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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 스와미 비베카난다 주석(1부)

작성자단다|작성시간05.06.01|조회수784 목록 댓글 1

 

첨부파일 요가수트라 -비베카난다 주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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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주석; 스와미 비베카난다



                                 제 1 장



집 중 : 그것의 영적인 사용들



 1. atha yoga-anusanam



집중을 설명 하겠다. 

 

2. yoas chitta-vritti-nirodhah 



요가는 다양한 형태들(vrittis)로 된 마음 질료(chitta)를 제어하는 것이다.



여기서 올바른 설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치타(chitta)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두 눈이 있다. 그러나 그 두 눈이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만약 머리 속에 있는 뇌 센터에서 눈을 제거한다 해도 눈은 여전히 온전한 망막을 가지고 존재하고, 또한 그들 위에 물체들의 영상이 비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눈은 시력의 기관이 아니라 단지 두 번째 도구 일뿐이다. 시력의 기관은 뇌의 신경센터 속에 있다. 두 눈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 사람은 두 눈을 뜨고 잠든다. 거기에 빛도 있고, 사물의 영상도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것이 필요하다- 즉 마음이 반드시 기관과 연결 되어 있어야 한다.



눈은 외부의 도구이다. 우리는 또한 뇌 센터와 마음의 기능도 필요하다. 거리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너는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너의 마음이 듣는 기관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먼저 도구가 있고, 그 다음 기관이 있고, 세 번째로 이들에게 마음이 연결 되어야 한다. 마음은 더욱더 안에서 인상을 잡는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기능인 붓디(buddhi)가 반응 하도록 제공한다. 이 반응과 함께 자아의식의 생각이 번쩍인다. 그 다음 행동과 반응의 이 혼합물은 참된 영혼 푸르샤(purusha)에게 제공된다. 누구나 이 혼합 속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기관들(인드리야스,indriyas),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마음(마나스), 결정하는 기능(붓디), 자아의식(아함카라) 등이 그룹을 이룬 형태를 안타카라나(antakarana, 내부의 도구)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러나 ‘치타’(chitta)라 부르는 ‘마음질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과정이다. 치타(마음질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물결들’을 브리티스(vrittis, 글자 뜻 그대로 ‘소용돌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생각인가? 인력(중력)이나 척력과 마찬가지로 생각은 하나의 힘이다. 자연 속에 있는 힘이 무한한 저장소로부터 ‘치타’라 불리는 도구는 어떤 것을 붙잡아 생각으로 그것을 흡수하고, 밖으로 보낸다. 힘은 음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공급된다. 그리고 음식에서 몸은 움직임 등의 힘을 얻는다. 그 외에 보다 순수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 부르는 것 속에 암시 되어 있다.



우리는 마음이 지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성을 갖춘 영혼이 마음 뒤에 있기 때문이다. 너는 지각력이 있는 존재이지만 마음은 네가 외부세계를 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 도구 일뿐이다. 이 책을 보자. 그것은 한 권의 책으로서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미지이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인식 할 수 없는 것은 마음에게 바람이 불도록 암시를 제공한다. 그리고 마음은 책의 형태로 반응을 내 보낸다. 이것은 연못 속에 돌을 던졌을 때 물은 물결의 형태로 그것에 저항을 하는 것과 같다. 실재 우주는 마음의 반응으로 생기는 것이다. 책의 형태, 또는 코끼리의 형태, 또는 인간의 형상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모든 것은 외부의 암시로부터 우리의 정신의 반응이다. “물질은 감각의 가능성 속에 영속한다”라고 존 스트아트 밀 은 말했다. 물질은 단지 외부의 암시이다.



