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물에 젖은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이렇게 물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방법은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드라이(dry)."
굳이 이러고 있을 필요 없다. 이렇게, 마법으로 물기를 닦아내면 되니까.
아마, 도도하고 고귀하신 물의 정령왕께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나 역시 이토록 당신을 소환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을.
정령. 자연 그 자체의 생명체. 자연을 다스리며, 그 고통에 함께 몸부림치는 유일한 이들. 그리고 그 정령의 정점에 선 4명의 정령왕. 물의 정령왕-엘퀴네스, 바람의 정령왕-미네르바, 불의 정령왕-이프리트, 흙의 정령왕-트로웰. 자연의 정점에 선 자들인 만큼 소환하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친화력이라 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문제도 있고, 그 외에 정령계 스스로가 주관하는 시험도 있으니까. 인간들의 말중에는 이런말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정령을 소환하는것은 어려워진다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간혹, 나이가 들수록 정령을 소환하는것이 쉬워지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것에 대해 조사하는데 천재 드래곤이라 불리는 나도 꽤나 오랜시간이 결렸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온다 하였던가, 나는 끝끝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드래곤인데 그것에 대해 뭐하러 조사하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알고보니 정령을 소환할때는 정령계에 담긴 영혼들이 주관하는 하나의 시험이 있었다. 바로, ‘순수함’과 ‘필요성’. 이 두 가지를 보는 것이다. 순수함은 그렇다쳐도 필요성은 이해가 않갈수도 있다. 정령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여나지 않겠는가? 자,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이 더 부여된다. ‘필요성의 의도’. 과연, 소환자가 어떤 이유로 필요로 하는가. 그 의도가 순수한 것인가, 악독한 것인가. 그래, 인간은 처음에는 순수하더라도 갈수록 악독해지기 때문에 의도라는 조건을 불충족 시키는 경우가 대다수. 거기다, 시대에 시대를 거듭 갈수록 인간의 추악심은 배가 되기 때문에, 정령을 소환할수 있는 자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이라고 그대로 일리가 없다. 광룡(狂龍)이 생기기 시작한 것처럼, 드래곤 중에서도 악독한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언제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며 나 오늘날 그대의 존재를 이땅에 소환하고자 하오니, 그 이름은 모든 물의 근원이자 지배자,정령왕 엘퀴네스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이렇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것이고.
아까 물을 맞은것이 아무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오늘따라 청명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마나를 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엘퀴네스가 그 고고한 자태를 보여줄것만 같았다. 다섯 번 정도 더 외친 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탁 트인 하늘이 엘퀴네스를 연상시킨다. 도도하며 고귀하고,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렇기에 외로울수밖에 없는 이.
하늘에 손을 뻗어 뒤흔들어 본다. 눈을 감으며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그리고 진심으로 바랬다.
-부디 내가 그의 슬픔을 덮을 수 있게 되길.
그의 소중한 존재가 되길.
*
“ 한달이야. 지금부터 한달 안에 유희중인 나와 내 계약자를 찾아. 소환해서는 안 되고, 다른 누구한테 물어봐서도 안돼. 오로지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 나를 찾아내는 거야. 그럼 일행으로도 받아주고 계약도 해줄게. ”
그, 아니 그녀가 한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 쳐졌다. 스스로를 남성체라 주정하는 새로운 여성체 엘퀴네스. 도도하기 보다는 귀엽고, 그러면서도 고귀한, 독특한 이였다.
그녀가 말한 한달이 되었다. 클모어에서 3일의 기적이라며, 자신이 지나가고 있는 길을 알리고 있는 엘퀴네스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어느새 한달이 된것이다. 슬슬 내가 찾으러 가볼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 어이, 꼬마들. 무섭게 안 할 테니 가지고 있는 거 좀 내놔라. 여긴 통행세가 존재하거든. 니들 이 도시 처음이지? 여기 오면 반드시 우리한테 돈 내게 돼있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도 다 같이 먹고 살 거 아니겠냐? ”
전형적인 불량배의 말투. 악질적인 인간의 대표적인 예가 귓가에 울렸다. 귀가 오염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혀를 차며 뒤돌아보는 순간 들리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 보시다시피 저희는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아요. 얼마를 드리면 되는 데요? ”
“ 헤에, 이 녀석, 말이 좀 통하는 녀석이네? ”
“ 낄낄, 안 그럼 우리들이 섭섭하지. ”
뒤이어 나온 목소리에 혹, 오염이라도 되지 않을까 걱정될만큼 청아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응시하였다. 우락부락한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골드만 내 놔라. ”
“ 네에? ”
1골드라니, 인간 기준으로 큰 금액이다. 500실링은 1실버에 해당하고, 200실버는 1골드에 해당했다. 평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대충 10실버이니, 그것은 평민노동자 한달 품삯과 거의 맞먹는 금액이다. 아무리 돈이 썩어 넘칠 만큼 많이 있어도 선뜻 내주기 어려운 액수였던 것이다. 더구나 돈을 받을 사람이 저런 악질이라면 말이다.
남자들이 히죽 웃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사내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 낡은 망토로 가리고 있다고 못 알아 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저거 꽤 비싼 가죽으로 만든 옷이지? 아마 못 받아도 3골드는 하는 걸걸? ”
“ 헉…저건 부모님이… ”
“ 정 지금 주기 힘들면 부모님께 가서 받아오던지. 아, 물론 저 녀석은 우리와 함께 기다리고 있어야 할 테지만 말이야. ”
그녀는 운이 영없는 모양이다. 천이 움직이는 소리와 동시에 그녀의 망토가 벗겨졌다. 망토가 사라진 자리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시 엘퀴네스다, 엘퀴네스.’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 오른다. 이 감정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나는 피식,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이거 왜 이래요? ”
“ 헤에, 너 여자였나? 죽이는 파란색 머리네? ”
“ 남이사 여자든, 남자든! ”
남이사라, 이제 그녀도 지칠대로 지친 모양이다. 하긴 그녀가 어디봐서 남성체인가? 아마 보는 사람마다 여성체라고 하였고, 그때마다 고쳐주다가 결국 지쳐버린것이겠지.
