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나이듦'에 대하여 - 카이사르와 키케로

작성자현기욱|작성시간20.10.15|조회수400 목록 댓글 0
(카이사르)

 

 

 

(키케로)

 

 

 

 

 

 

 

 

 

오늘은 기원전(BC)에 쓰여진 한 권의 책을 통해 '나이듦'에 대한 나의 소고를 적어보려 한다.

'고대 로마시대'에 그 나라를 대표하는 두 명의 주연급 캐릭터가 있었다.
한 명은 '카이사르(BC100-BC44)'였고 다른 한 명은 '키케로(BC106-BC43)'였다.

'카이사르'는 선이 굵은 정치인이었고 정벌을 위해 전쟁터를 종횡했던 걸출한 장수였다.
그가 '갈리아땅'을 정벌하고 남긴 '갈리아 전쟁기'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명저로서 빛을 발했던 한 편의 위대한 '전쟁보고서'였다.
또한 그가 남겼던 여러가지 '어록'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지구인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왔노라(veni), 보았노라(vidi), 이겼노라(vici)"
이 말은 정복지를 함락시킨 뒤에 남겼던 감격의 표현이었다.

또한 '루비콘강'을 건너며 외쳤던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표현도 '파부침주'의 절박한 심정으로 로마를 향해 돌진했던 고독한 장수의 굳은 의지와 기개가 잘 드러난 말이었다.

그 진격 덕분에 로마 '원로원'의 귀족들과 '폼페이우스 장군'은 야반도주하듯이 줄행랑을 쳤고 자연스럽게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 '삼두정치'와 '공화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인생 막판에 양아들에게 암살 당해 비통하게 죽어가면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최후의 일성이 바로 "브루투스, 너마저"였다.
'카이사르'의 부고는 곧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허허로운 타종이었다.

이처럼 그의 극적인 삶과 어록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인구에 자주 회자될만큼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였고 시종일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당대의 호걸이었다.

반면에 '키케로'는 머리 회전이 빠른 정치가이자 웅변가였고 뛰어난 저술가였다.
'웅변에 관하여', '공화정에 관하여', '법률에 관하여', '밀로를 위하여', '최고선에 관하여', '도적적 의무에 관하여' 등등 그가 남긴 숱한 저술의 목록만 보아도 그의 캐릭터를 단박에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역작은 너무나도 깊고 방대했다.
또한 지인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썼는데 현존하는 것들만 900여 통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사색'과 '다작'의 삶을 추구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둘의 인생궤적은 극적으로 달랐다.
도전과 진중, 과단성과 우유부단, 무와 문, 리더형과 참모형, 전쟁과 웅변, 현상과 논리 등등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시 지구의 옴파로스였던 '로마'를 세상에 알리고 증명했던 당대의 거물들이었다.
'카이사르'가 전쟁과 정벌, 단호한 결단으로 로마를 세상에 알린데 반해 '키케로'는 방대한 저술과 대중을 향한 웅변, 그리고 법정에서의 화려한 변론을 통해 로마의 치세와 위엄을 후세에 전한 불세출의 지략가였다.

'키케로'가 남긴 저서는 매우 많다.
그것들 중에 현재까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노년에 관하여'다.
이 책은 '키케로'가 집정관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칩거 중일 때 썼다.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제1차 삼두정치'를 청산하고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거머쥔 '카이사르'의 리더십에 '키케로'가 반기를 든 형국이었고 그래서 반목과 대립이 극심했다.
그러던 차에 정계를 떠나 집필에 몰두할 때였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작금의 기준으로 보면 제2의 청년기에 불과한 팔팔한 나이지만 당시엔 매우 장수한 축에 속했다.

그는 당시 로마 '최고지성'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학문적 명성과 지적인 저술에 어느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었다.
한마디로 클래스가 다른 경지였다.

나는 오늘, 이 작문의 제목을 '나이듦에 대하여'로 잡았다.
그런만큼 그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노년에 관하여'란 책을 주요 텍스트로 삼고자 한다.
이 책에 기술된 중요한 대목 중 몇 가지만 간추려 보겠다.

