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이 내맘같은 적이 없다.
절대권력을 가진 왕도 대통령도,
심지어 무소부지의 권력을 가진 북한의 독재자들도
겉보기에 하고싶은 대로 살았겠지만,
도달한 곳은 결국 한줌 흙
하고싶은 대로 하고는 살았겠지...
그것 뿐이다.
가는 곳이 뻔한 우리네 삶에서
진정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란 무엇일지...
삶이 그 지루한 무게를 가중시키고
매일 발생하는 귀찮은 일거리가
찬 물에 발담그기 싫어 하는 아이처럼
종종 현실을 떠나고 싶은 심정을 준다.
어떻게든 살아가려면 살아가게 된다고
우리는 스스로를 보듬어 주어도
그래도 현실의 거인 앞에서 탄식을 내쉬고
앞으로 내어 뛰어 깨지던 뒤로 내빼다가 나자빠지던
종단 간에 이렇게 살아간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행복은 있던가?
행복이 있기보다는 행복하려고 하는 게지
본래 내가 차린 밥상은 맛이 없고
남이 차려입은 옷이 더 멋있어 보이는 법인데
우리들의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오래 전,
큰 형님이 갓 결혼하여 살던 살림 집에
형수님이 내오신 해물탕찌개를 보며
그저 신기할 뿐, 먹을 생각도 없이
바라만 보던 적이 있었다.
아까와서 이걸 어떻게 먹지?라며...
세상에나 선녀처럼 보이던 큰 형수님의
작지만 예쁜 손으로 만든 움식은
먹어서는 안될, 보암직한 에덴동산의 선악과 같았다.
그 신기함과 신비함은,
지금은 왜 없어진 거지?
나,
결혼하여 아내의 첫 음식을 먹어보고는
왜 큰형수님의 신비한 음식 맛은 없어진 건지
알 도리가 없었는지...
큰형수님은 우리집에 살게 된 첫 새식구
아내는 평생을 살아가는 옛친구...
그래서 그랬나 보다.
결국에 어머니의 음식 맛이나,
누님의 음식 맛이나
큰 형수님의 음식 맛이나,
그리고 아내의 음식 맛이나
비슷비슷 해졌다.
그 이유는 세월흐름 속의 원숙함때문일테지.
어머니의 음식은 땅 속 깊이 파묻어 한 여름에 꺼내먹던 김장김치 맛.
큰 형수님은 청양고추와 두부, 파 다른 재료를 썰어넣어 얼큰하던 된장찌개 맛
누님은 고소하고 매콤하고 짭짜름하고 혀끝을 지나 뇌신경 전체를 울리던 미나리 나물무침.
아내는 비내려 눅눅한 기분을 개운케 해주는 막걸리에 해물김치전.
여자에 묻혀 살아온 삶이 그지없이 행복하다.
내 삶이 불만스럽고 하는 일이 늘 마음에 거슬릴 때
뒤돌아 보아 나를 나무란다.
어르신들 말씀처럼, '배가 불렀구만...'
지금 일을 할 수 있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둔하고 어쭙잖지만, 내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나에게 북을 베풀어 주는데,
배불리 먹던 어머니의 음식을
언제인가 부터 먹을 수 없게 된 이후
그래서 야무진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음식을 그리워 하듯
고달픈 내 삶을 그리워 하기 전에
지금, 내 삶을 행복이라 여겨야지.
침대 위에 눕지 않고 두 다리로 걷고 달리고
두 손으로 만지고 구부리고,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것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행복하다.
또 다른 시작할 새로운 삶.
두렵지만, 해볼만 한 일이다.
1620년에 '메이플라워(MayFlower)를 타고
지금의 메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에 도착했던
청교도들이던 'Pilgrims Fathers'들은
신천지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이 있었을까?
아니면 자기의 조국을 떠나 어쩔 수없이 풀한포기 안나는
얼어버린 땅에서 살아가야할 팔자를 한탄했을까?
어쨋던 지간에 그들은 살아야 했고 생존해야만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주변에 먹고살 거리가 전혀 없던 엄동설한의 그해 11월 말.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삶은
'어서옵쇼~' 라고 종업원이 허리굽혀 맞이하는 호텔도,
'환잉꽌일'이라며 무표정한 입술만 까딱거리는 중국식당도 아닌
'오래간만에 왔네?'라며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는 누님네 집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한 기대는 부모님 살아계실 때나 가능하지만...
행복을 만들어 가야지.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지금의 삶을 지금 이곳에서 이어가는 일도 좋지만,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살아갈 수'있다는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