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하후연전(夏侯淵傳)
하후연은 자가 묘재(妙材)이고, 하후돈의 팔촌 동생이다. 조조가 고향에 있었을 때, 일찍이 현관에게 일을 저질렀는데,5) 하후연이 조조를 대신하여 중죄를 받았다. 나중에 조조가 방법을 강구하여 그를 구했으므로 풀려나게 되었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킨 후, 하후연을 별부사마(別部司馬)와 기도위에 임명하여 수행하도록 했으며, 진류태수와 영천태수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싸울 때는 독군교위(督軍校尉)를 대행하도록 했다. 원소를 격파한 뒤, 그에게 연주․예주․서주의 군량미를 관장하게 했다. 당시 군중에는 식량이 적었으나, 하후연이 끊임없이 수송했으므로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었다.
창희(昌狶)가 모반을 일으키자 우금을 파견하여 공략했으나 당해낼수 없었으므로 다시 하후연을 파견하여 우금과 협력하도록 했다. 비로소 창희를 격파하고 10여 개의 진영의 항복을 받게 되었고, 창희 역시 우금을 만나서 투항했다. 하후연은 돌아와 진군교위에 임명되었다.6) 제남과 악안(樂安)의 황건적 서화(徐和)와 사마구(司馬俱) 등이 성을 공략하여 장리(長吏;현의 고관)을 살해하자, 하후연은 태산군(泰山郡)․제군(齊郡) 그리고 평원군(平原郡)의 병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황건적을 크게 쳐부수었다. 서화를 참수하여 모든 현을 평정하고 그 식량을 거두어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건안 14년(209)에 하후연은 영군(領軍)을 대행하도록 했다. 조조는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와 하후연에게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도록 하여 여강군의 반란자 뇌서(雷緖)를 공격했다. 뇌서가 격파되자, 또 정서호군(征西護軍)의 직책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황을 지휘하게 하여 태원군의 적을 공격하게 하니, 20여 개의 진영을 함락시키고 그 우두머리 상요(商曜)를 참살했으며, 그의 성을 파괴하였다. 이후 한수 등의 정벌에 수행하여 위남(謂南)에서 전투를 하였다. 또 주령(朱靈)을 지휘하여 유미(隃糜)와 병저( 氐)를 평정했다. 조조는 안정(安定)에서 합류하여 양추(楊秋)를 항복시켰다.
건안 17년(212)에 조조는 곧 업으로 귀환하여, 하후연에게 호군장군을 대행하게 하고 주령․노초(路招) 등을 지휘하여 군대를 장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그는 남산의도적 유웅(劉雄)을 격파하고 그 군사들의 항복을 받았다. 호(鄠)에 있던 한수와 마초의 잔당인 양흥(梁興)을 포위․공격하여 무찌르고 양흥을 참살하였으며, 그 공로로 박창정후(搏昌亭侯)에 봉해졌다. 마초가 기현에서 양주자사 위강(韋康)을 포위하였으므로, 하후연은 위강을 구하려 했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패배하였다. 기현에서 2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마초가 나와 맞아 싸웠으나 하후연의 군사들이 불리하였다. 게다가 마초에 호응하여 병저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하후연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건안 19년(214)에 조구(趙衢)․윤봉(尹奉) 등이 마초 토벌을 계획하고 강서(姜敍)가 노성( 城)에서 병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조구 등은 마초를 속여서 성을 나와 강서를 공격하도록 하고는 뒤에서 마초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마초는 한중의 장로에게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병사들을 토벌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기산(祁山)을 포위했다. 강서 등은 하후연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하였고, 여러 장수들 중 의견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반드시 조조가 와서 법도에 따라 처리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조공은 업성에 있으니, 우리들이 사람을 보내서 오고 가는데 4천여 리나 되오. 이 일을 위공에게 보고를 하게 되면 강서 등은 반드시 패할 것이니, 이것은 위급함을 구하는 좋은 계책이 아닐 것이오.”
하후연은 곧장 원군을 출발시키기로 결정하고,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여 진창(陳倉)의 좁은 길을 통해 진군하였으며, 자신은 병사의 군량을 감독해 위에서 진군하였다. 장합이 위수가에 이르자, 마초는 저족․강족 병사 수천을 이끌고 장합을 맞아 싸우러 왔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이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둬들였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러 현이 항복하였다. 그때 한수는 현친(顯親)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습격하여 빼앗으려고 하자 달아났다. 하후연이 한수의 군량을 손에 넣고 약양성(略陽城)까지 추격하자, 한수와의 거리가 20여 리 밖에 되지 않았고 여러 장수들은 한수를 공격하고 싶어했는데, 마땅히 흥국성(興國城)의 저족을 공격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후연은 한수의 병사가 정예이고 흥국의 성은 견고하므로 공격해도 단기간에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장리(長離) 일대의 여러 강족을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장리 일대에 있는 여러 강족 중에는 한수의 군대에 참가한 자가 많으니 우리들이 장리를 공격하면 한수의 군영에 있는 강족 사람들은 반드시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되돌아올 것이며, 만일 한수가 강족을 버리고 홀로 지키도록 한다면 고립될 것이고, 강족을 구하러 온다면 관병(官兵)은 한수군과 평야에서 싸워 반드시 생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후연은 군수품을 지킬 지휘관을 남겨 놓고 가볍게 무장한 보병․기병을 이끌고 장리로 달려가 강족의 군영을 공격하여 불태웠으며, 참살하고 포롤 잡은 강인(羌人)이 매우 많았다. 한수의 군대에 있던 강인들은 각기 종족의 부락으로 돌아왔다. 예상했던 대로 한수도 과연 대군을 이끌고 장리를 구하려고 달려와 하후연의 군대와 진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후연의 여러 장수들은 한수의 군사력을 보고 두려워하여 진영을 구축하고 참호를 파서 그들과 대적하려고 하니 하후연이 말했다.
