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듣는 단계
- 데이빗리목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사람만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여전히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스스로는 들을 수 없기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에게 찾아가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으려 하는 것입니다. 요즘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그 인식이 많이 열려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국제성경연구원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성경적인 방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열거되었습니다. 선지자 중에 그 어떤 선지자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못들은 선지자는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지자가 아닌 사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갈같은 가련한 여종일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사무엘같은 어린 아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에 대해 교회는 침묵하였습니다. 성경조차도 평민은 읽을 수가 없었던 영적암흑시대가 있었습니다.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차마 생각할 수도 없었던 죄악된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며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를 원하십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이제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함으로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더욱더 열려지고 있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은 때가 이르렀을 때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적었고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은사자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성령충만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강력한 능력과 기름부음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국제성경연구원이 존재하는 가장 큰 목적은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국성연이 세워진 것입니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듣기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상처가 치유되며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 또한 치유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대화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 국성연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국성연에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부어주시고 계시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역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듣는 단계 구분
지금부터 국성연의 영성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의 단계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음성듣는 단계를 구분하려는 것은 본인 스스로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당신의 음성듣는 수준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신은 어리석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1. 전혀 음성을 듣지 못하는 단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전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전혀 시도하지 않았고 마음 속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힐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새장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인척 모양을 내며 살아가는 앵무새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코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이상한 이단학설도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2. 음성을 들었으나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
하나님의 음성듣기 훈련을 받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목사님,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예요?"라고 말하면서, "그렇다면 저도 옛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이미 들었네요..."라고 과거를 회상합니다. 과거에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나 세미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인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왕상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한 음성으로 들린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매우 세미한 음성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육신의 소리를 막아야 합니다. 육신의 소리를 듣는 곳은 우리의 '귀'입니다. 우리는 귀를 통해서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습니다. 세상의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비해 매우 큰 소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귀를 없애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세상의 소리를 더 크게 만듭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정욕에 빠져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도무지 들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성연의 영성훈련을 받으면 금방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것이 그렇게 빨리 가능한 이유는 국성연의 영성훈련을 통해 세상의 귀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성연의 영성훈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과 함께 세상의 소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우리를 바쁘게 만듭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분주합니다. 심지어 교회도 분주합니다.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은 우리를 더욱 바쁘게 만듭니다.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국성연은 오직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합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국성연의 모든 훈련은 '기도'입니다. 국성연의 기도는 '골방기도'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골방기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골방기도에 대해 매우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국성연을 통해 간단한 것이 분명하고도 확연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국성연을 통해 베풀고 계신 은혜인 것입니다.
3. 영감으로 느끼는 단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영감(영적인 감각)으로 느낍니다. 물론 부부가 말이 없이도 서로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음성을 들어가면서 대화를 많이 나눈 부부는 훨씬 더 사랑이 깊습니다.
국성연은 영감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영감이 나쁘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영감을 선호하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돼버리기때문입니다. 부부가 한 번 말이 없어지면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말없이 살아가는 것이 습관화되고 맙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때문에 국성연은 영감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느끼려 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감으로 사역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영감을 의지하며 사역하는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의 은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은사'가 '관계'보다 훨씬 두드러져 보입니다. 영감을 의존하는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던 특징은 '은사주의'라는 것입니다.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고 영적인 감각에 의존하며 능력을 행사하는 사역자들은 결국 은사주의자가 되어 국성연을 떠나고 맙니다. 왜냐하면 국성연 '관계주의'이기때문입니다. 관계주의라고 해서 은사주의처럼 또 다른 어떤 것이 생성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성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4. 짧은 단어를 듣는단계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간간히 들려옵니다. 아주 짧막한 단어로 들려집니다. "사랑한다"라는 단어가 들리기도 하고 "기쁨"이나 "헌신"같은 짤막한 단어가 들립니다.