굴의 예를 들어보자. 너는 어떻게 진주가 만들어지는지 알 것이다. 기생 균을 굴 껍질 안쪽에 심고 자극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 주위에 에나멜 칠을 하고 굴을 바다에 던진다. 그리고 이것은 진주를 만든다. 경험의 우주는 우리자신의 에나멜이다. 그리고 진짜 우주는 핵으로 공급된 기생 균 이다. 보통의 인간은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그는 기생 균을 던져 버리고 오직 그 자신의 에나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 ‘브리티스(생각의 물결, 소용돌이)’에 의해 의도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진짜 인간은 마음 뒤에 있다. 마음은 그의 손속에 있는 도구이다. 그의 지성은 마음을 통하여 스며 나온다. 그 도구가 지성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너의 마음이 후원 할 때 만이 가능하다. 인간이 그것을 포기할 때 그것은 조각나 떨어지고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너는 치타(마음 질료)에 의해 의도된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마음질료가 서로 충돌하여 외부세계의 원인이 될 때, 그 속에서 “파도와 물결”(브리티스)이 솟아 오른다. 이들 브리티스가 우리들의 우주이다.



호수의 바닥은 우리가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호수의 표면이 물결로 덮여있기 때문이다. 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고요할 때만이 우리는 바닥을 어렴풋이나마 보는 것이 가능하다. 물이 흙탕물이거나 또는 항상 동요한다면 바닥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물이 깨끗하고, 파도가 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닥을 볼 것이다. 호수의 바닥이 우리들 자신의 참된 진아 이다. 호수는 치타이고, 파도는 브리티스이다. 



그리고 마음은 세가지 상태 속에 있다. 그것 중 하나는 타마스(tamas)라 부르는 어둠으로 짐승과 백치 속에서 발견 된다. 그것은 오직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만 행동한다. 마음의 그 상태 속으로 그 밖의 다른 생각은 들어오지 않는다. 그 다음 마음의 활동적인 상태인 라자스(rajas)로서 주된 동기는 힘과 쾌락이다. “나는 강력하게 되어 다른 사람을 지배할 것이다!” 그 다음은 사트바(satta)라 부르는 고요와 평정의 마음 상태로서, 파도가 가라앉고 마음 호수의 물은 깨끗하게 된다. 그것은 활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격렬하게 활동적이다. 그것은 고요하게 되는 힘의 가장 큰 현시이다. 

활동적이 되기는 쉽다. 말의 고삐를 늦추면 말은 너와 함께 달린다.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돌진하는 말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힘센 장사이다. 그러한 말을 다시 풀어주거나, 또는 제압하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요구되지 않겠는가? 고요한 사람은 둔한(활기 없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사트바를 둔감하거나 게으른 것으로 아는 실수를 하지 말아라. 고요한 사람은 마음의 파도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활동은 열등한 힘의 현시이다. 그러나 최상급은 고요이다

    

치타(마음질료)는 그것의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늘 노력한다. 그러나 기관들은 그것(치타)을 밖으로 당긴다. 치타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이 외부로 향하는 성향을 저지해야 한다. 그리고 치타가 지성의 본질을 향해 되돌아가는 여행을 출발하기 위해서는 요가 속으로 첫 발을 내 딛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이 방법만이 치타가 올바른 길을 따라 갈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치타가 가장 낮은 것에서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 까지 모든 동물들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지성’으로서 치타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형태 속에서만 있다. 마음 질료가 ‘지성의 형태’로 될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은 이것들의 모든 단계를 통과하여 회귀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영혼도 해방 시킬 수 없다. ‘소’나 ‘개’는 비록 그들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직접적인 구원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치타는 우리가 지성이라 부르는 형태로 아직까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치타는 다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 분산된다, 어두워진다, 모인다, 한 지점에만 있다, 그리고 집중된다. ‘분산 되는 형태’는 활동이다. 이것의 성향은 기쁨 또는 고통의 형태 속에 나타난다. ‘어두운 형태’는 상해를 입히는 경향으로 둔감한 상태이다. 주석자는 단언한다. 즉, 세 번째 형태(‘모인다’)는 천사들(devas)이 타고난다, 그리고 악마들은 첫 번째(분산된다)와 두 번째(어둡다)를 타고난다. ‘모이는 형태’는 그것이 그 자체의 중심에게로 모이기 위해 애쓸 때이다. ‘한 지점에 있는 형태’는 그것이 집중하기 위해 노력 할 때이다. 그리고 ‘집중된 형태’는 우리들을 사마디로 이끈다. 



