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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모님

작성자현기욱|작성시간21.02.22|조회수487 목록 댓글 0

 

 

 

지난 설날연휴 때 시간을 할애하여 숙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명절이라 서울에서 둘째아들 내외와 조카들이 와 있었다.

숙모님의 큰아들은 일 때문에 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 첫째 동생과는 통화만 했다.

둘째 동생은 목사다.

성직자인 아우도 지천명이 넘다보니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거의 없었다.

우리 사촌형제들, 나를 비롯하여 서로의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절감했다.

 

숙모님은 현관에서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그분의 깊고 큰 눈망울에선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셨다.

그렇게 약 1분 정도 나를 감싸셨던 팔을 풀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내 등을 연방 어루만지셨다.

 

금년에 춘추가 일흔여덟.

연세를 감안했을 땐 매우 건강한 편이셨다.

주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하늘나라로 떠나신 이후로 우리 가문의 만남은 현격하게 뜸해졌다.

내 아버지를 기준으로 고모님 세 분 중에 두 분이 떠나셨고, 아버지와 숙부님까지 소천하셨으니 그럴만도 했다.

어머니를 기준으로 보았을 땐, 4남1녀였는데 어머니와 두 분의 외삼촌이 소천하셨다.

친가와 외가 어르신들 10분 중 이제 단 세 분만 남으셨으니 무리도 아니지 싶다.

그동안 중심축 역할을 하셨던 내 부모님의 부재, 그 빈공간이 더욱 커보였다.

 

내가 매년 연말연초에 서울에서 가문의 모임을 주관하고 있지만 옛날 맛이 안난다.

그리운 분들이 대부분 떠나셨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의 고종, 이종사촌들도 꽤 많은 편이지만 어르신들이 안계시니 아무래도 조우하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인생행로의 자연스런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숙모님은 정말로 반가워하셨다.

커피와 과일을 내오셨고, 이것저것 궁금하신 점들을 많이 물어보셨다.

'식사하고 가라'고 여러번 말씀을 하셨지만 다음 일정도 있었고, 이미 식사를 하고 왔기에 정중하게 사양했다.

 

내가 소싯적에 우리집은 농촌에 있었다.

농사짓는 일꾼 아저씨가 우리집에서 함께 사셨을 만큼 농사를 많이 지었다.

그런데 나는 가끔씩 도회지로 나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걸 좋아했다.

숙모님 집은 처음부터 도회지에 있었으니까.

특히 국민학교 고학년 때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때까지 자주 가서 자고 왔다.

바로 숙모님의 관심과 사랑 때문이었다.

매사에 정성이 지극하셨다.

 

숙부님의 일이 잘 되지 않아 한 때엔 매우 어려운 곤경에 처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숙모님의 몸가짐과 표정 그리고 신앙심엔 한치도 변함이 없었다.

외부의 상황이나 환경이 어떻게 전개되든지 그 분은 매양 조용하셨고 꼿꼿하셨다.

방학때엔 일주일씩 머물기도 했는데 그 어렵던 시절에도 숙모님은 자신의 2남2녀 자식들 뿐만 아니라 어린 조카였던 내게도 항상 최선을 다하셨다.

"아이고, 눈치도 없이....그렇게 신세를 지다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면구스럽기 짝이없다.

그런만큼 숙모님에 대해선 가슴 저릿하고 애닲다.

 

숙모님이 좋아하시는 선물과 얼마 안되지만 봉투 하나를 준비해서 갔다.

내가 받았던 사랑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만나면서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숙모님의 눈망물엔 가끔씩 이슬이 맺혔다.

긴 시간동안 켜켜이 쌓였던 깊은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향으로 가서 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때면 가능한 한 숙부님 내외분께도 동일하게 인사를 드리고자 노력했다.

매번 그러지는 못했지만 오할 이상은 그랬던 것 같다.

내겐 부모님 같은 분들이셨다.

 

나도 숙모님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내 사촌 동생들(숙모님 자녀들) 2남2녀도 모두 반듯하게 잘 성장했다.

한 여성의 헌신과 기도는 거룩하고 위대했다.

비록 그 사랑과 헌신이 남들 눈엔 잘 띄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았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숙모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저릿해 진다.

세월이 사람을 무한정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하실 때, 이 땅에 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는다.

 

해병대 복무 중에 휴가 나왔을 때에도 나는 본가에 들렀다가 곧바로 숙모님 댁에 인사드리러 갔었다.

그때 찍었던 한 장의 사진을 다시 꺼내본다.

수십년 전 사진을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감사와 정이 잔잔하고 진하게 밀려든다.

마음속에 새겨진 감사와 감동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인생의 진리다.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숙모님.

사랑합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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