'노년과 일'에 대한 강론을 보면,
노인은 일을 못한다는 편견이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큰일'은 육체의 힘, 민첩함, 뜨거운 열정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려'와 '예리한 판단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로 잘 짚어낸 논리였다.

또한 노인이 되면 '삶의 즐거움'에서 멀어지고 필경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세인들의 평가에도 그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갈등, 욕망, 시기와 질투, 야망, 배신 등 젊은 날의 격한 포말이 잦아든 후 깊고 평온한 자아를 회복하면, 노년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살아숨쉬는 '푸른초장'이라고 했다.

흔들리지 않는 내적 성숙을 기반으로 사색하며 집필하는 노년만의 행복감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떠드는, 아주 천박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궁구하고 배우는, 멋진 노년기의 인생을 마음껏 흠향하라 권면했다.
단언컨대, 그것보다 감사하고 만족스런 삶은 없노라고 확실하게 정리했다.

'노인과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농부들이 파종하고(봄), 온갖 정성을 쏟으며(여름), 풍요를 구가하고(가을), 끝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겨울)이 세상의 순리라고 강조했다.
삶과 죽음을, 흐르는 강물을 대하듯이 자연의 순행으로 인식하면 된다고 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다.

이런 깔끔하고 간단명료한 인식의 지평, 그 지평 이상으로 '죽음'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자연의 법리'를 따르는 것이 모든 삼라만상의 '이치'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그는 반문했다.
"멋지게 살다가 깔끔하게 죽는 것만큼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일이 또 있겠는가?"

그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준비된 석학이었고 로마의 현자였다.
로마의 지성이 남긴 이천 년 전의 뿌리 깊은 '수상록'이었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노년과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묻어났다.

마치 영겁처럼 수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까지도 그의 논거는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다.
정말로 대단한 '통찰'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그것은 절대로 슬퍼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행복'과 '완숙'의 지경으로 접어드는 '인생의 축복'이란 점을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며 기쁘게 삶을 엮어가면 되리라.

'키케로'는 끝까지 '공화정'을 옹호했으나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공화정은 일거에 종언을 고했다.
그리고 1인 독재관 시대가 막을 올렸지만 얼마 가지 못해 '카이사르'도 끝내 암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더이상 '공화정', '원로원', '삼두정치' 등 구체제는 명운을 다했고, 로마는 드디어 강력한 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시대의 요청이었다.

'카이사르'의 양아들로 간택된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450년간 이어진 '로마 공화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제국의 태동.
그것은 '카이사르'가 '갈리아땅'을 정벌한 뒤 목숨을 걸고 '루비콘강'을 건넜던 건곡일척의 도전과 결단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죽음을 무릅쓴 이 한마디.
이 일성이 훗날 대제국의 초석이 되었던 거였다.

그런 숨막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키케로'는 구시대를 옹호했던 수구파로 내몰렸다.
가혹한 운명을 그 누구도 피할 순 없었다.
그랬던 까닭에 강력한 '로마제국'으로의 혁명적 재탄생을 갈망했던 신진세력들에겐 그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살생부에 '키케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끝내 그는 '안토니우스' 일파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오늘은 고대 로마사의 역사적 고찰이 중심이 아니라, 그의 저술과 깊은 사유의 흔적들이 글의 중심이기에 역사적 서술은 그만 접는 게 좋겠다.

그랬다.
'키케로'의 저서들은 2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귀하고 향기로운 일인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인걸들이 명멸했지만 역시 불후의 '예술작품'이나 '저서들'은 시공을 초월해 항존하는, '영생의 생명력'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본다.

정말로 아름답고 멋지지 않은가?
이념도, 전쟁도, 정치도, 막강한 권력이나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도 '기록'이나 '저술'보다 더 값진 건 없는 듯하다.
긴 안목에서 역사적 자료들을 탐독하다보면 매번 그런 생각과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마도 나만의 견성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매일 '일기'를 쓰거나 짧게라도 '메모'를 남기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적자생존'이다.
영원한 진리다.

기록에 정성을 쏟는 자,
그는 죽었어도 후세들의 가슴속엔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오늘도 승리하시고 더 많이 배려하는 멋진 하루되시길.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