그러나 나는 웃자마자 다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주먹까지 쥐면서 말이다.
“ 1골드를 당장 마련하기가 어렵다면 몸으로 갚는 수도 있지. ”
“ 뭐, 뭐어? ”
“ 간단해. 우리들이랑 딱 3시간만 같이 보내자고. 그럼 네 일행은 무사히 돌려보내 줄 테니까 말이야. ”
몸이라고? 도대체 인간 주제에 누구 몸을 원하는거지? 아무리 인간의 모습으로 있다고 해도 저 청아한 기운을 느낄 수 조차 없는건가? 감히, 인간 주제에 대자연의 몸을 원한다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계약자로써의 예의라고 애써 생각하며 주먹을 내던졌다. 힘도 제대로 안준 주먹에 쓰러지는 인간을 볼때마다 기분이 더욱 나빠진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 이런 조무래기 들을 상대로 뭘 쩔쩔매고 있는 거야? ”
“ ……라…피스? ”
당황했는지 입만 뻐끔거리는 그녀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드디어 내 소유가 된다 생각하니 피식, 거리며 흘러나오는 미소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황해 하는 그녀앞에 손을 내밀었다.
“……?”
그녀가 의아해 하며 나를 응시했다. 설마,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뭐라 말해야 하는 거지? 역시 당당하게 본론부터 말하는게 나으려나?
“약속대로 찾아냈으니까 계약 해줘.”
“…!”
내 말의 그녀가 당황한 듯 싶더니, 이내 내 팔을 잡아끌며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미로보다 복잡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 사람들이 많이 않올것같은 곳에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춰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 당신!”
“라피스.”
내 이름은 라피스라고. 처음에는 않틀렸더니, 왜 이래?
“아, 그래! 라피스! 그런 장소에서 다짜고짜 계약해달라는 말을 하는 게 어디 있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잖아!”
아, 시선 때문이었나? 그런데 그게 어때서?
“남들 시선이 무슨 상관이야? 나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 한 것뿐이다.”
그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려 이마에 손을 짚고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침착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티가 역력했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분한감정을 완전히 숨길 수 없었는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딱 한달 만 이잖아. 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아, 그걸 말하려고 목소리가 떨린 건가? 그런데 그것은...
“흐음? 그게 궁금한가?”
“당연한거 아니야? 정령한테 추적마법인지 뭔지가 통하지도 않을 테고, 내가 어디에 간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어? 설마 드래곤들은 천리안이라도 있는 거야?”
피식, 천리안 이라니.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천리안 같은 건 없어. 한 가지 말해줄까? 난 한달 전부터 이곳에 와있었다.”
“엥?”
“우연히 와 있던 건 아니야. 정확히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너무 늦어서 찾아 나설까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어,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모르고 있었던 거야? 할수없지. 알려줄 수 밖에.
나는 그녀의 놀란 표정을 감상하며,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사나 란느 솔트, 이 제국의 황제전하가 맞으신가?”
“…!!헉, 그건 또 어떻게 안거야?”
“간단한거 아닐까? 난 이미 네가 3일에 한번씩 비를 내린 주범이라는 걸 눈치 챘는데 말이야.”
“…!…”
그녀는 이제야 눈치챈것인지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응시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아까처럼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젠 계약해 줘. 그리고 일행에도 포함시켜 주는 거다.”
“하아…이건 사기야.”
“흐음? 난 일부러 다 알고서도 잠시 나를 떼어놓으려고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그게 아니었나 보지? 하지만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잖아?”
“으윽, 그래 나 바보다. 쳇,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지. 계약해! 한다고!”
계약이라는 단어가 가슴 깊숙이 박혔다. 가슴 언저리가 따스해지면서, 저절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너는 나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이다. 계약…은 당연히 할 테니 따로 의사를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퉁명스러운 어조도 마냥 기분좋게 들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끌어올린 물의 기운을 손가락위에 집중시키자 얇은 푸른 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이마위에 닿자마자 선명한 푸른색의 문장을 새기며 산산이 부수어져 갔다. 그녀의 첫 번째 계약자의 이마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모양의 물의 인장인 것이다.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에는 차갑다는 것이 다였으나, 점차 그 청아함을 드러내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나타났다.
“소감이 어때? 드디어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는데 말이야.”
“…느낌이 이상해.”
목소리가 가라 앉았다. 혹시나 이 느낌이 사라져 버릴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드래곤 으로서 처음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1분이 1시간 같던 때, 몇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나는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품은 채로.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아.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야.”
“헤에, 당신은 레드 드래곤인 거 아니었어? 레드 드래곤은 불의 성질을 따른다고 알고 있는데…내가 틀린 건가? 하긴, 3천년이나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니 그 감격이야 오죽 하겠냐 만은…”
“글쎄…감격일까. 그런 것보다는 드디어 네가 내 것이 되었다는 것에 실감이 든다는 것이 맞겠군.”
“헉.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그녀가 나의 것. 그녀는 나의 것이다. 단 하나 뿐인. 그때 문득 그녀의 첫 번째 계약자가 떠올랐다. 1이라는 것은, 이미 그녀의 첫 번째 계약자가 앗아갔다. 곱게 보일리 없었다.
“이봐, 인간. 네가 엘퀴네스와 먼저 계약했다고 해서 나보다 더 그에 대한 소유권이 많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부터 나한테 동료취급이라도 받고 싶다면 알아서 나서지 않는 게 좋아.”
“하…하하….”
인간은 척 보기에도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하, 저따위 인간에게 첫 번째를 뺏기다니. 그때,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계약했다고 해서 무조건 나를 소유하는 권한이 생기는 건줄 알아? 그리고 당신!”
“라피스.”
또다 또. 이러다간 내 이름이 당신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라피스! 저번에 분명히 표현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뭐야? 한달이 지나도록 전혀 변한 게 없잖아! 그리고 이번 여행은 이사나를 위한 거라고! 멋대로 네 마음대로 굴면 곤란해.”
“일정에 참견할 생각은 없어. 그저 저 인간이 먼저 계약했답시고 까불까봐 미리 경고하는 것뿐이야.”
