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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삼국지 정사 - <오서> 여몽전

작성자오자서|작성시간04.07.20|조회수778 목록 댓글 0
여몽전(呂蒙傳)

여몽은 자가 자명(子明)이고 여남군 부파(富波) 사람이다. 어렸을 때, 남쪽으로 건너와 매부 등당(鄧當)에게 의지했다. 등당은 손책의 부장으로 산월을 여러 차례 토벌했다. 여몽은 15, 6세 때, 몰래 등당을 따라서 적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등당이 고개를 돌려 둘러보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질타했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돌아온 후, 여몽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여몽의 어머니가 화를 내며 벌을 주려고 하자,여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난과 미천은 참아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잘못을 벗어버리고 공로가 있다면, 부귀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자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머니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벌주지 않았다. 당시 등당을 따르는 관리들은 여몽의 나이가 어리다고 경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호랑이에게 고기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날, 관리들은 여몽과 만났을 때 또 치욕을 주었다. 여몽은 매우 화가 났으며 칼을 가져와 관리를 죽이고 달아나서 같은 마을 사람 정장 (鄭長)의 집에 숨었다. 후에 교위 원웅(猿雄)을 통해 나와서 자수했는데, 원웅이 중간에서 그를 위해 말을 해주었다. 손책은 그를 불러 만나보고는 기이한 인물로 평가하고 자신의 곁에 두었다.

몇 해가 지나 등당이 죽었다. 장소는 여몽을 추천하여 등당을 대신하도록 하고, 별부사마를 제수했다. 손권이 정권을 잡았을 때, 군소 부장들중에 인솔하는 병사가 적거나 쓰임이 작은 자들의 군대를 병합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여몽은 비밀리에 돈을 빌려 병사들을 위해 붉은 옷과 행전을 지급했다. 병사를 검열하는 날이 되자, 정렬한 그의 군대는 빛났으며, 병사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손권은 이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그의 병력을 늘려주었다. 그는 단양 토벌에 참가하여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그래서 평북도위로 제수되었고, 광덕현(廣德縣)의 장이 되었다.

그는 황조 토벌에 참가했다. 황조는 도독 진취(陳就)로 하여금 반격하도록 하여 수군을 인솔해 출전했다. 여몽은 선봉대를 통솔하여 직접 진취의 목을 베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승기를 타고 진격하여 황조의 성을 공격했다. 황조는 진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병사들이 추격하여 체포했다. 손권이 말했다.

"이번 전쟁의 승리는 먼저 진취를 사로잡는 데서 비롯되었다."

여몽을 횡야중랑장(橫野中郞將)으로 임명하고 1천만 전을 하사했다.

이 해, 그는 또 주유, 정보등과 서쪽으로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격파시키고 남군에서 조인을 포위했다. 익주의 장수 습숙(襲肅)이 군대를들어 투항해 왔고, 주유는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들로 여몽의 병력을 증가시키도록 했다.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고 재능이 있다고 극력 칭찬하고, 아울러 교화를 음모하여 먼 곳에서 왔으므로 도의상 마땅히 그의 병력을 증가시켜야지 그의 병력을 빼앗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손권은 여몽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습숙의 군사를 돌려주었다. 주유는 감영으로 하여금 먼저 이릉을 점거하도록 했다. 조인이 병사를 나누어 감영을 공격했고, 감영은 곤란에 처해 위험하게 되었으므로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장수들은 병력이 적어 분산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몽이 주유와 정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능공적(凌公績)을 남기고, 나와 당신들이 가서 포위를 풀어 위급함을 구해주는 데는 시간 또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능공적이 열흘은 지킬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주유에게 3백 명을 나누어 파견해 땔나무로 험한 길을 끊게 한다면 적이 달아날 때 그들의 말을 얻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주유는 그의 의견에 따랐다. 군대가 이릉에 도착한 당일에 싸워서 적군의 과반수를 죽였다. 적군은 밤을 틈타 달아나다가 땔나무로 막아놓은 길을 만나게 되었다. 기병들은 모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다. 대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죽였으며, 말 3백필을 얻어 배에 싣고 돌아왔다. 그래서 장수와 병사들의 형세는 자연스럽게 배가되었고, 곧 장강을 건너 군영을 세웠다. 적군을 향해 공격을 가하자, 조인은 물러나 달아났다. 결국 오나라는 남군을 점거하고 형주를 평정시켰다. 돌아온 후, 편장군에 제수되었고, 심양현(尋陽縣)의 령이 되었다.

