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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산이 되다

작성자현기욱|작성시간26.02.10|조회수53 목록 댓글 0

 
 

1963년 11월 2일에 서울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설악산' 근동에서 나고 자란 친구를 따라 산에 올랐으나 산과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한 이후론 방학 때마다 '설악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철이 들어가면서 자연과 깊게 교감했고 진심을 다해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산'이 대학 '선택'의 기준이었다.
7080 시대에 '산'에 관한 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학교가 있었다.
단연 '동국대'였다.
그래서 그는 자석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동국대'를 선택했다.
재수까지 하면서 그 학교를 선택했던 '외골수'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국대'에 입학했다기 보다는 '동국대 산악부'에 가입하기 위해 '동국대'를 선택했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그만큼 그는 산에 마음을 빼앗긴 학생이었다.
훗날 그는 대한민국의 '탐험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던 인물로 성장했다.
'동국대 산악부'에 들어가면서 그는 점점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도전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진리였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이 낳은 산악계의 거성, '고 박영석'(1963-2011, 항년 47세) 대장이었다.
'박 대장'은 8천 미터 이상 히말라야 14좌를 세계 8번째로 완등한 불굴의 사내였다.
'14좌 완등'만으로도 엄청난 위업이었다.
그만큼 죽음의 문턱을 숱하게 넘나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의 뜨거운 도전과 굳건한 기상은 조금도 식을 줄을 몰랐다.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앞길을 가로막을지라도 절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그의 심장엔 죽음 너머 피안의 세계까지 온전하게 부등켜 안았던 '미션의 언약궤'가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는 꿈을 이룬 뒤에도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그다음 목표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구에 존재하는 '7 대륙 최고봉'을 하나씩 차례대로 등정하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에베레스트'(8847M),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5892M),
오세아니아의 '푼착자야'(칼스텐즈, 4884M),
남미의 '아콩카과'(6962M),
유럽의 '앨부르즈'(5642M),
북미의 '데날리'(맥킨리, 6194M),
남극의 '빈스 매시프'(4892M)가 바로 그것이었다.
'박영석 원정대'는 차근차근 '7 대륙 최고봉'에 자랑스런 태극기를 꽂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7 PEAKS 완등'이라는 또 하나의 꿈을 현실로 증명했다.
놀라운 쾌거였다.
또한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쳤던 위대한 발자취였다.
 
'7대륙 최고봉 완등'에 이어 '세계 3 극점 도전'을 위해 그는 다시 도전에 나섰다.
죽음을 각오한 모험이었다.
'3 극점'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정상'과 '남극'과 '북극'의 극점을 일컫는 말이었다.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1993년), 남극점 도달 성공(2004년)까지는 굳은 신념과 강철 같은 체력으로 여세를 몰아 완주할 수 있었다.
문제는 북극점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죽음의 바다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순전히 얼음과 빙산을 뚫고 전진해야만 했다.
첫 번째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절치부심하며 두 번째 원정대를 이끌고 도전한 끝에 기필코 북극점 도달에 성공했다(2005년).
이로써 그는 인류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취하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대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로써 '박영석'은 유사 이래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첫 알피니스트가 되었다.
2005년 4월 30일의 쾌거였다.
'박영석'은 역시 '박영석'이었다.
그의 이름 석자 말고 달리 표현할 문구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는 다른 탐험가들과는 결이 다른 반열이었다.
 
비교를 불허하는 이 놀라운 영광과 발자취는 곧바로 '기네스북' 등재로 이어졌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기네스북 등재 이후,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지존이자 전설로 통했다.
또한 대한민국이 낳은 불세출의 탐험가이자 산악인으로 등극했다.
그가 바로 '고 박영석 대장'이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14좌 완등', '세계 7 대륙 최고봉 완등' 그리고 '세계 3 극점 도달'이라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지구인'이었다.
그런 '박 대장'이었기에 그를 생각할 때면 나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존경심이 일었다.
자연스러운 발로였다.
 
'산악 그랜드슬램'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후에도 그는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숙제'를 완수하고 싶었다.
히말라야 고봉에 어떤 발자국도 찍히지 않았던 '전인미답의 코스'를 따라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겠다는 최후의 미션이었다.
숭고한 꿈이었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극강의 도전이었다.
그의 마지막 미션은 바로 '코리안 루트' 개척이었다.
그것도 악평이 자자했던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뚫는 것이었다.
그때가 2011년 10월이었다.
북반구의 10월은 대개 온화하고 아름다운 가을이었지만 히말라야 거대 산군의 날씨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전에 쾌청할지라도 갑자기 짙은 운무로 뒤덮이기 일쑤였고 소나기가 내리거나 예고 없이 폭설이 쏟아졌다.
나도 12일 간 여러 번 경험했다.
종잡을 수 없었던 날씨의 변덕이었다.
실제로 내가 ABC 트레킹을 떠났던 작년 10월, 에베레스트 계곡에 갑자기 폭설이 내렸고 수백 명이 눈밭에 고립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끝내 한국인 한 명은 저체온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 소식을 '안나푸르나 계곡에서 들었는데 내 가슴도 한쪽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안타깝고 마음이 무지 아팠다.
 