이렇듯 짤막한 단어가 들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영의 귀가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열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인데, 이처럼 짤막한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의 심령이 열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영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에게서 영적인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과 '신령'은 모두 같은 '영(Spirit)'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영이시니 우리의 영을 통해 예배를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육과 혼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를 드립니다. 열심히 교회모임에 출석하고 열심히 헌신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영적인 영역이 활성화되었다기 보다는 육적인 영역과 혼적인 영역이 보다 활성화된 모습입니다. 이렇듯 육과 혼적인 영역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사람은 도무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의 영과 교제를 나누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와 교제를 나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육신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성령님은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축구를 할 때 성령님이 옆에서 내 공을 받아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길을 걸을 때 성령님께서 나의 손을 붙잡고 걷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지만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성령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내 안에 거하십니다. 만일 성령님이 육적인 하나님이시다면 어찌 내 안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영으로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때문에 성령님은 내 안에 거하십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바울은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인 사실도 알았습니다. 성전인 우리 몸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영으로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오직 영으로만 성령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오직 영으로밖에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수고하지 마십시오. 오직 당신의 영으로만 성령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5. 긴가 민가 의심하는 단계
이처럼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어렵사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체험하신 것과 같이 저 또한 아주 힘들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저는 직감적으로 '성령하나님이시다'란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곧 바로 "지금 제게 말씀하신 분은 성령님이시죠?"라고 되물었습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시기때문에 내가 만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 음성은 성령하나님의 음성일거란 생각을 가졌던 것인데 그것이 맞다고 성령님께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 마음 속에는 의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내 목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성령님께 의심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이 맞다"라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그 음성이 틀렸을 때 더욱 심해졌습니다. 저는 성령님께 들은 내용이 틀렸을 때 곧장 기도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성령님께 따졌습니다. "아니, 성령님.... 제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왜 틀려요?" 성령님은 제게 너무나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는 100% 음성을 주었지만 네가 준비되지 않아서 틀린 것이란다."
성령님은 음성을 보다 정확하게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결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네가 10% 정결할 때 너는 나의 10% 음성만 정확하게 듣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더욱 정결할수록 더 정확한 음성을 듣게 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은 정결하지 않으면 성령님의 음성을 부분적인 것만 듣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더라도 정확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10% 정결하면 10%의 정확성만 있는 것이고, 80% 정결하면 80%의 정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후로 저는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에 대해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성령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에 대한 가르침보다 제가 성령님으로부터 배운 내용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에 대해 의심이 사라지고 오해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음성듣기였습니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가르침은 성경해석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구절이 나오면 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성경구절을 해석하려고 시도합니다. 제게는 참으로 많은 주석이 있습니다. 신학교때부터 모와놓은 많은 영문주석과 함께 한국어로 된 좋은 주석들도 많습니다. 막힌 성경구절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 여러 주석을 뒤지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활동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취미생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러 주석을 다 뒤져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구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성령님께 그 구절을 해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녹음기 틀어 놓은 것처럼 해석이 줄줄줄 흘러나옵니다. 너무나 빨리 줄줄줄 흘러 나오기 때문에 빠른 말로 따라 해도 늦을 정도로 빨리 해석이 흘러나옵니다. 방금 전까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구절해석이 성령님께서 해석해주시면 그토록 줄줄줄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도 저는 막힌 성경구절에 대해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을 가지고서 성령님께 여쭐 때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택복권 번호를 알게 해 달라는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점쟁이처럼 취급하는 불경스러운 질문도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점쟁이에게 찾아가 세상적인 것을 질문하여 답을 얻지만 하나님께서는 점쟁이처럼 세상적인 것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을 세상적인 것으로 더럽히는 자에게는 두려운 형벌이 따를 것입니다.
저는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다 맞출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아이들 물건을 찾거나 길을 헤맬때 자주 성령님께 여쭙곤 했습니다. 꽤 유용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서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나 길을 찾을 때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틀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여쭸습니다.