노숙은 주유를 대신하여 육구로 가는 길에 여몽의 군영 밖을 지나게 되었다. 노숙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여몽을 경시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노숙을 설득시키며 말했다.

"여장군의 공명은 나날이 빛나고 있으니 마음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노숙은 여몽에게로 가서 만났다. 술이 잔뜩 취했을 때, 여몽이 노숙에게 물었다.

"당신은 중임을 받아 관우와 이웃하게 있는데, 어떤 계략으로 예기치 않은 상황에 방비하고 있습니까?"

노숙은 창졸간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때에 임하여 적당한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여몽이 말했다.

"지금 동쪽(오)과 서쪽(촉)은 비록 한 집안이지만, 관우는 사실 곰이나 호랑이 같은 사람입니다. 계획에 있어서 어찌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노숙을 위해 다섯가지 방법을 그렸다. 노숙은 이때에 자리를 넘어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여자명(呂子明), 나는 그대의 재략이 이 수준까지 미쳤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여몽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여몽과 교분을 맺고는 헤어졌다. 당시 여몽은 성당(成當). 송정(宋定). 서고(徐顧)의 진영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세 장수가 죽고 자제들은 유약했으므로 손권이 그들의 군대를 모두 여몽에게 주어 합치도록 했다. 여몽은 간곡히 사양하며, 계를 올려, 서고 등은 모두 나라에 열심히 수고하였으며, 자제들은 비록 어리지만 폐출시킬 수 없다고 진술했다. 여몽이 여러 차례 표를 올리고서야 손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여몽은 이때 또 그들을 위해 스승을 선택해주고 스승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좌하고 지도하도록 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삼가하고 주의하는 것은 대부분 이와 같았다.

위나라는 여강의 사기(謝寄)를 기춘전농(祈春典農)으로 임명하여 보내 환현의 전원지대에 주둔하도록 하여 자주 변방을 쳐서 어지럽게 했다. 여몽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틈을 보아 습격했다. 사기는 움츠리고 물러났고, 그의 부하 손자재(孫子才)와 송호(宋豪) 등은 모두 노약자를 부축하여 데리고 와서 여몽에게 투항했다. 후에 손권을 수행하여 유수에서 조조와 대항할 때도 기이한 계책을 여러 차례 진언했다. 또 손권에게 물의 입구를 좁혀 보루를 만들 것을 권유하였기 때문에 방어가 매우 정밀하였으므로 조조는 내려올 수 없어 물러났다.

조조는 주광(朱光)을 보내 여강태수로 임명하고 환현에 주둔시켜 농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도록 하고, 또 간자(間者;첩자)를 보내 파양의 도적 우두머리를 회유하여 내응 하도록 만들게 했다. 여몽이 말했다.

"환현의 토지는 비옥합니다. 만일 일단 수확을 거두게 된다면 그들의 병력은 반드시 증가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몇 해가 지난다면, 조조의 형세는 나타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일찍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래서 손권은 직접 환현을 정벌하려고 장수들을 불러서 계책을 물었다. 여몽은 곧 감영을 추천하여 승성독(升城督)으로 임명해 앞에서 병사들을 인솔하여 공격하도록 하고, 여몽은 정예부대로 그의 뒤를 이었다. 새벽에 진격하였다. 여몽은 직접 북채와 북을 잡았으며, 사졸들은 모두 기세 등등하여 밥 먹는 시간에 격파시켰다. 이후에 장료가 협석에 이르렀을 때는 성이 이미 파괴됐다고 들었으므로 물러났다. 손권은 여몽의 공로를 장려하여 즉시 여강태수로 임명했으며, 얻은 인마(人馬)는 모두 나누어 주었고, 따로 심양(尋陽)의 둔전 일을 할 6백 명, 관속 30명을 주었다. 여몽이 심양으로 돌아왔을때, 예기치 못했던 여릉의 도적들이 일어났다. 많은 장수들이 토벌에 나서 공격했으나 붙잡을 수 없었다. 손권은 말했다.