3. tada drastuh sva rupe’vasrhanam

 

그때(집중의 시간) 보는 자(푸루샤)는 그 자신의-변형되지 않는-상태 속에서 휴식한다. 



파도가 멈추자 마자 호수는 고요하게 되고, 우리는 호수의 바닥을 보게 된다. 마음이 그렇게 고요해 질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자신을 혼합 시키지 않고 우리자신 그대로 남아있게 한다.



4. avidya ksetram uttaresam prasupta-tanu-vicchina-udaranam



다른 때(집중 이외에) 보는 자는 변형된 자신과 함께 동일시 된다.  



예로, 누군가 나를 비난한다면 이것은 내 마음속에 하나의 변형(브리티=소용돌이, 물결)을 낳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과 함께 나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 결과는 비참해 진다.



5. vrtti-sarupyam itarata



변형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은) 고통이고, (다른 것은) 고통이 아니다.

6. pratyaksa-anumana-agamah pramnani



바른 지식, 무분별, 말뿐인 현혹, 잠과 기억 (이 있다)



7. pratyaksa-anumana-agamah pramnani



직접적인 지각, 추리와 유력한 증명은 증거들이다.



서로 모순되지 않는 우리의 지각이 두 개일 때 우리는 그것을 증거라고 부른다. 내가 무언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인지하고 있는 어떤 것에 모순된다면 나는 그것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지 않는다.



또한 증거의 세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프라트야크샤(pratyaksha), 직접적인 지각. 우리가 보고 느끼는 무엇이나 감각들이 속이는 것과 관계가 없다면 증거이다. 나는 이 세상을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존재하는 증거는 충분하다.



두 번째로, 아누마나(anumana), 추리. 너는 신호를 본다, 그리고 그 신호로부터 너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된다.



세 번째로, 아프타바크야(aptavakya), 진리를 본 요기들은 직접적인 증거. 우리들 모두는 지식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당신과 나는 어렵게 노력한다. 그리고 추론의 길고 지루한 과정을 통하여 지식에 이른다. 그러나 요기, 즉 순수한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 그의 마음 앞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똑같다. 단지 그가 읽으며 되는 한 권의 책일 뿐이다. 그는 우리들처럼 지식을 얻기 위한 지루한 과정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의 말은 바로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 속에서 지식을 보기 때문이다. 그 예로 신성한 경전들의 저자들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증거이다.



어떤 그러한 사람들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들의 말은 증거가 된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크야(진리를 본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에 관해 긴 토론을 한 후 이렇게 말한다: “요기들이 하는 말의 증거는 무엇인가?” 그 증거는 그들이 직접 지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과거의 어떤 지식에 모순되지 않는다면 내가 보는 무엇이나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무엇이나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감각을 넘어서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이성과 과거의 인간 경험에 모순되지 않는다. 그 지식이 증거이다. 어떤 미침사람이 방안에 들어와 그의 주위로 천사들이 보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첫 번째 입장으로, 증거는 진실된 지식이어야 한다. 두 번째로 그것은 과거의 지식에 모순되지 않아야만 한다. 세 번째로 증거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특성에 의존한다. 내가 중요하지 않은 것만 말하는 특성을 가진 사람이 증거 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 증거는 가치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다른 경우에는 참 될 수가 있다. 예로, 사악한 인간임에도 천문학적 발견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 속에서 그것은 다르다. 왜냐하면 순수하지 않은 인간은 종교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의 첫 번째로 증거를 말하는 자는 그 자신이 아프타(apta-완벽한 비이기주의와 성스러운 사람)임을 선언한 인간이어야 한다. 두 번째로 그가 감각을 초월해야 하며, 세 번째로 그가 말하는 무엇이나 인류의 과거의 지식에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새로 발견되는 진리는 과거의 진리에 반박되지 않고, 그것과 적합해야 한다. 네 번째로 진리는 입증의 가능성을 가져야 말한다. 만약 한 사람이 “나는 비젼을 본다”라고 나에게 말한다면 나도 그것을 정확히 보지 못할 때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누구나 그 자신이 그것을 보는 힘을 가져야만 한다.



