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료]]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 주석

작성자견희|작성시간04.08.02|조회수269 목록 댓글 0
선주전 주석

基-2004/8/2 15:33

1) 한 대(漢代)에는 천자가 햇곡식으로 빚은 순주(醇酒)를 종묘에 바칠 때, 제후들에게 각기 그 자격에 따라 금(金)을 바치고 술을 마시도록 했는데, 금의 양이 부족하거나 품질이 나쁘면 봉토를 깎았다.


2) 진등 등은 사자를 보내 원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화는 우리 주에까지 이르렀으니, 주의 장(將)은 죽을 것이고 백성들은 주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간웅이 갑자기 나타나 맹주(원소)에게 침식을 잊고 걱정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협력하여 평원(平原)의 상(相) 유비를 종주(宗主)로 삼아 백성들에게 의지할 것이 있음을 알리십시오. 지금은 밖으로부터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무장을 풀 틈이 없으니, 삼가 하급 관리를 보내 일을 집행하시기를 급히 고합니다." 원소는 "유현덕은 도량이 넓고 신의가 있소. 지금 서주가 그를 추대하기를 원하는 것은 나의 희망이기도 하오"라고 말했다.


3) 유비의 군대는 경릉(慶陵)에 있을 때 기아 때문에 곤궁했고, 군리와 병사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서로 먹으려고 했다. 굶주림이 극도의 상태에 이르자 소패(小沛)로 돌아가기를 희망했고, 관리로 하여금 여포에게 항복하도록 했다. 여포는 유비를 주로 돌아오게 하고, 세력을 합쳐 원술을 공격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비를 위해 자사(刺史)의 거마와 노예를 갖추어 유비의 처자식, 부하, 가족들을 사수(泗水)가까지 보내고 연회석을 마련하여 즐기도록 했다. 여포가 이렇게 결정하기 전에 관리들은 "유비는 자주 태도를 바꾸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합니다"라고 하며 반대했었다.


4) 동승은 후한 영제의 모친인 동태후(董太后)의 조카로서, 헌제에게는 장인이 된다. 옛날에는 장인(丈人)이라는 말이 없었으므로 원문에는 '구(舅)'라고 되어 있다.


5) 이때 마침 번개가 쳤다. 유비는 그래서 조조에게 "성인이 '갑작스런 번개는 격렬한 바람이 있으면 반드시 변한다'고 했는데, 진실로 그러합니다. 한 번의 우렛소리의 위세가 이 정도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6) 동승 등은 유비와 모의를 했지만, 아직 행동하지 않았는데 유비가 출정했다. 동승은 왕자복에게 "곽다(郭多 ; 郭氾)는 병사 수백 명을 갖고 이각(李 )의 수만 명을 멸했습니다. 그대와 나는 같지 않을 뿐입니다! 과거 여불위(呂不韋)의문은 자초(子楚 ; 시황제의 아버지인 秦의 莊襄王)에 의해 높아졌습니다. 지금 나는 그대에게 이로부터 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자복은 "두렵고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병사 또한 적습니다."라고 했다. 동승은 "행동을 일으킨 후 조조의 정규병을 손에 넣고도 불충분한가를 돌아보십시오"라고 했으며, 왕자복은 "지금 수도에 믿을 만한 자가 어찌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동승은 "장수 교위 충즙( ?), 의랑 오적(吳 )은 나의 심복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계획을 정하게 되었다.


7) 조조는 자주 측근을 파견하여 장수들 가운데 빈객을 초대해 주연을 베푸는 자가 있는지 살피게 했다. 유비는 이때 대문을 닫고 사람들과 야채를 심고 있었는데, 조조가 사람을 보내 그 문 안을 살피도록 했다. 유비는 장비와 관우에게 "내가 어찌 야채를 심는 사람인가? 조조는 반드시 의심을 하고 있으니, 이 이상 머물 수 없겠다"라고 하고, 그 날 밤, 뒷문 울타리를 열어 장비 등과 함께 날쌘 말을 타고 떠났다. 조조로부터 받은 의복은 밀봉하여 남겨 두고 소패(小沛)로 가서 병사들을 모았다.


8) 유비는 형주에서 수년 간 거주했는데, 일찍이 유표가 베푼 주연에서 넓적다리에 군살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유표가 유비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유비는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떨어져 있은 적이 없었으므로 넓적다리에 살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말을 타지 않았으므로 넓적다리에 살이 있습니다. 세월은 이처럼 빨리 가고 자꾸 늙어만 가는데, 어떠한 공업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슬픕니다"라고 했다.


9) 조조가 유성(柳城)에서 허도로 돌아온 후, 유표는 유비에게 "그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큰 기회를 잃었습니다"라고 했다. 유비는 "지금 천하는 분열되었고 매일같이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기회는 오는 것이 어찌 이번이 마지막이겠습니까? 만일 오늘 이후로 기회가 온다면, 이것은 아직 한탄하기에는 충분치 못합니다"라고 했다.


10) 유표는 병세가 위독했으므로 나라를 유비에게 의탁하고 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의 아들은 재능이 없고 의지하던 장수들은 모두 죽었소. 내가 죽은 후에는 그대가 형주를 통치하시오." 그러나 유비는 "자제 분들은 각기 현명합니다. 그대는 병만을 걱정하십시오"라고 했다. 어떤 이가 유비에게 유표의 말대로 하기를 권하자, 유비는 "이 사람은 나를 후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지금 그의 말을 따른다면 사람들은 나를 박정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11)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를 보면, 유비는 돌아와 측근에 있는 자에게 "손권[孫車?]은 위에 있는 자를 칭찬하고 아래에 있는 자를 무시하므로 그 사람 밑에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밤낮을 이어 떠났다고 한다.


12) 유비는 이 일 때문에 수하의 병사들에게 격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익주를 위해 강대한 적을 토벌하고, 이 일로 병사들은 피곤하며, 안정된 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 지금 창고에 재산과 보물을 쌓아 놓고 포상을 아끼고 있다. 사대부에게 사력을 다해 싸우기를 희망하고,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13) 무도(武都)에 남성이 여성으로 바뀐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웠고, 산의 정기를 쓰고 있었다. 촉왕(蜀王)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풍토에 익숙지 않아 질병이 났으므로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촉왕이 그녀를 붙들어 놓아 죽게 했다. 촉왕은 사졸을 무도로 보내 무도의 흙을 성도의 성곽 안에까지 날라와 묻도록 했다. 넓이가 몇 무(畝)이고 높이는 10 장(丈)이었으며, 무담(武擔)이라 이름 불렀다. 무담은 성도의 서북쪽에 위치했는데, 이 서북쪽은 건(乾 ; 天)의 방위이므로 이 땅을 취해 천자의 자리에 즉위했다는 것이다.


14) 유비는 효경 황제의 혈육이었지만 아주 먼 후손이었으므로 종묘(宗廟)에서 제사지내는 순위를 분명히 하는 일은 어려웠다. 유비는 한왕조를 계승하면서도 어떤 황제를 시조로 하고 친묘(親廟)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몰랐다. 이때 영명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보좌를 했고, 학자가 관직에 있었으므로 종묘 제도에 있어서는 헌장(憲章)했지만 자세한 기록이 부족하고 간략한 것이 유감이다.



結-2004/8/2 16:02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