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正史)
위서(魏書)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장수전(張繡傳)
장수는 무위군(武威郡) 조려현(祖厲縣) 사람으로서 표기장군 장제(張濟)의 같은 종족의 아들이다. 변장(邊章)과 한수(韓遂)가 양주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금성 사람 국승(國勝)이 조려의 우두머리 유준(劉雋)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장수는 현의 벼슬아치로 있었으나, 국승을 암살하니 군 내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행위를 의롭다고 평가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을 모아 마을의 호걸이 되었다. 동탁이 패하자, 장제와 이각 등은 여포를 공격하여 동탁의 원수를 갚았다. 이 일은 〈동탁전〉에 기록되어 있다.
장수는 장제를 따라갔으며, 군공에 따라 건충(建忠)장군으로 승진하고 선위후(宣威侯)에 봉해졌다. 장제는 홍농에 주둔했지만, 사졸들의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남쪽으로 내려가 양성을 공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수는 그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완성에 주둔하면서 유표와 연합하였다. 조조가 남쪽으로 원정하여 제수에 주둔하고 있을 때, 장수 등은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조조가 장제의 아내를 그의 후궁으로 맞이하자, 장수는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장수가 불쾌하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비밀리에 장수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누설되어, 장수가 조조를 급습했다. 조조의 군대는 패하고 두 아들이 전사했다. 장수는 다시 돌아가 양성을 지켰다. 조조는 매년 그를 공격하였으나 격파시킬 수는 없었다.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교전할 때, 장수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 부하들을 데리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 일은 〈가후전〉에 기록되어 있다.
장수가 도착하자 조조는 손을 잡고 환영 연회를 성대하게 베풀고, 아들 조균(曹均)을 장수의 딸과 결혼시키고, 장수를 양무(揚武)장군으로 임명했다. 관도 싸움에서 장수는 전력으로 분투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파강(破羌)장군으로 승진되었다. 또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할 때 참가하여 식읍이 2천 호로 증가했다. 이때, 천하의 가구수는 감소하여 10호가 1호로 줄었는데, 장수들의 식읍이 1천 호도 안되는 것에 비하면 장수는 매우 많은 것이었다. 장수는 유성의 오환을 정벌할 때 참가하였으나, 도중에 죽어 시후를 정후(定侯)라고 했다. 그의 아들 장량이 작위를 이었지만, 위풍(魏諷)의 모반에 가담하여 주살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