아프타(apta, 성자)라면 그의 지식을 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모든 이런 조건이 충족 되어야만 한다; 너는 그 사람이 순수한지, 이기적인 동기는 갖지 않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즉, 그가 이득이나 명성을 갈망하지 않는지를 보아야 한다. 두번  째로 반드시 그는 그가 초의식에 도달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는 우리들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주어야만하고, 그것은 이세상에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 세 번째로, 우리는 그가 말하는 것이 다른 진리들에 모순되지 않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인 진리들에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네 번째로, 그 사람은 결코 자기만 유일하게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해야만 한다.



증거의 세 번째 종류(‘증거는 말하는 사람의 특성에 의존한다’)는 아프타의 말과, 추론, 감각적 지각이 인도한다. 나는 영어로 이 ‘말’을 번역할 수 없다. 그것은 “영감 받은” 이란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이 인간자신 내면으로부터 오는 동안 영감은 외부로부터 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글자대로의 뜻은 “달성한” 이다.



8. viparyayo mithya-jnanam atad rupa-pratisyham



분별력이 없는 지식은 참된 본성을 확립 시킬 수 없는 그릇된 지식이다.



브리티스의 다음 부류는 다른 것 때문에 하나가 실수를 일으키는 것이다.



9. sabda-jnananupati vastu-sunyo vikalpah



말(言)을 따르는 언어의 미혹은 실재를(에 상당 하는 것을) 갖지 못한다.



브리티스의 또 다른 부류는 비갈파(vikalpa)라고 부른다. 말은 발음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깊이 숙고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즉시 점프한다. 그것이 치타(마음질료)의 나약한 표시이다. 이제 너는 자제의 이론을 이해 할 수 있다. 나약한 자는 자제가 모자란다. 그것을 테스트 하는 것에 의해 너 자신을 항상 실험하여라. 화가 나거나 비참한 느낌이 들 때 어떻게 그것들의 정보를 가지고 너의 마음을 브리티스(소용돌이) 속으로 던져 넣게 되었는지를 추론하여라.    



10. abhava-pratyaya-alambana vritti nidra



잠은 공허한 상태의 느낌을 포착하는 하나의 브리티(물결)이다.



브리티스의 다음 부류는 잠과 꿈이라 부른다. 우리가 깼을 때, 잠을 잤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오직 지각의 기억만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기억을 갖지않고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만약 잠자는 동안에 마음이 물결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의 오르내림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수 없다. 우리가 회상하는 잠의 실제 원인은 잠을 자는 동안에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물결의 어떤 종류 들이다. 기억은 슴리티(smriti)라 부르는 부르티스의 또 다른 부류이다.



11. anubhuta-visaya-asampramosah smriti

 

기억은 인식된 주제(브리티스)가 살짝 사라져 버리지 않을 때이다(그리고 인상을 통하여 의식으로 되돌아 올 때이다).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그릇된 지식, 말의 현혹, 그리고 잠으로부터 올 수 있다. 예로, 너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치타(마음질료)의 호수 속으로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의 물결의 원인이고, 그 물결은 연속된 물결들을 일으킨다. 이것이 기억이다. 잠도 그러하다. 잠이라 부르는 물결의 특별한 종류가 기억의 물결 속으로 치타를 던질 때 그것을 꿈이라 부른다. 꿈은 깨어있는 상태 속에서 기억이라 부르는 물결의 또 다른 형태이다.



