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6-4 충칭/시안/신장

중국 서안 관광 - 대안탑관광지 하편: 대안탑의 유래

작성자중국서안 푸른민박|작성시간23.10.04|조회수19 목록 댓글 0

대안탑(大雁塔)

 

대안탑의 원래 이름은 자은사보도(慈恩寺浮图)였고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구해온 대량의 불경과 불사리를 잘 보관하기 위해 652년에 도표(图表)를 첨부하여 상주(上奏)후에 조정의 비준을 거쳐 자은사 서원(西院)에 세운 5층의 불탑입니다. 층마다 1만여알의 사리가 보존되여 있었고 현장법사가 직접 탑 건설에 참가하여 벽돌과 돌을 운반하였였으며 2년이란 시간을 들여 탑을 완성하였습니다.

 

'대안탑'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현장이 편찬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에 나오는 불교이야기가 가장 신빙성이 있습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记)'의 기재에 따르면 불교는 초기에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두 종파로 나뉘였는데 대승은 식육을 금하고 소승은 금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인도의 마가타국(摩揭陀国)에는 왕사성(王舍城)이 있었고 성밖의 제석산(帝释山)에는 사원이 하나 있었는데 사원의 승려들은 소승교를 신봉하였습니다.

 

어느날 점심이 막 지나갈려는 무렵에 승려들이 꼬르륵 배가 고프면서도 점심거리가 없어서 몹시 원망하는 중에 한 승려가 갑자기 하늘에서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무심코 "우리 승려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는데 만약 보살님께 영이 있다면 우리의 곤경을 알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앞장선 기러기가 거꾸로 날아가다가 이 승려의 앞에서 날개를 부러뜨리고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크게 놀란 승려들은 여래(如来)가 그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을 알았고 급히 무릎을 꿇며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러기를 사원에 묻은후 그 위에 탑을 세웠으며 안탑(雁塔)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로부터 이 사원의 승려들은 대승에 귀의하여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탑'이란 단어앞에 '대(大)'자를 붙인 이유 중 하나는 탑 건축물이 웅장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후에 세운 천복사 탑도 안탑(雁塔)으로 부르게 되면서 구별하기 위해 대안탑(大雁塔)과 소안탑(小雁塔)으로 각각 나눠서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장은 인도에서 불법을 구할때 특별히 이 유명한 안탑을 찾아가 참례를 하였습니다.

 

현장법사가 직접 건축한 이 불탑의 벽돌 내부가 흙으로 되었고 비바람의 침식을 받아 40여년이 지난 뒤 점차 허물어져갔습니다. 무주 장안연간(武周.长安年间)에 여황 무측천(武则天)과 왕공귀족들이 돈을 내어 대안탑을 7층 보탑으로 전보다 더욱 장엄하고 웅장하게 재건하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흔히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것이 7층불탑을 세우는것 보다 낫다."고 말하는데 대략 여기에서 유래한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대안탑은 줄곧 고성 서안의 상징건축물이었고 구름속으로 높이 솟은 대안탑은 현장법사의 숭고한 인격품성과 위대한 정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대안탑은 전형적인 목재구조를 모방한 누각식 벽돌탑이고 '서유기'의 이야기로 세계각지에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대안탑은 탑좌, 탑신, 탑찰로 구성되었으며 총 높이는 64.7m이고 문미와 문틀에는 당나라때의 선각화(线刻画.음각선으로 새긴 그림)가 새겨져 있습니다. 4개의 문미에는 각각 유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음각선으로 부처, 보살, 금강역사(金刚力士)의 화상이 조각되어 있고 특히 서문미 선각화중의 설법하는 부처님 표정이 단정하고 자상하며 30존의 각 보살 표정이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당나라시대의 건축, 불교예술과 역사문화를 연구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어었습니다.

 

웅장한 대안탑 아래층 남문동 양쪽에는 당태종이 편찬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圣教序)'비석와 당고종이 태자때 편찬한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圣教序记)' 비석이 상감되여 있고 두개의 비석은 모두 당시의 중서령(中书令.재상직) 저수량(褚遂良)이 집필한것이며 이처럼 두 비석의 비문과 비액(碑额)이 서로 마주 배열되고 좌우가 대칭되며 불탑에 상감된 비문은 유일무이합니다. 비문 아래에는 또 옷고름이 펄럭이며 춤추는 무락천인(舞乐天人)이 조각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대당삼장성교서' 비석의 악사가 든 악기는 관악이고 '대당삼장성교서기' 비석의 악기는 현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탑성교서비(雁塔圣教序碑)를 '이성삼절비(二圣三绝碑)"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성어찬(二圣御撰) - 태종 이세민이 '서(序)'를 썼고 태자 이치가 '기(记)' 를 썼다.