“하아, 당신이란 드래곤은 정말이지…”
무언가 발칵, 내부에서부터 짜증이 밀려온다. 나는 서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인간 계약자를 신경 쓰며, 내가 코앞까지 온 것도 눈치 못채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무턱대고,
“…!!!”
그녀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는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인간 역시 놀란듯하다. 그때문인지 마나의 상승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고.
“이게 무슨 짓이야!!”
“음? 인간세상에서 쓸 수 있는 마나를 좀더 강화시켜 준 것 뿐인데? 뭐가 문제인가?”
“뭐가 문제냐고? 너…너 지금 나한테!”
“아아. 마우스 투 마우스(mouth to mouth)의 방식이 문제였던 건가? 그게 어때서? 마나를 주는 방식이야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오!”
왜 당황하는지 모르겠다. 정령에게 키스의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물론, 보통은 이런식으로 마나를 주지는 않겠다만은.
“지금 그건 인간들을 흉내 내는 것?”
“하아?”
“뭐랄까. 반응이 묘하게 첫 키스를 빼앗긴 인간들이 충격 받는 모습과 비슷해서 말이야. 그런 건 따라할 필요 없어. 여긴 네 정체를 아는 존재들뿐인데 굳이 연기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
내 말의 그녀는 할말을 잃은듯 멍해졌다. 음, 이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정말 그녀의 모습은 첫 키스를 빼앗긴 인간들의 모습같았다.
한참을 멍하게 서있던 그녀는,
“라피스.”
“뭐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한테 딱 한대만 맞아라.”
..라는 말로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음, 정령왕으로써 드래곤과의 입맞춤이 수치스러운 걸까? 아니면 그 대상이 ‘나’이기 때문에?
욱신. 가슴 한언저리가 아파온다. 하지만 그걸 굳이 표현 하지는 않았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안 그럼 내가 미쳐버릴 것 같거든? 정령 하나 살리는 셈치고 그냥 맞아줘.”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내게 다가와 주먹으로 나의 얼굴을 강타했다. 물의 힘을 담지 않아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역시 정령왕은 정령왕. 저절로 나의 미간은 약간 찌푸려 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강타 당한 부위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아프군.”
“…말이라도 고맙다. 그 말 들으니까 그나마 살 것 같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대충 매듭지은 걸로 해두지. 더 이상 불만은 없겠지?”
“…….”
그녀가 다시 한번 할말을 잃는다. 음, 역시 장난이었나? 내가 반응을 안해줘서 삐친건가?
참으로 독특한 정령왕이다.
* * *
나의 피로 인해 때보다 이르게 탄생한 아스모델이 성인이 되었다. 이 상황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녀는 그것을 축하해주었을것이다.
아스모델이 성인이 되기가 무섭게 갑작스런 지진이 일어났다. 이어, 전마왕의 등에서 붉은 덩어리가 치솟는가 싶더니, 인간들이라면 귀가 멀어버릴듯한 폭발이 일어났다.
“엘뤼엔! 아스!”
그녀는 본능적으로 수막을 쳐서 일행들을 보호하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펼친 보호막은 힘없이 사라졌고, 그녀는 다가오는 악신의 공격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엘!!!!!!”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붉은 폭발음. 이번 공격은 역소환정도로 끝날 크기가 아니었다.
‘제길, 피해, 엘! 어서 피하라고!’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였으나 그리할 필요가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멍청한 녀석. 그래서 내가 아까 피하라고 말했잖아.”
“…엘뤼엔?”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엘뤼엔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보며, 흠칫-하며 놀랐다.
“…에, 엘뤼엔?”
떨리는 음성이 들린다. 그녀는 이 모습을 부정하기라도 싶은지 고개를 저은다. 그 모습이 필사적이기어 아련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아. 아무튼 말도 지지리 안 듣는 아들 때문에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나저나
저 빌어먹을 자식, 감히 누구 아들을 노리고 공격을…쿨럭.”
“!!”
엘뤼엔이 기침을 하며 쓰러지자,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당황한다.
“아…아…”
“에, 엘뤼엔… 엘뤼엔! 엘뤼엔!!”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그녀는, 몹시나 두려워 하고 있었다.
“윽…그렇게 이름 부르지 않아도 내가 엘뤼엔이라는 건 알고 있어.”
“괘, 괜찮아? 괜찮은 거야?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내가 금방 치료할게! 주, 죽으면 안 돼!”
“킥- 겁도 많은 녀석. 죽기는 누가…크윽!”
“에, 엘뤼엔!”
“괜찮…다. 그냥 기운만 없을 뿐이야.”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그녀는 계속해서 치료술을 시도했지만, 엘뤼엔의 상처는 도무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처음 몇마디라도 하던 엘뤼엔은 시간이 지날수록점점 말이 없어졌고, 조급해진 마음은 결국 울음으로 번져 나왔다.
“나아…제발 나으란 말이야…명색이 정령왕이라면서 왜 이런 상처하나 못 고치는 거야…제발! 제발 나으란 말이다! 흑…흐윽…엘뤼엔, 죽으면 안 돼! 내 말 들려? 듣고 있어?”
“……”
“나도 알아서 피할 수 있었어! 나 같은 거 일부러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이렇게 다 큰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필요는 없잖아! 멍청이 엘뤼엔! 바보 아버지!! 젠장! 죽지 마, 아버지…제발…”
그녀에게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소멸하게 되면 신의 육체가 온전히 남아있을 리가 없단 생각에,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고 안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망가져 있었다.
그 사이 폭발에 휘말렸던 다른 일행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여기저기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은 그녀와 엘뤼엔의 모습을 발견하고 단숨에 표정을 굳혔다.
“엘…이게 어떻게 된…”
그 순간, 그녀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격렬한 비웃음을 띄운 채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엘뤼엔! 엘뤼엔이라고? 설마 그 형벌의 신 엘뤼엔을 말하는 것인가! 모두가 벌벌 떨며 하늘 높게 드높이던 상급신이 이렇게 처참한 상태가 되다니!! 신이라는 것도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
“그 모든 것이 다 나에게 감히 대항한 결과다! 주제도 모르는 녀석은 확실히 죽음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지! 크큭, 크하하하! 너무 억울해 하지 말아라! 이 손에서 직접 죽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광이 아닌가!”