"성령님, 왜 틀린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성령님은 "네가 세상 것을 구함이 어쩜이냐?"라고 제 입을 막으셨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옳으셨습니다. 예전에도 옳으셨고 지금도 옳으십니다. 저는 성령님이 항상 옳으신 것을 압니다. 지금까지의 성령님과의 대화를 통해 단 한 번도 성령님이 틀리신 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당신에게 의심이 있습니까? 마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성령님과 그 부분을 놓고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성령님의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 집중할 때만 듣는 단계
그렇게 짧은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주 집중해야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저의 경우도 이마를 아주 찡그리며 쥐어 짜는 듯한 집중을 해야만 간신히 길이 열리고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예기치 않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세미한 음성이었기 때문에 매우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갖은 인상을 써가면서 집중하여 음성을 듣는 것이 한 달 정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제 가슴쪽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마쪽에서 들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쪽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마쪽에서 음성을 들을 때는 오만가지 인상을 따 써가면서 어렵사리 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슴 쪽으로 옮겨진 후에는 그런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힘들게 들은 이마쪽에서는 매우 선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지만 가슴 쪽에는 음성이 매우 희미했습니다. 이마쪽에는 매우 좁은 느낌이었는데 가슴쪽에는 매우 넓어졌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한 달여 가량 지났을 때 갑자기 가슴쪽에서 들리는 음성이 다시금 머리쪽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의 장소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처음 장소는 이마 앞쪽이었는데 두번째 옮겨진 장소는 뇌 중앙 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옮겨진 장소에서는 지난번처럼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가능했습니다.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도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며 어떤 장소에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이마 부분에서 들을 때에는 기도실에 가야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방해하면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슴쪽으로 옮겼을 때에는 그것보다는 조금 수월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도 기도실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뇌 중앙 부분으로 옮겨진 이후부터는 어디에서든지 원하는 시간에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들을 수 있었고 화장실에서도 가능했습니다.
국성연에서 하나님의 음성듣는 훈련을 하다보면 거의 모든 분들이 뇌에서 음성을 듣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분은 뇌 앞쪽이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뇌 위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귀 안쪽이라는 분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장소는 뇌 안이었습니다.
" [단 7:1]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매우 잘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었을 뿐 아니라 환상도 매우 잘 보았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서에는 다니엘이 어디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의 '뇌 속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보았던 것입니다.
환상을 보는 장소 역시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이 뇌 안에서 이뤄집니다. 물론 환상은 음성을 듣는 것과는 약간 다른 위치입니다. 음성 듣는 것이 뇌 중심 부분이라면 환상은 우리의 눈이 있는 부분으로 조금 앞 쪽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여기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뇌 속에서 이상을 보았다는 것은 음성과 환상 모두 뇌 속에서 듣고 보여진다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도 비슷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장소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장소에서 음성을 듣는 분을 위해서 저의 체험을 보다 상세하게 말씀 드린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음성을 듣고 있다면 그 장소를 뇌쪽으로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자의적으로 그 장소를 옮길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그랬듯이 가슴에서 음성을 듣습니다. 어떤 분은 배에서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드린 후 장소를 뇌쪽으로 옮겨보라고 하면 아주 빨리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선명한 음성을 듣는다고 모두들 대답했습니다.