12. abhyasa-vairagyabhyam tan nirodhah



수행과 무집착에 의해 그들을 통제한다.      



마음이 무집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정하고, 선하고, 이성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수행 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호수를 진동으로 파동 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진동은 밖에서 사라진다, 무엇이 남는가? 삼스카라, 즉 인상(흔적)이 남는다. 이러한 인상들이 마음 위에 많이 남겨질 때 그들은 연합한다. 그리고 하나의 습관이 된다. 그래서 “습관은 두 번째 천성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습관은 첫 번째 천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전체 천성이다. 우리자신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천성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다시 만들거나 파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스카라(잠재인상)는 우리들 마음에서 나가는 이러한 진동들에 의해 남겨진다. 우리들의 특징은 이 흔적들의 총합이다. 그리고 어떤 특별히 우세한 물결에 따라 개인의 성향은 드러난다. 선이 우세하면 그는 선하게 된다, 악이 우세하면 그는 사악 하게 된다, 기쁨이 넘치면 그는 행복하게 된다. 나쁜 습관을 치료하는 영약은 오직 반대되는 습관이다. 그들의 과거의 인상들 때문에 남겨진 모든 나쁜 습관들은 좋은 습관을 길들일 때 지배된다. 선을 행하기 위해 가거라. 그리고 끊임없이 성스러운 생각만하여라: 그것이 잠재된 인상들을 진압하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사람도 결코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자신이 단지 습관의 다발이며, 특성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보다 좋은 새로운 습관으로 저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성은 반복된 습관이다, 그리고 반복된 습관만이 특성을 개량할 수 있다.



13. tatra sthitau yatno’bhyasah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억제하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수행이다.



무엇이 수행인가? 치타(마음질료)의 형태로 있는 마음을 통제하여 그들이 물결의 형태로 변하는 것을 막는 시도를 말한다.



14. sa tu dirgha-kala-nairantarya-satkara-asevito drdha-bhumih sah



그 시도는 큰 사랑과 함께 한 오랫동안의 변하지 않는 노력으로 튼튼한 기초가 확립 된다.

자제는 하루 만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적인 수행으로 온다.   



15. drsra-anusrayika-visaya-vitrsnasya vasikara-samjna vairagyam



그러한 노력은 보거나 듣는 대상들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대상들을 통제하고, 무집착을 가져 올 것이다.

 

우리들의 행동의 유력한 두 개의 동기는 (1) 우리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 (2)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다. 이들 두 힘은 마음을 다양한 물결의 호수 속으로 던져 넣는다. 포기는 이들 힘에 대항하여 싸우는 힘이며, 자제 속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힘이다. 포기해야 될 것은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다 이다. 나는 거리를 지나간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가오고, 나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나 자신의 경험이다. 그것을 나 자신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즉시 화의 형태를 만드는 물결 속으로 나의 치타(마음질료)를 던진다. 그것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라. 그것을 네가 막을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너는 바이라그야(vairagya, 포기)를 갖는다.



한편 세속적인 경험은 우리에게 감각적 즐거움이 가장 높은 이상이라고 가르친다. 이들은 무서운 유혹들이다. 그들을 부정하는 것과, 그들을 대할 때 물결의 형태로 오도록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포기이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이 두 겹의 동기를 통제하는 것, 그래서 그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부터 치타(마음질료)를 막는 것을 바이라그야(vairagya) 라고 한다. 이들은 내가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게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정신적인 힘을 포기라고 부른다. 바이라그야는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16. tat param purusha-khyater buna-vaitrsnyam



그것은 이중성 조차 포기하는 극도의 무집착 이다. 그리고 그것은 푸루샤의 (참된 본성)의 지식으로부터 온다. 