"사나운 새 백 마리가 물수리 한 마리만도 못하구나."

또 여몽에게 명령하여 토벌하도록 했다. 여몽은 그 우두머리를 주살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어 다시 평민이 되도록 했다.

이때 유비는 관우에게 명령해 수비를 공고히 하도록 하여 형주 전역을 촉이 차지하고 말았다. 손권은 여몽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했다. 여몽이 전하는 편지를 받은 두 군은 형세를 멀리서 보고 귀순하여 항복했지만, 오직 영릉태수 학보(謔菩)만은 성을 지키고 투항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비도 촉에서 직접 공안까지 와서 관 우를 파견해 세 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손권은 당시 육구에 머물러 있었는데, 노숙을 보내 1만 명을 인솔하여 익양에 주둔하며 관우에게 항거하도록 했으며, 신속히 여몽에게 편지를 보내 불러 영릉을 버리고 급히 돌아와 노숙을 돕도록 했다. 당초 여몽은 장사를 평정시키고 영릉으로 가려고 영현(霙縣)을 지나고 있을 때 남양의 등현(鄧玄)을 수레에 태우고 갔었다. 등현은 학보의 옛 친구였으므로 그에게 학보를 회유하도록 하려고 했다. 이때 돌아가야만 한다는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여몽은 이 일을 비밀로 하고 밤에 장수들을 불러서 계책을 받고 새벽이 되면 성을 공격 하기로 했다. 여몽이 등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학자태(謔子太)는 이 세상에 충의로운 일이 있음을 듣고, 또 그것을 보려고 했지만 시기를 알지 못했소. 좌장군은 한중에 있으며, 하후연에 포위당했소. 관우는 남군에 있는데, 지금 우리 군주께서 직접 그곳에 임해 있소. 최근 그들은 번성의 본영을 공격하여 영현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손규(孫規)에게 격파되었소. 이것은 모두 눈앞의 일이니, 그대가 직접 보았을 것이오. 그들은 머리와 꼬리가 거꾸러 매달려 있어서 목을 구하려 하지만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남는 힘이 있어서 다시 이 땅을 관리하겠소? 현재 나의 사졸들은 정예이며, 사람들은 목숨을 다하려 하고, 군주는 중원 부대를 보내 길에서 서로 잇도록 하였소. 지금 학자태는 하루 목숨으로써 희망 없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소. 이것은 소발 굽 아래의 물고기와 같을 것이오. 장강과 한수에 기대기를 바라고 있지만, 의지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오. 만일 학자태가 반드시 병사들의 마음을 통일시키고 고립된 성을 견고하게 지킬 수 있으며, 여전히 시간을 끌어 귀순하는 자를 기다릴 수 있다면, 할 수 있소. 그러나 지금 내가 힘을 계산하여 헤아려 보고, 이 조건에 따라 공격한다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성은 반드시 파괴될 것이오.
성이 파괴된 후에는 그 자신이 죽어도 사태에 어떤 도움이 있으며, 백 세 노모로 하여금 백발로 주살 받을 것을 걱정하게 해야 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소! 이 사람은 외부 소식을 듣지 못하고 구원병에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여겨지오. 그대는 가서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를 위해 재난과 복에 관해 진술해 주시오."

등현은 학보를 만나 여몽의 생각을 전부 말했다. 학보는 두려웠으므로 등현의 말을 들었다. 등현이 먼저 나와 여몽에게 보고하며, 학보는 조금 후에 올 것이라고 했다. 여몽은 우선 네 명의 장수에게 명하여 각각 1백명씩을 선발하도록 하고 학보가 나오면 들어가 성문을 지키도록 했다. 잠시 후, 학보가 나왔다. 여몽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함께 배에 올랐다. 말을 마치고 편지를 꺼내 보여주고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학보는 편지를 보고 나서 유비는 공안에 있고 관우는 익양에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땅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여몽은 손교(孫較)를 남겨 뒷일을 맡기고, 그날 군대를 이끌고 익양으로 갔다. 유비가 맹약을 청해 왔으므로 손권은 학보 등을 돌려보내고 상수를 경계로 하여 나누고, 영릉을 유비에게 돌려줬다. 심양과 양신(陽薪)을 여몽의 봉읍으로 삼게 했다.

