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이 구루라는 증거는 언제 어느
때고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심장을 정지시켰다가,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구루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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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는 요즈음 인도에 관한 자료들이
폭주하면서 '구루'란 단어를 아주 쉽게
접하고 별 뜻 없이 사용하고 있다.
정신적인 선생, 또는 스승님 정도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뜻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
모든 경전들은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세
단계로 읽혀지고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의식의 진보단계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하고
수용한다.
보통 알고 사용하는 것보다 구루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더 심오한 뜻이 있다.
인생에 있어서 선생은 여러 명일 수 있다.
그러나 진실한 구루는 단 한 명뿐이다.
이번의 일생에서 처음 궁극적인 해탈의
우주의식에 도달한 사람을 '싯다'(=통달자)라고
한다. 바로 앞의 전생이나 그전의 전생에서
궁극적 해탈에 도달하여 자기의 의지로
이 세상에 다시 온 사람을 '아바타라'(화신)라고 한다.
그가 이 세상에 다시 오는 이유는 오직
사랑과 자비심 때문이라고 한다(붓다도
신의 부탁을 받고 세상으로 다시 내려왔다).
아바타라의 잘 알려진 역사적인 예로는
고대 인도의 크리슈나, 붓다, 예수 그리스도,
아디 상카라차라, 현대에는 인도 켈커타의
라마크리슈나 등이 있다.
이러한 싯다와 아바타라들은 더 이상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신 한 영적인
상태를 '신의 아들'이라고 하고, 그의 육체적
특질을 말할 때는 '인간의 아들'이라고 한다.
'인간'이란 용어는 '영적인 존재'가 자연력에
지배받는 살과 뼈의 감옥 속에 속박되어
감금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죄목은 욕망이다. 그것을 초월한
존재는 더 이상 인간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신적인 존재이고, 영적인 존재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우리는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는 의미는 육체적 특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인
"영혼, 불성"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적인 모든 본성을 회복한
사람만이 구루라는 용어로 불릴만한
사람인 것이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전지전능하다. 그는 자기의 의지로
육체를 비물질화 시킬 수도 있고,
다시 물질화 시킬 수도 있다. 그는
하나의 또 다른 우주를 창조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만이 제자의 모든 과거,
모든 현재, 모든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어 실수 없이 제자를 자기와 동등한
영적인 단계로 인도할 수 있다.
경전에 보면, 그런 구루가 세상에 오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전반적인
인류의 수준을 들어올리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자기의 직접적인 제자를 자기와
같은 단계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붓다도 직접적인 열 명의 제자가 있었고,
예수도 직접적인 열두 제자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보를 앞당기는
비밀스런 테크닉이 전수된다.
그 축복으로 제자들은 순결한 영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붓다의 핵심적인
테크닉과 예수의 핵심적인 테크닉은
대중이 접하는 경전 속에는 비밀스럽게
감추어지고, 오직 직접 입과 입으로만
전수된다. 그것은 고결한 그 방식들을
어둠의 무지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납을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처럼
제자의 의식을 신의 의식으로 바꾸는
구루는 영적인 연금술사인 것이다.
한 분의 구루와 제자와의 그 관계는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하다고 한다. 그런 구루를
알아보는 제자는 축복 받은 자이다. 그런
구루는 제자에게서는 신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이는 바다를 다 건널 때까지는 배가
절대적인 기능을 갖고, 지구에서는 사실
태양 빛이 가장 중요한 것과 같다. 바다에서
배가 없으면 익사하고, 태양이 없으면 우리는
곧 죽는다. 구루는 그와 같다.
구루란 단어는 '어둠을 없애는 탈것'이라는
뜻이 있다. 결국 신의 항구에 도달하면
버릴 수 있지만 그전까지는 수행자가
절대적 복종으로 매달려야 하는 존재이다.
이를 보고 일부 수행자들은 "나 스스로
깨닫는 것인데 구루에게 의존한다"라고
인도의 요가행자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설익은 수행자이다.
현대인도의 위대한 성자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는 구루를 만나지 못하는
수행자는 궁극적 해탈에 도달 할 수 없다고
암시하고 있다. 궁극적인 삼매에 드는
마지막 차크라를 여는 것은 수행자
스스로 열 수 없다고 한다.
오직 먼저간 구루의 축복으로만이
궁극적 삼매에 들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신의 유희이다.
필자 역시 그렇고 보통 주변을 봐도
우리는 한참 수행의 행로를 걸어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실수 없이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나침판이
있어야 하듯이 영적인 행로에서
구루라는 나침판은 꼭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서두에서 말한 구루란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사람만이 불릴 수 있는
용어인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제자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받을 자격이 있고
, 그런 사람만이 제자를 무사히 신의
항구로 인도할 수 있다.
시간의 퇴색을 넘어서 영원히 -.
-----------옴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