그녀는 엘뤼엔에게서 손을 때고 일어난다. 갑자기 그녀의 말투가 변했다.
“…엘뤼엔은 아직 죽지 않았어.”
“호오? 그래? 하지만 곧 죽게 될 거다! 제 아무리 신이라도 저만한 상처를 입고서 살기는 어려울 테니까! 걱정 말거라, 이제부터 하나씩 차례차례 같은 길을 걷게 만들어 줄 테니! 저 혼자 죽는다고 억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넌 아직 악신이 된 게 아니라는 소리다.”
“크하하! 하지만 이미 악신이나 다름없는 몸이지! 그 증거로 상급신인 엘뤼엔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한 것이 아니냐!”
“정말 모르나 본데…‘이미 다름없는 상태’나, ‘완전히 된 상태’는 엄연히 달라. 그 차이를 정말 모르겠다면…”
“??”
“내가 깨닫게 만들어 주지!”
그녀는 놈을 제압할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그녀는는 놈이 황당해 하는 틈을 타 몸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마나를 전부 흩어버렸다.
“무, 무슨!!”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눈앞에 있었던 그녀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놈은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신이 되지 않은 그는, 단순히 힘만 센 마족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연 그 자체에 녹아든 정령의 기운을 찾아낼 수 없었다.
즉, 놈은 지금부터 인기척이 전혀 없는 투명인간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셈이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령왕이 왜 굳이 계약자를 만드는 건지 알아? 그들의 마나를 이용하지 않으면 중간계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야. 정말 단지 그것뿐이지. 즉, 지금 이 대로도 나는 너와 싸우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소리야. 하지만 넌 곤란할걸? 이 상태에선 네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거든. 이 차원을 소멸하지 않는 한 말이지.”
“무, 무슨!! 크윽!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미 완벽한 악신이나 다름없는!!”
“하하하. 그렇겠지. 어쨌든 지금으로선 아주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이런 기회도 가져볼 수 있으니 말
이야. 악신인지 뭔지 몰라도, 너는 각성할 장소를 잘못 선택했어. 왜인지 알아?”
즐겁다는 듯이 웃으면서 묻는 그녀는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엘뤼엔이 다치니 정령왕의 본능이라도 나타나는 건가? 그리고 그녀는- 전대마왕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크아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세계거든.”
그녀는 이성을 잃은 것만 같았다. 급하게 트로웰이 데리고 와 싸움은 멈췄지만 사고방식은 그대로 인듯 했다.
그녀는 곧장 엘뤼엔에 대해 물었고, 그녀의 앞에서만 친절해지는 트로웰은 이번에도 상냥하게 얘기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솟아나는 불만에 투덜거렸다.
“쳇. 엘뤼엔 얘기가 나오니까 단번에 얼굴이 펴지는 군.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이 뭐가 좋다고…”
“남의 아버질 함부로 욕하지 마. 죽인다.”
“호오~ 한판 붙자고? 좋지~ 단, 난 아까 그놈처럼 쉽게 다루진 못할 거다.”
“라피스님!! 그, 그게 무슨!”
데르온이 창백한 얼굴로 기겁을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내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다른 일행들은 나를 만류했다.
“안 그래도 예민하신 분을 더 자극하시면 어쩝니까! 정말로 돌아가시고 싶어서 그럽니까?”
“죽으려면 은인이나 죽어! 대부까지 괴롭히지 말고!”
“이렇게 무모할 줄이야. 역시 드래곤은 어쩔 수 없군요.”
“으득! 이것들이…”
하나같이 나만을 만류하자 왠지 화가 나 주먹을 떨었다. 그녀는 뭐가 웃긴지 곧이어 웃음을터뜨렸다.
“풋- 하하하하. 너도 어지간히 인지도가 낮구나.”
“시끄러! 이놈들이 눈이 삔 거라고!”
“흐응. 맨날 유치찬란한 일만 벌이고 다니니까 그렇지. 그러게 누가 덤비래?”
“하! 먼저 시비건 쪽이 누구더라?”
“응? 아아, 죽인다고 한건 내가 먼저 였나…윽. 왜 그런 말을 했지? 맞다! 네가 엘뤼엔을 욕했기 때문이잖아! 이 바보 도마뱀!!”
‘드디어 제정신이 됬군.’
나는 다시 샘솟는 흥미에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호오, 이제 좀 제정신이 드나보지?”
“응? 뭐가?”
“눈빛은 여전히 맛이 갔는데 말투는 그나마 돌아왔군. 너 지금 누구라도 하나 걸리면 작살낼 것 같은 얼굴인건 아냐?”
“내가?”
뜬금없는 말에 황당해진 것인지 그녀는 황급히 수경을 만들어 얼굴을 비춰보았다. 얼굴을 보던 그녀는 곧이어 말했다.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그 말 진심이냐?”
“왜? 괜찮지 않아? 남자다워 보이기도 하고.”
“……”
그러자 일행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순수했던 엘을 돌려달래나 뭐래나. 킥킥, 그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이걸 소심하다고 해야 하나,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그들의 모습에 그녀는 급하게 화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아까는 왜 날 말린 거야, 트로웰? 녀석이 각성하는 것을 노리다니, 난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아, 그건 말이지. 마왕…아참, 이젠 마왕이 아니지? 그녀석의 이름이 뭐더라?”
“카류드리안, 줄여서 카류안이라고 합니다. 그가 왕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이름이죠.”
데르온의 대답에 트로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설명을 이었다. 평소에도 저렇게 친절하면 좀 좋아.
“그래. 그 카류안이라는 녀석은 이미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상태라서 그런 거야. 팔이 잘리고 다리가 떨어져도 조금 있으면 금방 재생되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재생되면 다시 베어버리면 그만이잖아.”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언제까지? 엘, 네가 소멸하는 순간에도 녀석은 살아있을 텐데? 우리 정령왕들이 세대교체를 수 십 번 반복하면서 의무처럼 놈의 육체를 지키고 베어야 할까?”