군대가 돌아온 후, 합비를 정벌하러 갔다. 합비에서 병사를 철수시킨 후, 장료 등의 습격을 받게 되었는데, 여몽과 능통은 목숨을 바쳐 손권을 호위했다. 후에 조조가 또 대규모의 병력으로 유수까지 나왔다. 손권은 여몽을 독으로 임명하고 이전에 세운 보루에 근거하여 강력한 활 1만 개를 그 위에 두어 조조에게 항거하도록 했다. 조조의 선봉대가 아직 진영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여몽이 공격하여 격파시켰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여몽을 좌호군·호위장군으로 임명했다.

노숙이 세상을 떠난 후, 여몽은 서쪽으로 육구에 주둔했으며, 노숙의 군대 1만여 인마는 전부 여몽에게 귀속되었다. 여몽은 또 한창태수로 임명되었고, 하준, 유양, 한창, 주릉을 식읍으로 삼았다. 그는 관우와 땅을 나누어 변방이 이어져 있었으므로, 관우가 날쌔고 용맹하며 오나라 땅을 삼키려는 야심이 있으며, 게다가 국가 권력의 상층에 있으므로 이 형세는 지속되기 어려울 것을 알았다. 처음에 노숙 등은 조조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전쟁의 환란은 막 시작되었으니, 마땅히 서로 돕고 협력해야지 우호관계를 잃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몽은 비밀리에 계책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로장군으로 하여금 남군을 지키도록 하고, 반장(潘璋)은 백제에 주둔시키고, 장흠(藏欽)은 기동대 1만 명을 인솔하여 장강을 따라 아래위로 활동하면서 적군이 있는 곳에서 적절히 대응하도록 하며, 저는 국가를 위해 앞에서 양양을 점령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무엇 때문에 조조를 걱정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관우에게 의지하겠습니까? 게다가 관우 자신도 그의 신하이고 모략과 무력을 갖고 점거하고 있는 곳에서 뒤집어 번복하였으므로 심복으로써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관우가 쉽게 동쪽으로 향하지 못한 까닭은 당신의 영명함과 저희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역량이 강하지 않을 때 도모하여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다면, 다시 무력을 펴려고 해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그의 계책에 찬성하고 받아들였다. 또 잠시 그와 서주를 취할 생각에 관해 논의했다. 여몽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조조는 멀리 황하 북쪽에 있으며, 방금 여러 원씨(袁氏)들을 소멸시키고 유주와 기주를 어루만지느라 강동을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서주 땅의 수비 병사는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가기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지세는 육로의 요충지이며 용맹한 기병들이 달릴 만한 곳입니다. 당신이 오늘 서주를 얻는다면, 조조는 이후에 반드시 와서 쟁탈을 벌일 것입니다. 비록 7, 8만 명으로 그곳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관우의 땅을 취하여 장강을 전부 차지해 형세를 더욱 확장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손권은 특히 이 의견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여 막 육구에 도착했을 때, 겉으로는 두터운 정과 후의를 배가시키고 관우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후에 관우는 번성을 토벌하러 가면서 병사와 장수를 남겨 공안과 남군을 지키도록 했다.