이중성에 대한 집착이 사라질 때 바이라그야(포기)의 힘이 가장 높게 현시 된다. 우리는 먼저 푸르샤(purusha), 진아가 무엇인지, 이중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요가 철학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가지 성질, 또는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타마스(tamas), 라자스(rajas), 사트바(sattva)라고 부른다. 이 세가지 특성은 어둠 또는 불활성(타마스), 인력 또는 척력(라자스), 평형(사트바)으로 물질 우주 속에 나타난다. 자연 속의 모든 것, 모든 현시는 이 세가지 힘들의 결합과 재결합이다. 고대인도의 상크야(sankhyas)  철학에 의하면, 자연은 다양성으로 분할 된다고 한다. 인간의 진아는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 있고 자연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눈부시며, 순수하고 완전하다. 지성이 하는 무엇이나 우리는 자연 속에서 본다. 그러나 이 진아의 반영은 자연 속에서 볼 수 없다. 자연 자체는 지각력이 없다. 너는 자연이란 단어가 ‘마음’도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 해야만 한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으로부터 가장 거친 물질의 형태가 왔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 있으며, 자연의 명시이다. 이 자연이 인간의 진아를 덮고 있다. 이 자연의 덮개가 사라질 때 진아는 그 자체의 영광 속에 드러난다.



앞의 15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물질이나 자연을 지배하는 자로서) 무집착은 진아를 드러나게 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 다음 구절은 사마디, 완전한 집중을 정의한다. 그것은 요기의 목표이다.



17. virtaka-vicara-ananda-asmita-anugamat-samprajnatah 



올바른 지식이라 불리는 집중은 논리적 사고, 식별력, 지복, 절대적인 자아의식의 결과로 생긴다.



사마디는 두 종류로 나누어 지는데, 삼프라즈나타(samprajnata)와 아삼프라즈나타(asampra;nata)이다. 삼프라즈나타 사마디 속에서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은 온다. 그것은 네 종류이다. 첫 번째 종류를 사비타카(savitarka)라 부른다. 이것은 다른 대상들로부터 마음을 고립시켜서 한 대상 위에만 반복해서 마음이 명상 할 때 온다.

상크야 철학에서 말하는 25 범주 속에 명상을 위한 대상들의 두 종류가 있다: 

(1) 자연의 지각력 없는 24 범주, 그리고 (2) 하나의 지각력 있는 푸루샤. 요가의 이 부분이 상크야 철학의 완전한 기초가 되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다. 

자아의식, 의지, 마음 등은 공통기초를 가지고 있는데, 치타 즉 마음질료 안에서 그들 모두는 제작 되었다. 마음질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생각으로 그들을 투사한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있는 이 두 가지 힘(마음 질료와 자연력)과 물질은 하나이다. 창조 전에 자연의 명시 되지 않은 이 상태를 아브야크타(avyakta)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한 싸이클이 끝난 후 자연 전체는 또 다른 주기 후에 다시 출현하기 위해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지성의 본질, 푸루샤(영혼)는 그것을 초월해 있다. 지식은 힘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사물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또한 마음이 다른 요소들 위에 명상을 시작할 때 그들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 그러한 종류의 명상이 명상의 대상인 외부의 거친 요소들 위에 행해질 때를 사비타카(saitarka)라 부른다. 비타카(vitarka)는 “의문(의심)” 뜻하며, 사비타카, 즉 의문과 함께, 원소들에게 질문 하는 것으로 그것이 되었을 때, 원소들이 자신들의 힘과 진리를 명상 자에게 줄 것이다. 

