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와 딸은 친구처럼 지냈다.
특히 딸이 대학생이 된 이후로 더욱 그랬다.
각자 다른 곳에서 독립된 삶을 엮어갔지만 항상 잘 통했다.
둘만의 '여행'도 자주 다녔다.
둘이서 '템플스테이'도 몇 번을 갔는지 모른다.
통화는 평균 이틀에 한번 꼴로 길게 했다.
아무튼 서로에게 가장 친밀했고 소중한 '친구'로 발전했다.
딸은 24년 10월에 결혼했다.
둘 다 '장교'였다.
딸이 결혼한 뒤로는 '모녀'가 더욱 애틋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중 25년 5월 하순에 딸이 임신을 하게 되자 모녀는 할 얘기들이 더욱 많아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가 다르게 딸의 배가 불러왔다.
26년 2월 24일이 '출산 예정일'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모녀가 그렇겠지만, 내 아내와 딸도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눴다.
딸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친구이자 인생 선배, 그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내 딸은 캠퍼스 시절에 '장교'가 되겠다며 스스로 지원했다.
마침 그 학교에 '여군 학군단'이 창설될 예정이었는데 좌고우면 하지 않았다.
곧바로 '창단멤버'로 들어갔고 그 학교 '1기'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소위'부터 '대위'까지 헌신적으로 복무했다.
군복을 벗기 전에 '군무원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하여 '6급 군무원'이 되었다.
내가 봐도 정말로 뜨겁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두 살 많은 사위는 '소령'이었다.
키도 크고 핸섬했다.
현재는 계룡대 '육군대학'에서 영관급 장교들을 위한 '고등 교육과정'에 입교하여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젊은 커플은 각각 '서울'과 '대전'에서 떨어져 살았다.
'주말부부'였다.
신혼인데 떨어져 사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둘 다 국가의 '공복'으로서 각자의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미덥고 듬직했다.
딸은 출산이 임박하자 1월 31일부로 '출산 휴직계'를 내고 장교로 임관한 지 딱 12년 만에 처음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변화된 일상에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120%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만삭의 몸'이었다.
'산달'은 2월이었다.
2월이 되자 아내와 딸은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했고 문자로 소통도 자주 했다.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했던 엄마와 그 경험을 앞두고 있는 딸의 대화는 깊고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시간은 잘도 흘렀다.
'산본'과 '월계동'에서 모녀는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꿀떡이(태명)'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2월 12일은 '목요일'이었다.
그날 밤 11시 정도에 우리 부부는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베개에 머리가 닿기만 하면 3초 이내에 곯아떨어지는 스타일이라 바로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아내는 딸의 출산이 임박해서 그런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고 했다.
눈만 감고 있을 뿐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극한 '모성본능'이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넘게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잠에 빠진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내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여보, 일어나 봐"
"아니 왜 그래. 지금 몇 신데, 무슨 일 있어?"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벽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새벽 1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여보, 조금 전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어.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네. 엄마가 몇 번 당부했던 대로, 양수가 터져 급하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며칠간 샤워를 못하니까 샤워하고 머리까지 말린 다음 '카카오 택시'를 불러 혼자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하네"
"뭐라고? 혼자서 택시를 타고? 아이고 주여. 어째 이런 일이....."
'혼자'라는 단어에 무식하고 둔감한 내 가슴조차도 저릿했고 미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몹시도 아팠다.
아내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나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아프고 시렸을 터였다.
그러나 심야인 데다가 우리도 거리도 먼 곳에 있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웠지만 그 시간에 딱히 딸을 위해 할 일이 없었다.
2월 하순이 '출산시점'이라 우리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유분수지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만삭인 딸의 양수가 터져 그것도 새벽 1시경에 '혼자'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세상은 우리의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출산 예정일'은 24일이었다.
아직도 12일 정도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고향에서 95세인 어머니와 2박 3일 간 명절을 함께 보내고 바로 상경하여, 아내가 18일부터 '월계동' 딸네 아파트로 가서 함께 지낼 예정이었다.
같이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출산준비'를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사람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대개 그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것도 한밤중에 만삭인 딸의 양수가 터질 줄은 몰랐다.
자정을 넘긴 12시 30분께 '양수'가 터졌다고 했다.
딸은 평소에 엄마가 일렀던 시나리오대로, 급하게 샤워하고 머리까지 말린 다음 간단한 물건만 챙겨서 '카카오 택시'를 부른 것이었다.
너무 급박해 혼자 택시를 타고 15분가량 떨어진 병원으로 가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전화를 받은 시간이 새벽 01시 정도였다.
나는, 딸이 아무리 '장교출신'이고 태생적으로 씩씩한 성격이라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 '사위'도 대전 '계룡대'에 있었다.
단 1%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상상황'이 발생했는데 '산모' 곁엔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도 서둘러 환복 한 다음 차를 몰아 '창동'으로 가려했다.