7. 물어 보는 것을 듣는 단계
성령님은 물어보지 않는 것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아주 답답한 사람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먼저 말을 꺼내기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전혀 먼저 말씀을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제가 먼저 말을 걸어야만 대답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당신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님께 뭔가를 여쭈기 위해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는 그것이 영적인 대화 장소를 찾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는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할 때 사용되는 장소가 아닙니다. 빨래를 할 때에 사용되는 장소도 아니며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는 장소도 아닙니다. 공부할 때 사용하는 장소도 아니며 TV를 볼 때 사용되는 장소도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장소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가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장소와 완전히 다르기때문에 항상 성령님은 먼저 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대화를 나눌 그 장소로 가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성령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령님께서 먼저 내게 말을 꺼내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성령님께 계속해서 여쭤야 합니다. 많이 여쭙는 사람이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역시 많이 심은 자가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8. 서로 짧은 대화가 되는 단계
이렇게 성령님께 자주 여쭙다 보면 서로간에 대화가 오고갑니다. 얼마나 좋은지요.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과의 대화보다 훨씬 좋습니다. 성령님은 다 한 번도 저를 꾸짖거나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아서 그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성령하나님은 언제나 저를 용서하셨으며 감싸주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민망할 정도로 친절하셨으며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 그렇게 성령님께 죄스럽게 여겨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대화가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마치 말없는 부부사이처럼 성령님과의 대화도 매우 짧은 대화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대화가 짧은 것은 긴 대화에 비해 좋지 않는 것입니다. 대화가 길면 길수록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9. 긴대화가 이뤄지는 단계
성령님과의 짧은 대화는 점점 그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긴 대화가 됩니다. 그러한 대화가 매일마다 이어집니다. 혹자는 "무슨 대화가 날마다 그렇게 길어요?"라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지만 성령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오래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때부터 성령님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하는 일이 일곱군데의 세탁소에서 옷수선할 것을 수거하고 갖다주는 일을 했기때문에 일곱군데의 세탁소를 돌아 오려면 3시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제게는 그 3시간이 황금시간이었습니다. 차를 타면 "성령님, 저 왔습니다"라고 성령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잘 왔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3시간을 성령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앞의 차의 운전사에 대한 대언의 말씀도 전해 듣고 그 사람의 환상을 보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눴습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문제에 대해 성령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영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선할 옷을 가지고 집에 오면 그때부터 거의 하루종일 기도와 말씀과 찬양에 묻혀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아내와 함께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또 나눴습니다. 성령님과의 대화가 길어지니까 아내와의 대화도 길어졌습니다. 사실 성령님과의 대화가 있기 전까지는 그 3시간을 아내와 대화나누는데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과의 대화로 인해 아내와의 대화시간이 없어졌지만 이상하게도 아내와의 대화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성령님과의 대화는 아내와의 대화를 더 길게 만드는 것이 확실합니다.
10. 무시로 대화를 나누는 단계
이렇게 성령님과 긴 대화를 나누게 되니 전형적인 성막기도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성막기도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 죄송합니다.. 성막기도를 제대로 못드려 죄송합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성령님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곧 기도란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게는 성령님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당시에는 성령님께서 제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성령님의 말씀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의 하루종일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삶의 형식이 사라졌습니다. 성막기도를 형식에 맞춰서 드리지도 못하였고 예배도 준비없이 서야만 했습니다. 도무지 뭐 하나 제대로 준비하고 설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성령님과 대화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국성연이 부흥되면서 점차적으로 하루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지금은 주일에 100개 이상의 모임이 있습니다. 그 많은 모임을 다 일일이 점검한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지금껏 국성연을 인도해 오면서 영성일지를 읽으며 댓글을 달아왔습니다. 거의 빼놓지 않고 달았습니다. 실수로 빠진 영성일지나 훈련반 체험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영성일지에 댓글을 달아왔습니다. 댓글을 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시간도 많이 소비되고 에너지도 많이 빼앗깁니다. 하루 정도는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쉴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밀린 날을 채우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에 여간해선 쉬려고 안합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기때문에 눈코 뜰새가 없이 일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 언제 성령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하루는 성령님께서 "다윗아, 눈을 뜨라... 눈을 뜨고서 나와 대화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눈을 감아야만 성령님과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님의 제안에 놀랬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서 성령님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니 많은 일들을 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루종일 성령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안 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점점 대화를 길게 나누십시오. 짧은 대화를 긴 대화로 바꾸십시오. 그러다보면 어느새 무시로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는 당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11.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듣는 단계