힘을 얻는 것 속에 해방은 있지 않다. 그것은 세속적인 즐거움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 속에서 즐거움이 있지도 않다. 즐거움을 위한 모든 탐구는 헛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배우기 어려운 오랜 가르침이다. 그가 그것을 배웠을 때 우주를 벗어나고 자유롭게 된다, 신비한 힘이라 부르는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은 세상만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종국엔 고통만 강하게 만든다. 비록 한명의 과학자 였지만,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 하는데 그쳤다. 그는 이러한 힘에 대하여 우리에 경고 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로 그 명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원소들을 잡기 위해 노력할 때 그리고 원소들에 대한 생각이 원소 자체가 될 때 그것을 니비타카(nivitarka), “의문이 없는”이라고 부른다. 명상이 한 단계 높이 나아갈 때, 그리고 명상의 대상으로서 탄마트라스(tanmatras,= 물질의 5개의 초감적 또는 관념적 특성들)를 명상할 때, 그리고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으로 그들을 생각할 때 그것을 사비차라(savichara), “구별과 함께”라고 부른다. 그리고 같은 명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제거되고, 시간과 공간이 순수한 원소들로 생각될 때 그것을 니르비차라(nirvichara), “구별이 없는” 것이라고 부른다. 



다음단계는, 거칠고 순수한 두 원소들이 포기될 때, 명상의 대상이 내부의 “생각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기관은 활기 있고, 둔감한 특성들을 잃게 되지만 그때를 사난다(sananda), “지복 넘치는 사마디”라고 부른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아주 여물고 집중될 때, 거칠거나 순수한 물질들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포기될 때, 오직 자아의 사트바(sattva) 상태만 남을 때, 그러나 모든 다른 대상들로부터 구별이 될 때: 그것을 사스미타(“자아의식”과 함께) 사마디 라고 부른다. 인간이 이 상태를 달성한 것을 베다 에서는 “몸을 잃었다”라고 한다. 그는 그 자신을 그의 거친 육체 없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몸과 함께 있는 자신을 느낀다. 이 상태에 있는 자는 “목표”의 달성 없이도 자연 속으로 녹아 들어 하나가 된다. 그것을 프라크리티라야스(prakritilayas)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조차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해방을 얻는다.  



18. viram-pratyaya-abhyasa-purvah samskara-seso’nyah



  또 다른 사마디가 있는데 그것은 모든 정신적 활동이 정지된 끊임없는 수행으로 달성된다. 그 속에서 치타(마음질료)는 오직 명시되지 않은 인상들로만 간직 된다.                                                              

   

이것이 완벽한 초의식적 아삼프라즈나타(Asamprajnata) 사마디 이다. 이 상태는 우리에게 해방을 준다. (앞에서 설명한)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영혼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이간이 모든 힘들을 달성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다시 추락한다; 즉 영혼이 자연을 초월할 때까지 보호하지 못한다. 영혼이 자연을 초월한다는 것은 비록 그 방법이 쉬운 것 같아 보일지라도 사실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 방법은 마음 자체 위에 명상하는 것으로 생각이 침입할 때는 생각을 죽이고, 마음속으로 생각이 들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완전히 텅 비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실제로 할 수 있을 때 그 순간에 우리는 해방에 도달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공백으로 만들기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하지 않은 사람들은 타마스, 물질적 무지로 덮여 있는 데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음을 둔감하게 만들고 마비시킨다. 그리고 마음의 공백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도한다. 그것을 실제로 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힘과 가장 큰 지배력은 나타난다. 이때 아삼프라즈나타, 초의식적 상태는 달성된다. 이 사마디는 씨가 없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의식이 있는 집중 속에서 마음은 마음질료(치타) 속에 물결을 가라 앉히는 데만 성공하고, 그들을 바닥에 보유하고 있다, 즉 그 물결은 “경향성”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들 경향성(씨앗들)은 그에 맞는 때가 오면 다시 물결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모든 이 경향성을 파괴 했을 때, 거의 마음이 파괴 되었을 때, 그때 사마디는 씨가 없다. 즉, 마음 속에 씨앗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은 생명의 식물을 다시 또 다시 제작하여 탄생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는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 계속은 미지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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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 몸 | 작성시간 23.06.0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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