여몽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러 가면서 많은 병력을 머물게 하여 수비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제가 그의 뒤에서 모의할 것을 두려워 한 까닭입니다. 저는 항상 질병에 걸려 있으니, 병사들을 나누어 건업으로 돌아가게 하고 질병 치료를 이유로 삼기를 희망합니다. 관우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수비부대를 철수하여 전부 양양으로 가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 대군이 장강을 거쳐 밤낮으로 달려 올라와서 그의 텅빈 성을 습격한다면, 남군을 항복시킬 수 있으며 관우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질병이 위독하다고 알렸다. 손권은 곧 공개적으로 격문을 내려 여몽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여, 은밀히 그와 계책을 도모했다. 관우는 과연 이 소식을 믿고 점점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도록 했다. 위나라는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도록 했고, 관우는 우금 등 인마 수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았는데, 이로 인해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관(湘關)의 쌀을 마음대로 탈취하게 되었다.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행 동을 시작하여 먼저 여몽을 보내 앞에 가도록 했다. 여몽은 심양에 도착하자 자신의 정예병사를 모두 커다란 배 안에 숨도록 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노를 젓도록 하여 상인의 복장을 만들어서 밤낮으로 갔다. 관우가 주둔하고 있는 장강 해안가 초소까지 도착하여서는 보초병을 전부 체포했기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남군까지 갔고, 사인(士人)과 미방(靡芳)은 모두 항복했다. 여몽은 진군하여 성을 점거하고, 관우와 장수들의 가족들을 전부 붙잡았는데, 그들을 위로하였으며, 군대 안에 엄격히 명령하여 인가로 들어가 요구하거나 강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여몽의 수하 병사로 여남 사람이 백성들의 집에서 삿갓 하나를 탈취해 관의 갑옷을 덮어놓았다. 관의 갑옷은 비록 공적인 물건이지만, 여몽은 이것은 여전히 군령을 범한 것이며, 고향의 연고 때문에 법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을 베었다. 그래서 군대 안에서는 놀라 전율했으며, 길에서 다른 사람이 잃은 것을 줍지 않았다. 여몽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접 노인들을 위문하고 부족한 점을 물었으며, 병든 자에게는 의약을 공급해주고, 굶주린 자에게는 입을 것과 식량을 주었다. 관우의 창고 안의 재물은 모두 봉해져 보존된 상태로 손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관우는 돌아올 때,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여몽에게 통보했는데, 여몽은 항상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안을 돌아보게 하고, 집집마다 방문하도록 했다. 어떤 사람은 손수 편지를 써서 믿을 만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관우가 보낸 사람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방문한 소식을 탐문하여 가족들이 모두 무사하며 평상시를 뛰어넘는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관우의 관병들은 투지가 없어졌다. 마침 손권이 오래지 않아 도착했고, 관우는 자신이 홀로 곤궁하게 되었음을 알고는 곧 맥성(麥城)으로 달아나 서쪽으로 장향(障鄕)에 이르렀다. 병사들은 모두 관우를 버리고 투항했다. 손권은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의 길을 끊도록 하였다. 곧바로 관우 부자가 함께 붙잡혔고, 그래서 형주는 평정됐다.

손권은 여몽을 남군태수로 임명하고 잔릉후(孱稜侯)로 봉했으며, 1억 전과 황금 5백을 내렸다. 여몽은 간곡히 금전을 사양했지만, 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 책봉한 작위를 아직 행하지도 않았는데, 마침 여몽이 질병에 걸렸다. 손권은 당시 공안에 있었는데, 여몽을 내전으로 맞아들이도록 하고, 치료를 위해 온갖 처방을 다했으며, 국내에서 여몽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천금을 내리겠다고 포고하여 불러모았다. 어떤 때 침을 찌르면, 손권은 그의 고통 때문에 슬퍼하곤 했다. 손권은 항상 그의 안색을 살피려고 하면서도 그를 놀라게 할까 걱정이 되어 언제나 담 밖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으며, 그가 조금이라도 먹을 수있는 것을 보면 기뻐하며 주위를 돌아보고 말하며 웃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탄식을 했으며 밤에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질병을 앓는 중에 병세가 호전되면, 그를 위해 사면령을 내렸고, 신하들은 모두 경하했다. 이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손권은 직접 가까이에서 지키고, 도사에게 명하여 성신(星辰) 아래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여 그의 생명을 지켜 달라고 청하게 했다.

그는 향년 42세에 결국 내전에서 죽었다. 손권은 매우 애통해했으며, 그를 위해 상복을 입고 먹는 것도 줄였다. 여모은 죽기 전에 하사받은 금은이나 재물, 상을 전부 창고 속에 넣어두고, 창고 관리자에게 검소하게 하도록 힘쓰라고 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더욱더 비감해했다.

여몽은 어려서 경전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항상 대사를 진술할 때마다 언제나 구술로 대신 표를 올렸다. 그는 일찍이 부하의 일로 강하태수 채유(蔡遺)에게 고발당했었지만, 여몽은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예장태수 고소(顧邵)가 죽었을 때, 손권이 임명할 자를 묻자, 여몽은 채유를 추천하면서 직무를 받드는 훌륭한 관리라고 했다. 손권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기해(祁奚 ; 춘추시대 晉나라 祁公의 신하인데, 원수인 假解를 자기의 후임자로 추천하였다)가 되려고 하시오?"