“…그건…”
“게다가 놈이 완전히 각성하기 까지 필요한 아이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혹시라도 방심한 사이 그가 도망쳐서 멋대로 각성을 해버린다면, 그땐 정말 대안이 없는 거야. 신계에서는 그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기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지금 각성해 버린다면 그것도 의미가…”
“그건 틀려. 지금은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상황이잖아. 잊었어, 엘? 악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야.”
“!!”
그때서야 그녀는 트로웰이 말하는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각성하는 순간에 생기는 공격할 수 있는 틈!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일부러 악신 카류안을 놓아 준 것이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급신의 희생. 트로웰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건 상황을 빨리 파악하지 못한 신들의 책임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두고두고 후환을 만드느니 차라리 희생자를 결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놈에게 재물로 바쳐질 아이들은 안됐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주어지겠지.”
“그럼 희생되는 신은…”
“으음. 명계의 상급신으로 정해졌다는군. 그러니까 엘의 걱정처럼 엘뤼엔이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
잠시 아무말도 안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중간에…자청하는 신이 나온다면 바뀌겠지?”
“그거야…”
“엘뤼엔이 자원할 가능성은? 아까 카노스가 와서 데려갔다고 했지? 스스로 신계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 생각이 맞아?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는다면 소멸하게 될 텐데…그렇게 되면 엘뤼엔은 스스로 희생하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이 너무 지나쳐, 엘.”
트로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때문이야…”
“무슨 소리야, 엘. 그게 왜 네 탓이야?”
“하지만 날 보호하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엘뤼엔이 그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쳇. 엘퀴네스 화 부작용인가? 저리 한심해 지다니.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뭔 헛소리야? 놈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네가 그렇게 되었다고.”
“차라리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나아. 왜 하필 엘뤼엔이…”
“그야 놈이 네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잖아.”
내 대답에 그녀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은 꼭…엘뤼엔이 아니라도 누구나 그랬을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 말이 맞는데? 실제로 그때 너한테 달려가던 녀석은 엘뤼엔만이 아니었다고. 아스와 데르온 녀석도 달려가던 중이었지.”
“흐음. 넌?”
“나야 뭐….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보자. 다친 사람이 엘뤼엔이 아니라 나였다고 해도, 넌 아까처럼 분노해서 마족 녀석과 싸웠을까?”
뜬금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내겐 중요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생긋 미소 즈이며, 한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좋아, 다음에도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너 대신 죽어주지.”
“윽! 어린애 취급하지 마! 그런 약속 따윈 하나도 안 반갑다고! 그리고 너! 지금 그런 말 한다는 건 엘뤼엔이 다쳤을 땐 꼼짝도 안했단 소리잖아!”
“그래서 다음번엔 내가 죽겠다고 하잖냐.”
“웃기지마! 넌 단순히 내가 엘뤼엔 때문에 화난 게 부러워서 그런 거잖아! 제발 이상한 것 가지고 경쟁 좀 하지 말라고! 목숨이 무슨 장난 인줄 알아?”
버럭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그래, 이게 진심인지 아닌지 나중에 그녀도 알게되겠지.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니까.
그때였다. 나와 그녀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스모델이 입을 연것은.
“아아, 그렇구나. 은인은…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게 아니라, 본인만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스?”
“으음. 그게… 난 지금까지 은인이 유희를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위급한 상황에도 여유를 부리는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은인은 그냥 재미있었던 거야. 갑자기 성격이 변해버린 대부를 관찰하는 일이.”
-그답은 아쉽게도 오답이었지만 말이다.
“!!”
“맞아.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버려도 좋을 정도로 단순무식한 놈이지. 하여튼 겉멋만 잔뜩 든 바보라니까.”
“트로웰…”
마지막으로 하는 트로웰의 말에 불쾌해졌다.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나에게는 정말 그게 다였으니까. 대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물론, 살짝의 거짓을 보태서.
“재미없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랑 계약한건 행운이었어. 좀 귀찮긴 해도 네 옆에 있으면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즐거웠거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처음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무슨…”
“뭐, 어쨌든 난 네가 맘에 들었어. 하지만 그저 계약자나, 친구의 입장에선 독점하기 힘들다는 게 꽤 불쾌하긴 하군.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굳어진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번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나에게도 자리 하나가 필요하니까.
“아버지 자리는 이미 엘뤼엔놈이 꿰어 찼으니 별 수 없고…아, 그래! 연인은 어때? 원한다면 여자 모습으로 변해줄 수도 있는데.”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내 말에 그녀는 작게, 하지만 모두에게 들리기 충분한 정도로 말했다.
“제길. 언제 날 잡아서 저 놈 머릿속이나 해부해 버릴까.”
“쿠, 쿨럭. 에, 엘님. 아직 완전하게 원래대로 돌아오신 건 아니었군요.”
“응? 뭐가요?”
“음, 그러니까 방금 하신 말씀이라든가…”
“내가 한말이 뭐가 어때서? 아아, 걱정 마요. 해부한 다음엔 다시 고이 봉합할 테니까. 머리가 갈라진 시체라도 꿰매 놓으면 그리 보기에 나쁘진 않을 걸요.”
“허억. 저어…설마 전혀 자각이 없으신 건?”
“??”
“아, 아니 실례했습니다!!”
데르온은 그렇게 말하며 도망친다. 그녀의 의아한 시선이 데르온의 등뒤에 꽂힌다.
그걸 본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이중인격의 주인공..
“흐음. 말투나 행동은 예전 그대로인데, 사고방식이 좀 달라진 것 같군. 엘퀴네스 본래의 성격과 엘의 성격이 섞인 건가. 게다가 본인은 그 점에 대한 자각도 없으니… 뭐, 아무렴 어때. 귀여우면 그만이지. 후후훗.”
“……”
트로웰의 말에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악신 놈이 각성에 돌입하기 위해 성안에 틀어박힌 이후, 나는 최대한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이봐, 다시 생각해 보라고. 연인이 뭐가 어때서? 적당히 독점하기 편하고, 유대감을 느끼기에 그보다 더 좋은 사이가 어디에 있어?”
“…난 분명히 싫다고 했다.”
“글쎄, 싫은 이유를 대보라니까? 원한다면 여자로 폴리모프도 해준다잖아. 아! 혹시 네가 여자역할을 하고 싶은 거야? 나야 오히려 환영이지만.”