둘째는 현장취경(玄奘取经) - 현장이 서천에서 불경을 구해오며 불법을 선양하는 내용을 찬양했다.

셋째는 대가서예(大家书法) - 저수량의 서예 명작이다.

넷째는 입우황도(立于皇都) - 장안성내 대자은사의 장엄하고 신성한 곳에 세워졌다.

때문에 이 비석은 중국 국보중의 진귀한 보물이며 유명비석중에서도 명성이 아주 높습니다.

 

대안탑 1층 양측의 벽에 있는 비석 2개 중 하나는 현장의 부급도(负笈图.현장이 책상자를 멘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현장의 역경도(译经图.현장이 경서를 번역한 그림)입니다. 이 두 비석의 화면은 현장 법사의 빛나는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안탑의 각 층마다 풍부한 전시가 있습니다. 명나라의 유금(镏金.고대 중국 도금의 기법)불상과 인도 불교 고승이 기증한 부처사리를 모시고 있고 불족적(佛足迹)비석은 현장이 만년에 조각하고 모시는 불족석(佛足石)의 복제품이며 현장의 시, 우우임(于右任), 제백석(齐白石)의 시와 서예작품 등도 전시되고있습니다. 그중 6층에는 당나라시기 몇몇 대시인들의 시와 사, 서예작품이 걸려있습니다.

 

752년 가을, 대안탑 창건 100주년을 맞아 시성(诗圣) 두보(杜甫)는 잠삼(岑参), 고적(高适), 설거(薛据), 저광희(储光羲) 등 네 명의 대시인과 함께 대안탑에 올라 한차례의 이색인 안탑시회(雁塔诗会)를 거행하였습니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본 그림 같은 가을 경치가 시인들의 정서와 시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명한 변새(边塞)시인 잠삼은 흥미진진하게 시를 지었습니다. '塔势如涌出, 孤高耸天宫. 登临出世界, 蹬道盘虚空. 四角碍白日, 七层摩苍弯. 下窥指高鸟, 俯听闻惊风. 보탑은 마치 평지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하늘 궁전으로 우뚝 솟아 있다, 올라가면 세상밖으로 나온듯 하고 계단을 타면 허공을 맴돌듯 하다. 뻗어나간 네 귀퉁이는 낮을 가리고 7층탑이 창공을 바싹 이엇다. 아래를 보면 나는 새가 손에 꼽을 정도고 산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를 굽어 듣는다.'

 

모두들 두보에게 시를 짓도록 청하였습니다. 두보는 감정이 북받쳐 시구가 파도처럼 세차게 흘러넘쳤고 입을 열자마자 사람들을 놀래우게 했으며 기개가 남달랐습니다. '高标跨苍穹, 烈风无时休. 自非旷士怀, 登兹翻百忧. 七星在北户, 河汉声西流. 羲和鞭白日, 少昊行清秋. 秦山忽破碎, 泾渭不可求. 俯视但一气, 焉能辨皇州. 자은사탑은 푸른하늘 너머로 높고 거센 바람이 쉴틈없이 분다. 만약 탑에 오른 사람에게 넓은 흉금이 없다면 경치를 보고 오히려 감정이 생겨서 많은 근심이 생길것이다. 밤에 탑위에서 북두칠성을 바라보니 마치 탑의 북쪽 창가에 있는것 같고 귓가에는 서쪽으로 흐르는 은하수 물소리가에 울리는것 같다. 낮에 탑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보니 희화(羲和.중국 신화에 나오는 해를 싣고 하늘을 달리는 마차를 부리는 신)가 채찍으로 해를 몰아 빠르게 서진하였고 가을의 신 소호(少昊)는 사람들에게 늦가을을 가져다주었다. 종남(终南)의 산들을 내려다보면 갑자기 산산조각이 나도 경위(泾渭.경수와 위수)의 물이 맑고 탁한지 분간하기 어렵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온통 허옇게만 보일뿐 그곳이 도읍 장안인지 어찌 알수있겠는가'

 

불탑의 최고층에 오르면 그야말로 '登临出世界.세상밖으로 나온듯' 입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느낌을 받게 되고 난간에 기대 멀리 사방을 바라보면 고성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와 귀가를 잊게 만듭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