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싯적엔 산에 자주 갔었다.
'춘하추동' 사계절 내내 산에서 놀거리가 많았다.
또한 산에서 얻을 것도 많았다.
특히 추워지기 시작하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산에서 땔감을 얻는 것이 1순위였다.
난방과 요리를 전적으로 볏짚과 나무에 의존하던 때였다.
60-70년대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모습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산으로 갔다.
애들도 힘을 보태야만 했다.
취사와 난방을 위한 '땔감확보'에 남녀노소가 진력하던 때였다.
'학원'이나 '과외'란 개념이 전혀 없었던 국민학교 시절, 나무하고 물 긷는 기본적인 집안일을 마친 뒤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특히 주말이나 방학 땐 어울려다니며 노는 것도 지겨웠다.
뭔가 색다른 놀이나 간식거리가 필요했다.
그런 땐 삽, 낫, 곡괭이를 들고 산으로 가서 칡을 캤다.
자주 갔었다.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6070 시대엔 산에 나무가 별로 없었다.
칡도 그리 많지 않았다.
시골에선 대부분 베고, 캐기에 바빴다.
나를 비롯해 동네 개구장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두더지처럼 땅을 잘 팠다.
이골이 난 악동들이었다.
칡 캐기엔 그야말로 '달인'이었다.
세월이 급류처럼 흘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농촌을 떠났다.
고교는 군산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세상과 치열하게 부대끼며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다.
사회인이 되자마자 모두가 미친듯이 일했다.
국민들의 그런 노력과 헌신 덕분에 한국은 최빈국에서 '퀀텀점프'를 하여 어느 날 '선진국'이 되었다.
다른 나라가 100년, 200년 걸릴 일들을 우리는 50여 년만에 뚝딱 해치웠다.
전 세계인들이 '코리아의 급부상'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는 새 '주거공간', '생활방식', '삶의 양태'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산은 울창해 졌고 밀림으로 돌변했다.
이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상전벽해'였다.
일정한 면적의 '입목축적량'도 전 세계 탑클라스 수준이었다.
완벽한 '괄목상대'였다.
휴식, 힐링, 치유, 목재 활용 등 울창한 숲이 주는 정서적, 신체적, 경제적, 환경적 가치는 급상승했다.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언제나 양면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한쪽에선 엄청나게 번진 칡넝쿨들이 산림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신경 쓰는 사람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칡을 캐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요놈들의 '번식속도'는 무서울 정도였다.
엄청 빠르고 광범위했다.
작은 뿌리 하나가 산자락 어느 한 곳에 자리 잡으면 수년 내로 그 일대는 초토화 됐다.
천적도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산행이나 트레킹 시에 언제부턴가 나는 배낭에 '정글도'를 넣고 다녔다.
작은 '거버 나이프'로는 굵은 칡순을 제거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묵직한 정글도가 필요했다.
칡순이 어찌나 크고 질긴지 이제는 넝쿨이 아니라 차라리 나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내 눈에 띄면 바로바로 제거하며 산길을 갔다.
칡이 한번 나무를 타고 오르면 필경 나무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경쟁이 되지 않았다.
산길을 5-10미터 가량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간 뒤에 칡순을 찾아 밑동을 잘라냈다.
그런데 막상해보면 그런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어느 땐 벌에 쏘이고, 옷이 찢어졌으며 가시에 얼굴과 손이 긁히기도 했고 경사진 곳에선 넘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본디 산이라는 장소가 그런 곳이었다.
언제나 진득하게, 나무처럼 두꺼운 녀석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면서 갔다.
가다 서고, 가다 서기를 반복하니 아내와 속도가 맞을 리 없었다.
그래서 아내는 가끔씩 눈을 흘겼다.
"당신이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자연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트레킹을 할 때마다 매번 왜 그러느냐"라고 했다.
"당신의 산도 아니고 당신의 일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핀잔도 많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10년, 20년을 꾸준하게 그리 하며 다녔다.
이제는 아내도 거의 포기한 상태다.
내가 배낭에서 정글도를 꺼낼 때면 10-20미터 앞에서 기다려 주었다.
한강에서 한 그물의 잉어를 잡았다고 물고기의 씨가 마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었다.
세상일이 그랬다.
그러나 나는 항상 마음이 걸렸다.
"말 없는 나무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쟤도 필경 칡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너무나도 안타깝다. 나무가 저 정도로 성장하려면 최소 30년 이상은 풍상을 이겨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킹을 위해 배낭을 챙길 때마다 '도시락'보다 '정글도'를 먼저 넣었다.
나도 모르게 매번 그랬다.
손가락 굵기의 칡넝쿨은 너무 많아서 아예 손도 대지 못했다.
최소 팔뚝 정도의 굵기들만 그것도 '주마간산'식으로 제거하며 전진했다.
그래도 땀이 많이 흘렀고, 수백 번의 풀스윙 가격으로 인해 밤이 되면 내 어깨쭉지가 욱신욱신 쑤실 때도 많았다.
'몽골'을 비롯해 세계 여러 지역에서 광활한 사막을 '녹화'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 시작은 어린 묘목 하나, 한 방울의 물, 한 번의 삽질부터 였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였고 '우공이산'이 해법이었다.
늘 그렇게 생각하며 인적이 드문 트레일을 따라 산행을 했고, 후미진 길을 좇아 트레킹을 했다.
이번 명절 때 짬을 내 고향에서 몇 번 트레킹을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또한 개버릇 남에게 못준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창궐한 칡들과 고사 직전의 거목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심한 상황에선 저릿하게 아팠다.
때로는 힘들고 핀잔을 먹을지라도 좋다.
그 일이 자연과 사람을 위해 유익한 행동이라면 그냥 묵묵하게 지속할 생각이다.
물론 칡도 자연의 일부다.
그러나 '나 살겠다고 다른 존재를 죽이는 건' 백 번 천 번 온당치 못한 일이었다.
애당초 칡은 '공생'이 불가한 녀석이었다.
훗날, 현업에서 은퇴하면 그땐 칡순을 제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칡뿌리'까지 '발본색원'할 생각이다.
지금은 하는 일도 많고, 챙길 것도 많다.
늘 시간이 빠듯하다.
칡을 제거함으로써 나무도 살리고, 건강에도 좋은 '칡즙'을 만들어서 각 장애인 공동체나 무의탁 어르신들께 전달해 드리려 한다.
또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몸도 힘들고,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투여되겠지만 세상에 이로운 일이라면 소매를 적극 걷어붙일 예정이다.
파이팅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