“이익! 나가 죽어!!”
“앗! 대부, 안돼!”
“엘님, 제발 진정을!!”
이번에도 한바탕 난리를 피운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물었다.
“하아. 대체 네놈이 생각하는 연인의 정의가 뭐냐? 친구보다 소중한 수준?”
“가족과 친구와는 또 다른 개념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리고 유일하게 상대방을 독점해도 당연할 권리를 가진 존재, 아닌가?”
“그리고 너는 그 ‘독점할 권리’가 마음에 들어서 연인하자고 하는 거고?”
끄덕. 뭐, 그것도 포함되긴 하니까.
“당장 이 자리에서 그나마 있던 계약자의 입장까지 파기당하고 싶냐? 시끄러우니까 이사나나 불러. 진작 불렀어야 했는데 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통에 늦어졌잖아!”
“흐음. 난처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빨라진 건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인가. 그렇담 별로 반갑지 않은걸.”
“라.피.스.라.즐.리!!”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쪼그만 주제에 성질은…”
나는 투덜거리며 걸었다. 쳇, 연인하면 뭐가 어때서.
이상황은 이사나 일행을 만나고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뭘? 미리 말해두지만, 연인이 되어달라는 말은 진담이었다고. 남의 진심을 무시하다니, 그러다 벌받는다, 너?"
..남의 진심을 무시하였다.
며칠동안은 꽤나 평온하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항상 고조되어있었다. 본능적으로 악신이 나타나기까지 얼마 않남은 것을 깨달았으리라. 그리고, 결국.
-악신과의 결전의 날이 되었다.
수많은 싸움들, 격투들이 있었다. 2번이나 악신의 공격을 받은 그녀는 또다시 다가오는 악신의 손톱을 피하지못하였다.
<크하하하! 갈가리 찢어주마!!>
"엘! 피해!!"
그녀는 공격을 피할힘조차 남아있지 않은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감는것이 느껴졌다. 저 손톱에 찢겼다가는 정령왕이어도 죽을 수 밖에 없을것이다.
'그건, 싫어.'
그때 문득, 내가 그녀에게 약속한 것이 기억났다. 명분도 있겠다, 나는 날위해서 그녀의 몸앞에 내 몸을 내던졌다.
"라···피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쩍, 그녀몰래 상처부위를 바라보았다. 젠장, 하필이면 그곳에 박히다니.
고통이 몸안을 잠식하였다. 청아한 물의 기운이 나의 몸을 치료해주는듯 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아마 부상 위치가 위치다 보니 치료는 더뎌졌다. 아프다. 아프다. 그러나 안심이 되었다.
일순,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것을 보았으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헉!!"
그녀가 숨을 들이쉬었다.
"아······"
악신이 나의 몸에 박힌 자신의 손톱을 빼내었다. 악신은 아쉬운듯한 표정으로 그녀와 자신의 손톱을 번갈아 응시하였다.
<크큭. 네놈도 꽤나 운이 좋구나. 벌써 두 번이나 다른 놈 때문에 목숨을 건지다니 말이다.>
악신의 말에 그녀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라피스! 라피스, 정신 차려봐! 라피스?"
<큭큭, 지금 그놈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이번에야 말로 네 차례다!>
악신이 다시한번 그녀에게 손톱을 겨누었다. 그때, 드디어 그가 우리앞을 막아섰다.
'왜 이렇게 늦은거야?'
"어이, 형씨. 어린애는 그만 데리고 놀고, 이젠 나랑 한 판 해보지?"
마신 카노스. 그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특유의 장난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악신의 눈빛이 흥미롭게 변하였다.
<네놈은 걸마···마신 카노스인가?>
"···'네놈?' 호오, 상당히 건방지군. 한 때 너를 창조했던 신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지? 아무튼 이래서 시
건방진 놈들이 싫다니까."
<크아악!!- 감히 내게!!>
그의 말에 그녀에게로 향했던 악신의 시선이 멀어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라피스! 괜찮아? 너 무슨 짓 한 거야! 왜, 왜 끼어들어서···상처는!! 상처는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그녀가 내게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괜찮다라, 상처를 묻는더라면 괜찮지 않다. 괜찮을수가 없다. 하지만.. 기분을 묻는거라면, 좋다 못해 날아갈것만 같다.
"아아···"
목소리는 멀쩡하게 나왔다. 고통으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 만큼은 조절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길게 하는것에 힘이 들었지만,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녀에게 걱정 끼치는 것이 싫었다.
"네가 보기엔···이게 괜찮아 보이냐?"
그래, 이런 어조라면 평소의 내가 낼수있는 반응이겠지.
그러자 그녀가 울컥해하며 소리쳤다.
"멍청한 자식! 그러게 누가 몸으로 막으래? 너 미쳤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죽으려고 작정했다..
"뭐야? 네가 꼼짝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처음부터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게 누군데 이래?"
"윽! 누가 널더러 보호해 달래? 까짓 거 그냥 맞고 정령계로 역소환 되면 그만이지!"
그녀가 역소환이 된다. 그 둘 중에서 고르라 한다면,
"그 역소환의 충격은 대체 누가 감당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저래 내가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나는 내가 감당하는 쪽을 택할것이다.
"몸을 뚫리는 것보다야 그게 백번 낫지!! 어디 봐봐, 일단 치료는 해야 할 것 아니야!"
치료라..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치료가 가능했다면, 그래서 그녀와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야,
"됐어. 이래뵈도 드래곤이라 이 정도 쯤엔 끄덕도 안한다고. 그보다 네 목이나 좀 치료해라.
시뻘겋게 피는 철철 흘려가지고 그게 뭐냐?"
드래곤이란 것을 포기할 수도 있을텐데. 정말로, 좋을덴데.
그녀는 되지도 않을 치유술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뭐, 뭐야. 너 지금 우는 거냐?"
그녀는 울필요가 없다.
"시끄러!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한심해서 그런 거야. 미련하게 벌써 두 번이나···흑, 왜 나를 자꾸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비참하게라.. 난 그저 그녀와의,
"얼씨구? 위험한 순간에 구해줘도 말이 많아요. 아무튼 난 약속 지켰다?"