'코리안 루트 개척 원정대'는 BC를 떠나 순차적으로 '캠프 1', '캠프 2', '캠프 3', '캠프 4'를 구축하며 정상을 향해 전진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원정대의 어느 누구도 단 1%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감과 패기'가 모두에게 충일했다.
더욱이 '정상 개척조'는 대한민국 최고의 산악 전문가들이 아니던가.
그 기라성 같은 삼인방은 이름만 들어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다 아는 준비된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박영석 대장'(1963년 생, 동국대 산악부), '신동민 대원'(1974년 생, 대구대 산악부) 그리고 막내였던 '강기석 대원'(1978년 생, 안동대 산악부)이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캠프 4'를 떠나 악전고투를 이어갔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날씨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예 불가능했다.
그건 전적으로 하늘의 뜻이었고 신의 영역이었다.
갑작스러운 눈폭풍이 휘몰아쳤고 낙빙이 대원들의 생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미사일 같은 낙빙에 한번 맞으면 십중팔구는 목숨까지 위태로웠다.
그런 숨 막히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시시각각으로 원정대를 엄습했다.
수많은 경험과 연륜이 있을지라도 '히말라야'의 악마 같은 날씨 앞에선 아무런 대안이 되지 못했다.
속수무책이었다.
'박 대장'은 무전기를 들었고 정상 개척조의 사정을 BC에 전달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엄청난 눈폭풍과 낙빙,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최악의 악천후로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캠프 4'로 철수하겠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마지막 교신 이후에 BC에서 수도 없이 무전을 날렸지만 개척조의 응답이나 반응은 아예 없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지만 날이 새도록 '캠프 4'로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 무거운 침묵만이 함께 원정을 떠났던 대원들을 아프게 짓누르고 있었다.

날이 밝자 대대적인 수색을 진행했다.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땀방울도 끝내 허사로 돌아갔다.
무지막지한 눈사태로 인해 '안나푸르나 남벽'의 모든 것들이 이미 휩쓸린 뒤였다.
아무런 발자국도, 실오라기 하나도, 작은 천조각이나 등산 용품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대한산악회'에서 등반 전문가들을 '네팔'로 급파하여 제2차, 제3차로 '정밀수색'을 펼쳤지만 그것마저도 역시 무위로 끝났다.
 
수백 미터 깊이의 '크레바스'로 추락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엄청난 눈사태로 인해 그 두께를 측량할 수 없는 '영겁의 만년설'에 갇혔을 수도 있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아무도 그 진상을 알지 못했다.
수색대가 곳곳에서 '코리안 루트' 개척조 대원들을 목놓아 불렀으나 거대한 히말라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산악인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은 2011년 10월 18일에, '안나푸르나 남벽' 5700M 지점에서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산'으로, 강렬한 불꽃처럼 승화됐다.
또한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롱한 '별'이 되어 각인됐다.
그들은 유달리 산을 사랑했었다.
매 순간을 산과 함께 호흡했고 평생을 산과 함께 살았던 위대한 '알피니스트'였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심심한 '오마주'를 보내며 마음을 모아 세 분의 명복을 빈다.
 
2025년 10월, 작년 추석 연휴에 12일 간 우리 부부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레킹에 도전했었다.
트레킹 시작 5일 만에 드디어 ABC에 도착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ABC 뒤편으로 올라가 보았다.
약 4200M 지점에 '추모비' 하나가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며 경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가 최악의 악천후로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산이 되었던 세 사람, 바로 그들을 기리는 '추모비'였다.
ABC에 도착했던 날 늦은 오후에도, 그다음 날 이른 새벽에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국 트레커들'은 자발적으로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나도 산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 마음속 영웅들을 생각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CAC(한국산악회, Corean Alpine Club) '등산학교'에서 온 '기숙 씨', '은주 씨', '상현 씨'가 추모비 앞에 'CAC 등산학교' 자리를 펼쳤다.
그 위에 한국에서 가져온 약간의 음식들과 소주를 따라놓고 제를 올렸다.
그리고 전설이 된 세 사람을 위해 우리 일행은 한마음 한뜻으로 큰 절을 올렸다.
큰 절을 드리면서 '기숙 씨'와 '은주 씨'는 먹먹한 울음을 한참 동안 쏟아냈다.
4200M, 이른 아침이라 매서운 냉기가 온몸을 파고들었지만 사람들의 눈물은 하염이 없었다.
특히 '기숙 씨'는 1997년에 '박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 원정대'로 활동하면서 14좌 등반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던 대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랬었기에 더더욱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눌러가며 추모비에 큰 절을 올렸고 이내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곤 몇 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무릎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날 그 아침, 안나푸르나에서 산이 된 세 사람을 추모하던 '기숙 씨'의 눈물은 다른 이들의 눈물보다 더 뜨거웠고 더 진했으며 더 애절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입을 뗄 수 없었다.
어떤 위로도, 어떤 격려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숙연함에 가슴이 아팠고 또 뭉클했다.
그렇게 한동안 '함묵의 시간'이 둔중하게 흐르고 있었다.
 