휴대폰 내비를 켜보니 '산본'에서 도봉구 '창동'까지 '외곽 순환고속도로'로 가면 대략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1시간이든 2-3시간이든 '소요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양수'가 터져 초비상이 걸린 딸을 혼자 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건 부모로서도, 가족으로서도 도저히 인간이 취할 도리가 아니었다.
우리도 '창동'을 향해 막 출발하려는 그 순간, 아내의 휴대폰이 울렸다.
딸이었다.
"병원에 잘 도착했고 야간 당직 선생님을 만나 현재 상황을 상세히 설명 들었다"라고 했다.
"양수가 터진 것은 맞지만 지금 당장 '꿀떡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라고 했단다.
"내일 오전에, 딸을 오랫동안 진찰했던 '담당 선생님'이 나오시면 그때 상황을 보고 상의해서 결정하자"라고 했다.
야간 당직 의사 얘기로는, "지금 상태로 보면 점심 무렵에 '촉진제'를 맞고 '유도분만'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소견이었단다.
"그러니 부모님이 새벽에 병원에 오셔도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집에 계시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대전에서 남편이 택시를 타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엄마, 아빠는 그냥 집에 계세요"라고 했다.
"아니, 사위는 본인 차도 있는데 왜 굳이 택시를 타고 상경하니?"
"제 전화를 받고, 떨리고 걱정되는 마음에 운전이 잘 안 될 것 같다면서 안전을 위해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더 낫겠다"라고 생각했답니다.
딸의 말을 듣는데 과연 일리가 있었고 '사위'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급하면 체하거나 넘어지기 마련이었다.
"역시 우리 딸답다. 잘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다"
나는 딸에게 톡을 보냈다.
"급박한 환경, 그것도 임산부 혼자 있는 상황에서 현명하고 담대하게 행동해 주어 감사하다"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딸도, 사위도 한밤중에 각각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둘 다 현명하고 침착했다.
우리 부부도 소파에 앉아 차분하게 생각해 보았다.
새벽시간에 우리가 병원으로 간다 한들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부인과 병원'에서 '산모와 배우자' 외엔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시스템이 '코로나 사태' 이후로 더욱 엄격해졌고,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신생아 병원들'이 그런 원칙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하루에 단 두 번,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한 아이 당 딱 3분씩만 유리창 너머로 신생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신생아 병원'의 '방역 시스템'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엄격해졌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우리도 거의 뜬눈으로 날을 샜다.
새벽 일찍 집을 떠나 사무실에 도착했다.
2026년 2월 13일, 금요일 새벽에 '큐티'를 진행했다.
여느 때보다 나의 기도가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고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산모'와 '꿀떡이'가 건강하기만을 주님께 간구했다.
간절하고 갈급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큐티를 마치고 이른 아침에 사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남편이자 보호자로서 모든 역할과 케어에 최선을 다 할 테니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듬직했고 미더웠다.
오후 3시경.
딸의 전화를 받았다.
약간 힘겹고 지친 목소리였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안도감'과 '감사'가 짙게 배어 있었다.
"아빠, 저 '꿀떡이' 순산했었요. 제가 아빠 딸이잖아요. 많이 아프고 힘들었지만 잘 이겨냈고 씩씩하게 견뎠어요. 그리고 예쁘고 귀여운 생명을 순산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꿀떡이를 보는 순간 너무 감동했어요. 한 생명의 엄마로서 너무 행복해요. 아빠"
"그래 고맙다. 딸아. 너무너무 수고했고 애썼다. 이제 드디어 네가 '꿀떡이'의 엄마가 되었구나. 자랑스럽고 고맙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도 역시 너는 담대하고 참착하게 잘 대처해 주었다. 그런 판단과 행동에 다시 한번 깊게 감명받았다. 사랑한다. 딸아"
내 가슴도 뭉클했다.
그리고 저릿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잇지 못했고 이을 수 없었다.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 책상머리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끝없이 '감사기도'를 드릴 뿐이었다.
오늘도 '천금' 같이 귀하디 귀한 '시간'이 쉼 없이 흐른다.
급류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렇게 한 세대가 가고 다시 한 세대가 오고 있다.
오늘(토) 점심때 '명절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병원으로 갔다.
사위와 딸에게 '명절음식'을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1시 30분부터 2시 사이에 신생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신생아 보기 '접수순'으로 갓 태어난 아가들을 딱 3분씩 볼 수 있었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예쁜 '꿀떡이'를 딱 3분간 보고 왔다.
조그맣고 여리디 여린 '새 생명' 앞에서 우리의 심장과 영혼은 심하게 요동쳤다.
핏줄에 대한 첫 대면, 그 감동과 전율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했다.
그것은 원초적인 '생의 찬미'였고 시원적인 '감사와 사랑'이었다.
이 땅의 모든 '산모', '아빠', '아가들'에게 하늘의 은총과 축복이 늘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