약속. 그녀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뭐? 약속이라니?"
"이번엔 내 목숨을 걸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설마 벌써 까먹은 거냐?"
설마, 진짜 까먹었던 것은 아니겠지?
나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너···너 혹시 그 약속 때문에 뛰어든 거야?"
글쎄. 정말 약속 하나 때문일까?
"당연하지.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거든."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이익! 차라리 나가 죽엇!!"
너의 이런 모습을 보고싶어서 일지도...
"아얏!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투덜거렸다.
"구해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왜 화를 내는 거야? 쳇, 쳇. 수고한 보람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 수고 따윈 필요 없어! 한번 만 더 그딴 짓 했다간 다신 너 안볼 줄 알아! 계약도 파기야, 파기! 알았어?"
계약 파기라, 이제 할수도 없는걸?
"저건 툭하면 계약 파기래. 알았어, 알았다고! 어이,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지 않겠냐? 내 덕분에 산건 사실이잖아."
뭐,하지만 그래도 이 청명한 기운을 느끼면서 죽는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녀가 내 상처를 응시하더니 다시금 눈물을 터뜨렸다. 상황에 않맞는 기쁨이 몸 전체를 휩쓸었다.
"뭐야, 너 또 우는 거냐? 화냈다가, 울었다가···대체 감정의 기폭을 이해할 수가 없군. 말로는 뻔히 남자라고 우기면서 이럴 때 보면 영낙없는 계집애라니까."
"시끄러. 치료하는 데 말 시키지마. 열 받으면 다른 쪽에도 구멍을 내버리는 수가 있어."
"쳇, 살벌한 녀석. 아,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그녀에게 한번쯤 듣고 팠던 말이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아~ 그래, 고맙다, 고마워!! 이 말 한마디 들으려고 이 난리를 피웠냐? 넌 진짜 이해할 수 없는 도마뱀이야. 드래곤들은 전부 다 이래?"
전부다, 이럴것이다. '사심'이 섞여있다면 말이다.
"글쎄. 적어도 한번 약속을 정한 것은 지키려고 하는 편이지. 뭐. 어쨌든···
네가 날 위해 울고 있는걸 보는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닌 걸?"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쁘다.
"착각도 심하군. 누가 널 위해 울어?"
쳇, 한번쯤은 그렇다라고 해주면 더 좋인 텐데. 그나저나,
"큭큭. 아니라고 우겨도 상관없어. 그보다···치료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하지? 그냥 생 기운만 빼는 것 같은데."
"······"
나의 말에 그녀는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아까 처음 물의 기운도 내 몸을 치유하지 못하였는데 그녀가 할 수 있을리 없다. 물은 곧, 그녀니까.
"대부! 다치지 않았어? 은인은?"
멀리서부터 아스모델과 일행들이 뛰어왔다. 이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놀란표정을 짓고, 나에 이르러서는 표정을 굳혀버렸다.
"너희들은 이 녀석이 갑자기 끼어들 때 뭘 한 거야? 말리지 않고."
"그게···너무 빨라서 미처 말릴 틈이 없었어. 은인, 괜찮은 거야?"
아스모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을리 있나? 너무 당연한것을 묻는 모습에 무덤덤하게 말했다.
"꼬맹이. 네가 보기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아니, 무지 아파 보여."
"그럼 알면서 뭘 물어? 지금 나 놀리는 거냐?"
"그런 건 아닌데···얼굴이 너무 멀쩡해 보여서. 그거 진짜 다친 거 맞아? 그냥 다친 척 하는 거 아니지?"
"쳇, 엘뤼엔 때는 암말도 안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차별하기냐?"
"뭐야?"
다친척이라니. 그 부위를 다친척 할 수 있었나? 얼굴이 멀쩡한것은 이제,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너 같으면 감각이 사라져버렸는데 아프겠니?
"시끄러, 라피스. 걱정해서 하는 말에 일일이 토 달지마. 그러게 누가 끼어들래? 다 자업자득이라고."
그녀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아버지한테도 나중에 뭐라도 할 거야. 부탁이니까 둘 다 제발 날 어린애 취급 좀 하지 마.
이런 식으로 대신해서 다쳐줘 봤자 하나도 고맙지 않다고."
어린애 취급이라? 내가 너를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는건가? 내가?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최대한 펑소같은 어투로 말하였다.
"네가 제대로 싸우면 이런 일도 없지."
"아아, 그러셔? 그래, 다 내 잘못이고 내 탓이다. 아무튼 넌 여기서 꼼짝 말고 얌전히 있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누구든 위험한 짓 하면 정말 용서 안 할 거야.알았어?"
그녀의 말에 거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데르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골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였다.
"데르온, 내 말 안 들려요?"
"···네, 네? 아··· 무, 무슨 말 하셨습니까, 엘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혹시 뭐 문제라도 있어요?"
그녀의 말에 데르온은 지나치게 당황해하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채고만 건가? 안들키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우물쭈물하던 데르온은 그녀의 재촉어린 시선에 입을 열었다.
"저, 저기···라피스님의 상처 말입니다. 치료는 안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어쩐 일인지 내 치유술이 전혀 안 통하는 상태거든요. 일
단 카노스한테 가서 방법을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신께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신이니까 뭔가 대처법을 알고 있지 않겠어요?"
"그거라면 됐어. 못 견딜 정도도 아니고, 이제 지혈도 된 것 같으니까."
"어? 정말?"
나의 말에 그녀가 상처를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이상 데르온이 말하는것을 냅두면 않된다.
"휴, 다행이다. 난 이러다 네가 출혈과다로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상하네. 어떻게 지혈이 된 거지?"
"드래곤들의 회복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 정도야 본체로 돌아가면 금방 나아."
"하지만 내 치유술이 안 먹힐 정도였는데···"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흥. 네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니야? 악신 때문에 자연계의 흐름에 변동이 생겨서 그 영향을 받는다든가."
"그, 그런가?"
내가 생각해도 납득할만한 말이었기에 그녀는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중에서도 데르온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망설이던 얼굴로 나를 응시한던 데르온은 잠시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라피스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저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는 데요."
