌀 3만섬을 요구했다. 육강이 주지 않았으므로 원술은 매우 노여워했다. 손책이 이전에 육강을 방문했었지만, 육강은 만나주지도 않고 주부로 하여금 그를 접대하도록 했다. 손책은 항상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원술은 손책을 파견하여 육강을 공격하도록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진기를 임용했지만, 항상 원래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함을 한스러워 했습니다. 지금 만일 육강을 잡는다면, 여강은 진정으로 그대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손책은 육강을 공격하여 제거했지만, 원술이 또 그의 옛날 관리였던 유훈을 그곳의 태수로 임명했으므로 손책은 더욱더 실망했다. 이 이전에 유요(劉繇)가 양주자사로 임명되었는데, 양주의 옛날 관소는 수춘에 있었다. 수춘은 원술이 이미 점거하고 있는 곳이었으므로, 유요는 곧 장강을 건너 곡아를 관소로 삼았다. 당시 오경은 여전히 단양에 있었으며, 손책의 사촌형 손분 또한 단양도위로 있었는데, 유요가 무력으로 이들을 모두 쫓아냈다. 오경과 손분은 물러나 역양에서 살았다. 유요는 번능과 우미를 파견하여 동쪽의 횡강진에 주둔하도록 하고 장영은 당리구에 주둔시켜 원술에게 항거하도록 했다.
원술은 자신이 옛날에 썼던 관리, 낭야의 혜구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오경을 독군중랑장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들을 인솔하여 장영 등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무찌르지 못했다. 손책은 곧 원술을 설득시켜 오경 등을 도와 강동을 평정시키기를 요구했다. 원술은 표를 올려 손책을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임명했고, 진구장군을 대신하게 했다. 병사는 천여 명이 되었고, 말은 수십필이 되었으며, 빈객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수백명이었다. 역양에 도착한 후에는 병사의 수가 5, 6천명이나 되었다.
손책은 어머니를 먼저 곡아에서 역양으로 옮겼으며, 다시 부릉으로 옮기고 장강을 건너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가는 곳마다 모두 무찔렀는데 감히 그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그리고 군령이 정돈되고 엄숙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상당히 받들었다.
손책의 사람됨은 용모가 수려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성격은 활달하고 다른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사람을 기용하는데 탁월했다. 때문에 사인과 백성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기꺼이 그를 위해서 죽었다.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수들도 모두 성곽을 버리고 달아났다. 오나라 사람 엄백호 등은 각기 무리 만여 명씩을 모아 도처에 주둔했다. 오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격파하려고 즉시 회계에 도착했다. 손책이 이렇게 말했다.
"엄백호 등 일군의 강도들은 큰 뜻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절강(浙江)을 건너 회계와 동야를 함락시키고 곧 엄백호 등을 공격해 격파시켰다. 손책은 이 일대의 지방 관원을 교체시키고, 손책 자신은 회계태수를 겸임했으며, 또 오경을 단양태수로 삼고,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았다. 예장을 나누어 여릉군으로 삼구 손분의 동생 손보를 여릉태수로 임명했으며, 단양의 주치(朱治)를 오군태수로 임명했다. 팽성의 장소(張昭), 광릉의 장굉(張紘), 진송, 진단 등은 손책의 주요한 참모가 됐다. 이때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였으므로, 손책은 편지를 써서 질책하고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책을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하고 오후(吳候)로 봉했다. 그후 원술이 죽자, 장사 양홍과 대장 장훈 등은 그들의 부하를 이끌고 손책에게 나아가려고 했는데, 여강태수 유훈이 공격하여 전부 포로로 잡고 그들의 진귀한 보물을 탈취해 돌아갔다. 손책은 이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유훈과 좋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유훈이 막 원술의 무리를 얻었고, 당시 예장의 상료가 종교가 같은 백성 1만여명과 강동에 있었으므로 손책은 유훈에게 그들을 공격하여 취하도록 권했다. 유훈이 출발한 후, 손책은 날랜 부대를 파견하여 밤낮으로 습격하여 여강을 점령하도록 했다. 유훈의 무리들은 전부 항복했고, 유훈은 수하의 부하 수백명과 조조에게 귀순했다. 이때 원소가 막 강성해졌으므로, 손책이 강동을 병합했지만, 조조의 역량은 뜻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잠시 손책을 위로하기 위해 조조는 동생의 딸을 손책의 작은 동생 손광(孫匡)에게 시집보내고, 또 아들 조장(=조창)을 위해 손분의 딸을 시집오게 하고, 손책의 동생 손권과 손익을 모두 예로써 초빙하였으며, 또 양주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로 추천했다.
건안 5년(200),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게 교전할 때, 손책은 은밀히 허도를 습격하여 한헌제(漢獻帝)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는 비밀리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장수들에게도 임무를 분담시켰다. 그런데 그는 출발하기도 전에 옛날 오군태수였던 허공(許貢)의 문객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보다 앞서 손책이 허공을 죽였고, 허공의 작은 아들과 문객이 장강가로 달아나 숨었었다. 손책은 혼자 말을 달려 나가 결국 허공의 문객과 마주쳤는데, 그 문객이 손책을 공격하여 상해를 입혔던 것이다. 손책의 상처는 매우 심했다. 그는 장소들을 오도록 청하고는 말했다.
"중원지역은 지금 혼란에 빠져 있어 오와 월의 무리와 삼강(三江)의 견고함에 의지한다면,충분히 성패(成敗)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여러분들은 나의 동생을 잘 도와주십시오!"
손권을 불러 인수를 차도록 하고, 이렇게 말했다.
"강동의 병력을 이끌어 양쪽의 군대가 대치하는 사이에 기회를 보아 결단을 내려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며 충돌하는 것에 관한한 그대는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역있는 자를 임용하며, 그들 각각의 마음을 다하도록 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그대만 못하다."
밤이 되자 죽었는데, 그 당시 26세였다.
손권은 제(帝)를 칭한 후, 손책에게 장사환왕(長沙桓王)의 시호를 추증했고, 아들 손소를 오후로 봉했다가 나중에 상우후(上虞候)라고 고쳐 봉했다. 손소가 죽자, 아들 손봉이 뒤를 이었다. 손호(孫皓)시대에 손봉이 응당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뜬소문이 있었으므로 손봉은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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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자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7.09 제가 빨강색으로 제목을 정하는 것은 삼국지 오락할 때 보면 오나라는 항상 빨강색이잖아요^^ 그래서 <오서>도 빨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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