그래서 그를 임용했다. 감녕은 성질이 포악하고 살인을 좋아하였으며 항상 여몽의 생각을 거슬렀고, 또 어떤 때는 손권의 명령을 어기기도 했다. 손권은 그 때문에 노여워했다. 그러나 여몽은 항상 그를 위해 진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감녕같은 장수는 얻기 어려우니,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손권은 그래서 감영을 후하게 대접했다. 감녕은 마침내 그 쓰임을 얻게 되었다.

여몽의 아들 여패(呂覇)가 작위를 계승했다. 손권은 그에게 묘지를 지키는 3백 호(戶)를 주었으며, 농지 50경(傾)의 부세를 면제시켜 주었다. 여패가 죽은 후, 형 여종(呂琮)이 후작을 계승했다. 여종이 죽은 후, 동생 여목(呂睦)이 후사를 이었다.

손권은 육손과 주유, 노숙 및 여몽에 관해 논의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근(公瑾 ; 주유)은 영웅답고 장렬하며 담력과 지략이 보통 사람들을 넘었기 때문에 조맹덕(曹孟德 ; 조조)을 무찌르고 형주로 세력을 뻗혔던 것이오. 오랜 시간 동안 어떤 사람도 그의 재능을 계승할 수 없었는데, 그대가 오늘 그를 잇고 있소. 공근은 이전에 자경(子敬 ; 노숙)을 동쪽으로 오도록 하여 내가 있는 곳으로 보냈었소. 나는 그와 연회 석상에서 담소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곧장 정사의 핵심과 제왕의 공업에 관해 언급했었소. 이것이 첫 번째로 기뻤던 일이오. 이후에 맹덕이 유종의 세력을 손에 넣으려는 틈을 이용하여 수십 만 명의 수군과 보병을 이끌고 함께 내려가야 한다고 과장되게 말했소. 나는 각 장수들을 두루 불러서 적당한 대책을 물었으나, 앞서 만족스럽게 말하는 자가 없었소. 자포(子布 ; 장소)나 문표(文表 ; 진송)는 마땅히 사자를 보내 격문을 받들고 조조를 맞이해야 한다고 다같이 말했는데, 자경은 즉시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하고, 나에게 급히 공근을 불러 대군 통솔을 그에게 위임하여 적을 거꾸로 공격하도록 권하였소. 이것이 두 번째로 통쾌했던 점이오. 그리고 그가 결정한 계책은 멀리 장의(張儀)나 소진(蘇秦)을 뛰어넘는 것이었소. 후에 비록 나에게 토지를 유현덕(劉玄德)에게 빌려주도록 했던 것은 그의 한 단점이지만, 두 가지 장점을 손상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이오. 주공(周公)은 한 사람에게 완벽함을 구하지 않았었소. 때문에 나는 그의 단점을 잊고 장점을 귀하게 여기면서 항상 등우(鄧禹 ; 후한의 光武帝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했던 인물)에 견주려고 했소. 또 자명(여몽)이 어렸을 때, 나는 그가 곤궁함을 싫어하여 과감하고 담력이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소. 그런데 성인으로 성장한 후에, 그의 학문은 탁월한 재략이 있게 되었으므로 공근의 뒤에 놓일 수 있었소. 단지 언변의 재능에 있어서 만은 공근에게 미치지 못했소. 관우를 잡을 방법을 계획한 점에 있어서는 자경을 이겼소. 자경은 나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말하기를, `제왕이 일어날 때는 모두 환난을 제거함이 있으므로, 관우는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라고 했소. 이것은 자경이 속으로는 처치할 방법이 없으면서 겉으로 큰 소리 친 것일 뿐이었소. 나는 또한 그를 용서하고 책임을 묻지 않았소. 그러나 그의 군대가 주둔할 군영을 만들 면서는 명령이나 금령은 반드시 행하여 그가 관할하는 구역 안에서 법을 어겨 기강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가 없었으며,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지 않았소. 그의 다스리는 방법은 역시 아름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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