"에? 왜요, 데르온? 뭔가 짚이는 일이라도 있어요?"
"네, 엘님. 저기···그러니까···지금 라피스님이 부상을 입으신 부위가 아무래도···"
"부위? 배 말이에요?"
인상이 찌푸려진다. 정말 눈치챈거였다. 나는 낮게 협박조로 말했다.
"쓸데없는 말 하면 죽인다."
어차피 몇시간 못 살 목숨, 걱정끼치고 싶지 않았다.
"쓰, 쓸데없다니요, 라피스님! 아무래도 그건 드래곤들에게···"
"닥쳐! 정말 말이 많은 녀석이군. 넌 네 주군인지 대장인지 하는 꼬맹이만 챙기면 되는 거야. 그 이상의
참견은 이쪽에서 사양이다.
어디 죽고 싶으면 거기서 한마디라도 더 해보시지?"
"윽···죄, 죄송합니다."
데르온이 포기하자 다 끝난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남아있었다.
"무슨 말이야, 라피스? 드래곤이 어쨌다고?"
"그냥 헛소리야. 별 거 아니니까 넌 신경 끄고 네 동료들이나 도와."
"별 거 아닌데 왜 데르온을 협박해?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일인 거 맞지? 혹시 다친 곳과 관계있는 거야?
그녀도 가끔씩은 예리했다. 왜 하필이면 그게 지금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참, 답답하네. 지금 멀쩡한 거 보면 몰라?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아까 내가 도와줬다고 해도 거의 역소환 되기 직전 까지 갔었잖아. 한 순간 움직이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아니, 나야 뭐···잠깐! 너 지금 말 돌리는 거지? 자꾸 그런 식으로 대답을···"
그녀의 추궁은 피하기 어려웠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놀지 말고 당장 빨리 와서 도우지 못해!"
"쳇, 할 수 없지. 너, 지금은 급하니까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아!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알았어?"
"그러던지."
다음이란게 있다면 말이야.
그녀는 이번에도 부상을 당했다. 스스로의 몸을 내던져 악신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바보같은 신들때문에 아무소용이 없었다.
그때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담는 마신의 모습이 보이자 나든 부상도 생각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남의 것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죽기 전까지만이라도 내껏이라면.
"라피스!!"
"그게···방금 전에 일어난 폭발 때문에 엘의 동료인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갔는데, 굳이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더군요.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미네르바를 추궁하여 대답을 듣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 시벨리우스!! 내가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라피스 너는 부상자인 주제에 뭘 하겠다고 여기에 오는 거야?"
시벨리우스와 달리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끄러. 멀리서 싸움 하는 것만 보자니 지루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아, 염려놔.
마족 꼬맹이랑 보호자 녀석은 따라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충고해주고 왔으니까."
"···지금 상태에선 너보다 차라리 아스가 더 도움이 되겠다. 너 지금 다친 것에 대한 자각을 전혀 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글쎄."
"글쎄라니! 정말 죽고 싶어서 작정했어? 그러다 상처가 악화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악화라,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바로 악신에 공격이 이어졌다. 무언가 깨달은 그녀의 말에 마신은 자신의 몸을 받쳐 악신의 몸에 피를 뿌렸다.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저 폭발을 그대로 맞았다가는, 그녀는 역소환될것이 분명했다.
"엘! 고개 숙여!"
"큭, 젠장. 역시 이대로는 힘든가?"
"라피스?"
"넌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
인간의 모습으로 막기는 힘들었다. 할수없이 본체로 돌아가야만 했다.
<삐이이이이익!>
"라피스, 지금 뭘 하는 거야? 난 괜찮으니까 너나 어서 피해!"
<시끄러! 입 다물어!>
날개죽지로 그녀에게 날아오는 폭발의 잔해를 막았다. 어차피 마지막인거, 여기서 몸을 사려도 죽는다. 때문에 나는 거침없었다.
'젠장!'
악화, 가능한것이었다. 멈춘 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정신을 집중해 다행히 그녀를 보호하는것은 성공하였으나, 곧바로 쓰러질수밖에 없었다.
웅웅 거리는 목소리 중에서도 그녀의 목소리 만큼은 똑바르게 들렸다. 서서히 어둠이 잠식했다. 드래곤하트가 파괴되었으니 이정도 버틴것도 용하다. 아마, 그녀도 지금쯤이면 설명을 들었으리라. 그리고 분명 슬퍼해주리라.
피식, 웃기지 않는 상황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시야가 가려졌다. 그때였다.
'푸른색의 보석...'
토파즈. 색이 라피스 라즐리, 자신의 이름과 같아 한번 본 보석 중 하나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석, 누구껀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토파즈였다.
'저게 왜...'
의아함은 품자마자 해결이 되었다. 여기는 신이 많이 있었다. 그 신이 가지고 있다가 떨어뜨렸을수도 있는것이다. 문득, 언젠가 메세테리우스, 형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 토파즈라고 아냐?
-여러가지 색이 있는 보석, 아냐?
-응, 그런데 그 보석의 상징 알아?
-아니. 내가 어떻게 알아.
-그 보석의 상징은 우정, 인내, 결백.
-우정, 인내, 결백?
-응. 나중에 정말 최고의 친구를 두었거나, 기다려 달라고 하고싶을때 줘.
-그럴까?
아마 이게 형과 한 가장 평화로운 대화였을것이다.
'우정,인내,결백.
그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부디 후에라도 그녀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속으로 말했다.
'연인으로 본것은 진심이었어. 그리고...'
힐끗, 토파즈를 한번 더 바라보았다.
'부디, 인내심있게 나를 기다려주길.'
-다시 지금처럼 청아함을 지닌 너를 만날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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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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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버루아나 작성시간 13.10.30 아아아아아 라피버전..너무좋아요! 진짜두큰두큰! 역시 자기도 자각못하게 엘을 좋아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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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에르스티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10.30 두근두근이라..아하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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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르비에 작성시간 13.10.30 라피스가....엘을....빨리 4000년전 시점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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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에르스티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10.31 4,4000년전은 계획에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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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W]애눌 작성시간 14.01.12 검사 완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