“우리 군대는 천 리를 전진하며 전투를 해왔는데, 이제 다시 진영을 구축하고 참호를 판다면, 병사들은 피로하여 오래 싸울 수 없을 것이오. 비록 적의 군사가 많으나 쉽게 대적할 수 있을 것이오.”
하후연은 곧 북을 울려 전투를 개시하여 한수군을 대파하고 깃발을 노획하고 악양으로 돌아와 군대를 진격시켜 흥국을 포위했다. 흥국의 저왕 천만(千萬)은 마초에게로 도망했고, 남은 무리는 항복했다. 하후연이 군사를 도렬 고평(高平)․도각(屠各)을 공격하니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그들의 양곡과 우마를 거두었다. 이 공적으로 조조는 하후연에게 절을 주고 서방(西方)을 진무하도록 하였다.
당초에 포한(枹罕)의 강왕(羌王) 송건(宋建)은 양주의 혼란을 틈타서 스스로를 하수(河首) 평한왕(平漢王)이라 칭하였다. 조조는 하후연을 파견하고 여러 장수들을 통솔해 송건을 토벌하도록 했다. 하후연은 도착하여 포한을 포위하고, 한 달 남짓한 시간이 걸려서야 성을 함락시키고 송건이 임명한 승상 이하의 관리를 참살하였다. 하후연은 별도로 장합 등을 파견하여 하관(河關)을 평정하고 황하를 건너 소황중(小皇中)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되자 하서에 있던 강(羌)의 여러 부족이 모두 투항하였고, 농우(隴右)가 평정되었다. 조조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 송건이 반란을 일으켜 조정을 거스른 지가 10여 년이나 되었는데, 하후연은 한 번의 싸움으로 그를 섬멸하고, 관우(關右) 지역을 호랑이 같은 걸음으로 활보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공자가 ‘나와 너(제자 자공)는 안회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
건안 21년(216)에 하후연에게 식읍 3백 호를 더 주어, 이전 것과 합쳐 8백 호가 되게 하였다. 장안으로 돌아와 하변(下辯)에 있는 무도군(武都郡)의 저족․강족을 공격하고, 저족의 곡물 10여 만 석을 몰수하였다. 조조가 서쪽으로 장로(張魯)를 정벌할 때, 하후연 등은 양주의 모든 장수․제후․왕 이하의 관리를 인솔하여 조조가 휴정(休亭)에서 합류했다. 조조는 매번 강족과 호족을 만날 때마다 하후연으로서 그들을 두렵게 했다. 마침 장로가 항복하여 한중이 평정되었으므로 하후연을 도호장군으로 임명하고, 장합과 서황 등을 지휘하여 파군을 평정했다. 조조는 업성으로 돌아오면서 하후연을 한중에 남겨 수비하고, 동시에 하후연을 정서장군으로 임명했다.
건안 23년(218)에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양평관(陽平關)으로 들어왔으므로, 하후연은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여 그를 막으려 서로 수년간 싸웠다.
24년(219) 정월, 유비는 한밤중에 하후연의 진영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하후연은 장합에게 동쪽 경계선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날랜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 경계선을 지켰다. 유비는 장합에서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의 군사력이 불리했다. 하후연은 자신이 이끌던 병사들을 반으로 나누어 장합을 원조하였으나, 유비에게 습격을 당하여 마침내 전사했다. 시호를 민후(愍侯)라고 했다.
당초에, 하후연이 전쟁에서 여러 번 이겼지만, 조조는 항상 경계의 말을 했다.
“대장이 된 자는 두려워하고 약함이 있어야 하며, 단지 용기만을 의지할 수는 없는 것이오. 대장은 마땅히 용기를 근본으로 삼아야 되지만, 행동으로 옮길 때는 지혜와 게책을 사용해야 되오. 만일 오직 용기에 의지할 줄만 안다면 일개 필부의 적수에 불과할 뿐이오.”
하후연의 아내는 조조의 처제이다. 맏아들 하후형(夏侯衡)은 조조의 동생 해양애후(海陽哀侯)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특히 두터운 은총을 받았다. 하후형은 하후여느이 작위를 이었고, 후에 안녕정후(安寧亭侯)로 봉해졌다. 황초 연간에는 둘째 아들 하후패(夏侯霸)7)에게, 태화 연간에는 하후패의 넷째 동생에게 모두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하후패는 정시 연간에 토촉호군(討蜀護軍), 우장군(右將軍)이 되었고, 작위도 박창정후(博昌亭侯)로 승진되었다. 그는 평소 조상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후에 하후패는 위나라 수도에 정변이 발생하여 조상이 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며 촉나라로 망명했다. 조정에서는 부친 하후연이 이전에 세운 공로를 고려하여 하후패의 아들을 사면시키고, 그를 낙랑군으로 보냈다.
하후패의 동생 하후위(夏侯威)는 관직이 연주자사에까지 이르렀다. 하후위의 동생 하후혜(夏侯惠)8)는 일찍이 낙안태수(樂安太守)를 지냈으며, 하후혜의 동생 하후화(夏侯和)는 하남윤을 지냈다. 하후형이 죽자, 그의 아들 하후적(夏侯績)이 뒤를 이어 호분중랑장이 되고, 하후적이 죽자 그의 아들 하후포(夏侯褒)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