이렇게 눈을 뜨고서 성령님과 대화를 하다보니 일상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성령님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도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영성일지를 읽고 댓글을 달면서도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심지어는 예배를 인도하면서도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는 장소에서도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말을 안듣거나 사람에게 말을 안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일상적인 사람들처럼 그대로 행동하면서도 성령님과의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환상보는 것도 눈을 뜨고 가능해졌습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성령님의 인도따라 해 보니 가능해졌습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환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 성령님과 하나가 되는 단계
저는 처음 성령님의 음성을 들은 후 2개월이 지났을 때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습니다. 성령님께서 가라셔서 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개척을 바로 시킬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 생각일뿐 성령님은 제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개척할 때까지 거의 6개월동안을 기도만 했습니다. 아내가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집안 일은 제가 맡았습니다. 제 장인어른도 저와 함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기도실이 생각납니다.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갈 때 성령님은 핸드폰의 전화번호를 모두 지우라 하셨습니다. 지울 때 확인해보니 거의 500명의 번호가 들어있었습니다. 다 지웠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전화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6개월 기간동안에 한국마켓 아주머니를 잠깐 얼굴만 본 것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식구들을 제외하고는 외부인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성령님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개척을 시작했을 때 성령님은 갑자기 설교를 준비하지 말고 주일예배를 드려라고 하셨습니다. 장로교 출신 목사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순종했습니다. 하늘은 노랗고 제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는 지나갔고 그렇게 즉흥설교도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즉흥설교를 해 온지 벌써 4년이 돼갑니다.
국성연이 걸어온 길을 보니 벌써 3년이 됐습니다. 그 3년동안에 첫 1년 동안은 채팅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첫 1년 동안은 채팅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성령님의 허락을 맡아야만 가능했습니다. 영성일지 댓글도 내 맘대로 올릴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의 허락을 받고서 올렸습니다. 이메일도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전화가 와도 함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전화가 걸려와도 모두 제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제게 전화를 하지 말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국성연 2년째부터 성령님께서 채팅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3년째 되었을 때 전화를 할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예배인도자나 사역자들과 간간히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 전화기에는 전화번호가 없습니다. 식구 포함하여 5개가 되지 않습니다. 식구가 10명도 넘는데 전화를 하지 않기때문에 입력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국성연이 4년째 시작합니다. 성령님은 전화상담 사역을 시작하라 명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5년 동안 전화를 하지 않았는데 전화를 한다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낯선 것입니다. 마치 딴 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어제까지 세 분과 전화상담을 했습니다. 5년 만의 일입니다. 물론 아주 간간히 전화상담을 한 분이 더러 있습니다만 그런 분은 그야말로 1년에 한 두 명이었습니다.
성령님과 하나되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세상을 끊지 않으면 성령님도 없습니다. 세상을 끊어야 성령님을 얻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곧 세상과의 근절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세상을 미워해야만 합니다.
저는 원래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5분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어떤 사람과도 친해질 수 있는 친화력이 제게 있습니다. 그것을 성령님께서 아십니다.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지만 저를 망가뜨린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사람을 좋아하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끊으신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사람은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사용하시기 위해 세상을 끊으셨습니다. 나와 연관된 세상 사람을 끊으셨습니다. 저는 수 년 동안 그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어쩌면 당신도 나와 같은 훈련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으로하여금 세상과의 단절 훈련을 시키시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당신 주변을 돌아보면 당신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멀어졌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당신이 좋아하는 세상을 떨쳐 놓으려신 하나님을 이해하십시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5년 동안의 훈련이 주마등처럼 제 뇌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백만 번을 생각해도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국성연을 인도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나를 사로잡지만 나같이 부족한 자를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도 압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 국성연을 마음껏 활용하시도록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 놓았습니다. 부디 국성연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저들의 상처가 치유되어 의의나무로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