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유달리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 국토의 7할이 산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지만, 미래에도 많을 것으로 확신한다.
산을 애정했던 사람들은 국내에서 기본기를 다진 다음 점진적으로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나갔다.
'인지상정'이었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큰 목표를 설정하며 더 어려운 도전에 나서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산꾼들에겐 저마다의 가슴 속에 '그런 꿈들'이 꿈틀거렸다.
그들의 '엘도라도'는 세상의 지붕이었다.
바로 '히말라야' 였다.
극한의 추위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시시각각으로 엄습했다.
하지만 위대한 도전자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동상으로 열 손가락을 절단했던 '김홍빈 대장'의 경우도 그랬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비용적으로 어떤 난관에 봉착할지라도 알피니스트들은 죽음을 불사한 채 길을 떠났다.
그들의 피는 일반인과 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설령 죽음에 이를지라도, 그런 삶이야말로 정녕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마치 신앙 같았다.
목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뜨겁고 더 선명하게 각자의 심장에 옹골진 출사표를 아로새겼다.
그렇게 한국의 많은 산우들이 당찬 포부를 안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성공한 사람도 많았고, 원정에서 고배를 마신 사람도 많았다.
일부는 '히말라야'의 만년설 속에서 영면에 든 사람도 있었다.
운명이었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8천 미터 이상 14좌에 도전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그곳에서 산이 되었던 대한민국의 산꾼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떠올려 보며 기록해 보았다.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서는 함상훈, 남원우, 이진섭, 최병수, 장민, 박무택, 백준호, 오희준, 이현조, 송원빈, 서성호, 이렇게 11명이 그곳에서 산이 되었다.
두 번째 고도인 'K2'(8611M)에서는 박영도, 배경규, 김재영, 이화형, 황동진, 박경효, 김효경, 이렇게 7명이 그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세 번째인 '칸첸중가'(8586M)에서는 진교섭, 현명근, 한도규, 박남수, 이렇게 4명이 히말라야의 별이 되었다.
네 번째인 '로체'(8516M)에서는 황선덕, 박주훈, 이렇게 2명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다섯 번째인 '마칼루'(8465M)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사고 없이 여러 번의 원정을 마칠 수 있었다.
여섯 번째 고도인 '초오유'(8203M)에서는 김수아, 일곱 번째인 다울라기리(8169M)에서는 이수호, 이렇게 각각 1명씩 설산에 묻혔다.
여덟 번째인 '마나슬루'(8165M)에서는 김기섭, 박창희, 오새권, 송준행, 김호섭, 윤치원, 박행수, 이렇게 7명이 구름으로 승화되었다.
아홉 번째인 '낭가파르밧'(8128M)에서는 김광호, 박창기, 안준문, 고미영, 이렇게 4명이 히말라야 산군의 바람이 되었다.
열 번째인 '안나푸르나'(8092M)에서는 정양근, 이석주, 이상구, 지현옥,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이렇게 7명이 산의 품에 안겼다.
열한 번째인 '가셔브룸 1봉'(8080M)에서는 역시 아무런 사고나 문제없이 원정을 마무리 지었다.
열두 번째인 '브로드피크'(8051M)에서는 장영일, 박현재, 한동근, 양재모, 임순택, 현성광, 김홍빈, 이렇게 7명이 그곳에서 전설이 되었다.
열세 번째인 '가셔브룸 2봉'(8035M)에서는 감사하게도 원정을 떠났던 모든 대원들이 무탈하게 정상을 찍고 하산했다.
열네 번째 고도인 '시샤팡마'(8027M)에서는 박병태, 한 명이 귀천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히말라야 14좌에서만 한국 최고의 알피니스트 총 52명이 그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몹시도 산을 사랑했던 그들은 산의 품 안에서 끝내 전설이 되었다.
14좌뿐만 아니라 '7 대륙 최고봉'인 아시아의 '에베레스트'(8847M),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5892M), 오세아니아의 '푼착자야'(칼스텐즈, 4884M), 남미의 '아콩카과'(6962M), 유럽의 '앨부르즈'(5642M), 북미의 '데날리'(맥킨리, 6194M), 남극의 '빈스 매시프'(4892M)에서도 유명을 달리한 도전자들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생명'은 최고의 가치였다.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죽음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 그곳을 향한 위대한 도전이 누군가에겐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일 수 있었다.
이 세상엔 모래알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만큼 저마다의 철학도, 신념도 달랐다.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므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죽음도 불사했던 뜨거운 탐험들.
나도 산을 좋아하지만 그런 웅혼한 발자국을 떠올릴 때마다 낮은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부부가 작년 가을에 '안나푸르나'에 갔을 때였다.
그 산에서 별이 된 '지현옥 님'의 추모비 앞에서 큰 절을 올리며 기도했다.
만감이 교차했었다.
'지현옥 님'은 1959년 1월 20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서원대 산악부' 출신이었다.