'CAC 등산학교'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은주 씨'가 자신의 배낭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산이 된 세 사람에게 담배 한 개비씩을 건네고 싶다"라고 했다.
그래서 준비해 왔다고 했다.
'은주 씨'는 비흡연자였다.
나도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그 담뱃갑을 나에게 달라"고 했다.
차례대로 한 개비씩 꺼내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면서 내 입으로 힘차게 빨아댔다.
담배에 불이 붙었다.
그런 다음 추모비 기단 위에 하나씩 하나씩 올려두었다.
세 사람은 평소에 담배를 잘 피우지 않았으나 '하산주'를 마실 땐 가끔씩 피웠다고 했다.
모두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했다.
 
아른 아침에 추모비 앞에서 제를 지낸 뒤 BC로 내려오는 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설파했던 '르네 데카르트'를 생각했다.
설산 위에서 갑자기 '데카르트'의 철학을 논하기 위해 뜬금없이 그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세계 최초로 '코리안 루트' 개척을 위해 죽음과 당당하게 맞섰던,
정녕 웅혼하고 비장했던 원정대의 신념과 의지를 다시 한번 반추하기 위해 '르네 데카르트'의 논거를 잠깐 소환한 것뿐이었다.
<인간은 도전한다. 고로 도전함으로써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행성의 모든 '극지'를 찾아가 치열하게 부딪쳤던 사내들.
각 극지의 '천지신명'께 그렇게 기도했고 정말로 그렇게 살다가 '한날한시'에 함께 떠났던 산 사나이들.
대한민국 산악계의 영원한 레전드 세 사람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모아 깊은 존경과 사랑을 보냈다.
그러면서 내 가슴판에 오마주를 새겼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수도 없이 '조문'과 '문상'을 다녔다.
조문을 다녀올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망자'가 살아온 '햇수'나 '향년'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철학과 양심으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엮어왔는지, 그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별 지구 여행자인 우리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무대는 바로 '귀천'이었다.
그 대단원의 막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정답은 없었다.
'백인백색'이었다.
그 결정은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었다.
동시에 각인의 사유와 선택에 따라 각자의 인생은 얼마든지 다양한 문체로 쓰일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선율로 변주될 수 있었다.
얼마든지 다채로운 색감과 문양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그게 인생이었다.
작년 10월, '안나푸르나'에서 담아 온 사진 몇 장을 소개하면서 이만 글을 맺을까 한다.
각자의 생각, 각자의 마인드, 각자의 스피릿, 작자의 결심과 실행력이 중요할 뿐이다.
사랑발전소 회원님들께 깊은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환절기에 모두 건승하시길 소망한다.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사이. 안온한 분지에 전설이 된 그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2012년 10월 제막)

 

 
 

 

(안나푸르나 코리안 루트 개척 원정대.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대원. 이 곳에서 산이 되다)

 
 
 

 

(이른 아침. 한국 트레커들이 자발적으로 추모비 앞에 모였고 마음을 모아 제를 올렸다)
 
 

 

 
 

(추모비를 떠받치는 기단 위에 담뱃불을 붙여 올려두었다. 죽음보다 더 혹독했던 극한의 상황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던 사내들.
이 담배 한 모금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한국에서 준비해 온 약간의 제수품과 소주 한 병. 그리고 플라스틱 소주잔과 담배 한 갑. 준비는 부실할지라도 마음은 따뜻했다. 부디 편히 영면하시길)
 

 
 
 

 

(2011년 10월 18일에 산이 되었고, 2012년 10월 17일에 추모비를 세웠으며 그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히말라야 14좌에 하나씩 하나씩 전인미답의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위대한 세 분에게 다시 한번 존경과 사랑을 바친다)
 
 
 

 
 
 
위에 올린 사진 '6장'은 ABC에서 내가 직접 찍었던 사진이고,
아래 '2장'은 세 사람의 자료를 검토 및 분석하다가 다운로드한 사진임을 밝혀둔다.
 
 
 
 

 
 

(최고의 파트너, 신동민 & 강기석 대원의 암벽훈련 모습. 미소가 풋풋하고 싱그럽다)

 
 
 
 
 
 

(하늘나라에서도 끝까지 동행하고 있을 위대한 산 사나이들. 이 전설의 산악인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바친다 )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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