1988년에 한국 여성 최초로 '데날리(매킨리)' 등정에 성공했고 1991년엔 '신장위그루'에 있는 '무즈타그 아타산'(7546M)을 등정했다.
1993년엔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역시 대한민국 여성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1999년 4월에 '엄홍길 대장'과 함께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했으나 하산 도중 7900M 지점에서 깊은 크레바스로 추락해 실종되었다.
그날이 1999년 4월 29일이었다.
향년 40세였다.
그녀의 위대한 도전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도에 '지현옥 추모비'를 건립했다.
'안나푸르나' 정상이 잘 보이는 지점에 세웠다.
뜨겁고 순결했던 '지현옥 님'의 넋을 기리는 산 자들의 '애정의 결집'이자 '추억의 염원'이었다.
일생 동안 무난하게 살다가 무난하게 천수를 누린 삶도 멋진 인생이었다.
작금의 세상을 두루두루 살펴보아도, 실제로 '무풍지대'만을 찾아다니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뜨거운 정열과 원대한 목표로 도전의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인생이 더 낫고, 더 감동적인 삶인 지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각자의 철학과 신념에 따라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니까 말이다.
또한 몇 년을 살다 떠났는가가 인생의 핵심도 아니다.
지구라는 푸른 별에서 잠간 동안 여행을 하다가 빈손으로 귀천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며 속성이니까.
푸른별 여행 중에 적어도 어느 한 분야에서 만큼은 확실하게 획을 그었던 사람들의 가슴 뜨거운 삶에 대해 진심 어린 오마주를 보내고 싶어 펜을 들었다.
그런 마음 하나뿐이었다.
그들을 추모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을 반추하면 할수록 인생의 의미와 삶의 향기가 더 깊고 진하게 내 영혼으로 스며들었다.
한창나이에 극한의 도전에 나섰다가 그곳에서 별이 된 전설들에게 마음을 모아 '존경과 감사의 찬미'를 건네고 싶었다.
그래서 5개월 만에 펜을 들었다.
추모비에 간단한 제를 지내는데 '기숙 씨'가 그랬다.
그녀는 젊었을 때 여러 차례 '히말라야 원정대'에서 뜨겁게 활동했던 '전문 산악인'이었다.
지금은 무릎이 아파 고생하고 있었다.
"인생 그리 길지 않아요. 우리도 곧 만날 거예요. 언니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 산에서 편히 영면하세요. 언젠가 '현옥 언니', '박 대장', '동민이', '기석이' 그리고 '히말라야'를 사랑했던 많은 '산우들'을 만나게 되면 그때 산에 대한 얘기들을 더 많이 나누고 싶네요. 많이 그립고 사랑합니다"
'기숙 씨'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숙연하고 숙연하고 또 숙연할 따름이었다.
'안나푸르나'에 다녀온 지 벌써 다섯 달 정도 됐다.
그런데 아직도 '삶과 죽음'에 대한 화두가 내 뇌리에서 지워지거나 옅어지지 않았다.
나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더 또렷해지고 있다.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큐티를 하면 할수록 더욱 확실해지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생야전기현, 사야전기현>이었다.
딱 이 한 문장이었다.
2월 한 달 동안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오늘부터 3일간 연휴다.
활기차고 아름다운 연휴가 되길 빈다.
파이팅.
(산악인 지현옥 님 추모비. 서원대 산악부의 전설이자 한국 산악계의 큰 별이었다)
(안나푸르나가 잘 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 위대한 도전자를 위한 추모비를 세웠다. 2017년)
(현옥 언니에 대한 추억을 술회했던 전문 산악인 출신 기숙 씨. 곧 만나자며 눈물을 떨궜다)
(수많은 승리, 애환, 슬픔, 한을 머금고 있는 히말라야. 그래도 누군가는 배낭을 메고 신발끈을 조이며 오늘도 거친 산길을 나서고 있다. 지구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죽음의 공포조차도 한순간에 녹여버리는, 뜨거운 도전과 목숨 건 탐험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좋다. 푹신한 소파와 빵이 있다고 하여 삶이 늘 행복한 건 아니다. 그게 삶이다. 오늘도 푸른 별 지구 여행자들의 가슴이 빠르게 뛴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덧붙임)
최악의 참사였다.
2015년 4월 25일이었다.
네팔에서 규모 8의 강진이 발생했다.
가옥 14만 채, 학교 5천 곳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사망자는 8,964명
부상자는 21,952명이었다.
네팔 국민의 26%인 약 8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앙이었다.
이날,
에베레스트에서만 18명이 죽었고 6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산뿐만 아니라 다양한 고산과 계곡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스러졌다.
2025년 기준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6,000 달러였고 네팔의 국민소득은 1,500 달러였다.
우리의 24분의 1이었다.
이 단 한 번의 지진으로
네필 GDP의 35%가 소멸되었다.
경제는 10년 이상 퇴보했다.
이 엄청난 자연의 재앙 앞에 옷깃을 여미며
먼저 가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