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아픈 손가락

칸나이

작성자현기욱|작성시간26.03.02|조회수55 목록 댓글 0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는 수시로 아들을 불러, 아들이 살아갈 인생의 확고한 좌표와 분명한 미션을 주지시켰다.
아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적국에 대한 토벌과 타도를 가슴판에 새겼다.
전쟁의 포화는 진작에 멈췄으나 불씨는 절대로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를 이어 더 뜨거운 격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임계점을 만나면 무섭게 폭발하고 말리라.
 
고대 지중해.
그 광활한 바다에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양국은 명운을 건 채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백척간두의 대척점이었다.
BC든 AD든, '투키디데스 트랩'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단 한번도 예외가 없었다.
'카르타고'와 '로마'도 그랬다.
양국의 명운이 걸린 '제2차 포에니 전쟁'(BC 247-183)도 그 원칙을 비켜가지 않았다.
시나브로 양국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여러번 아들을 불러 조국의 미래를 당부했던 아버지는 바로 '카르타고'의 뛰어난 장수 '하밀카르 바르카'였다.
아버지로부터 조국의 안위와 영광에 대해 엄숙한 가르침을 받았던 아들은 훗날 '고대 전쟁사'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시 쓰게 만들었던 유능한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를 빼놓고 인류의 전생사를 얘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최고의 전략가이자 용맹무쌍했던 불멸의 횃불, 그는 '한니발 바르카(BC 247-183)'였다.
 
'하밀카르'의 조국 '카르타고'는 작금의 아프리카 대륙 최북단, '튀니지' 지역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최대 '요충지'였다.
'로마'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카르타고'와 '로마'도 그들이 처한 지정학적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당시 세상의 옴파로스는 단연코 '지중해'였다.
이 바다에 대한 제해권을 움켜쥐기 위한 처절한 쟁투가 간헐적인 활화산처럼 불을 뿜었다.
하늘 아래 해가 하나인 것처럼 달도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에서 패한 '하밀카르'는 조국을 떠나 바다를 건넜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다.
작금의 '스페인'이 있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로마'에게 복수할 날을 기약하며 칼을 갈았다.
크고 작은 전투에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용맹하게 싸웠다.
그러나 끝내 로마정벌에 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전장에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바람대로 전장에 뼈를 묻은 것이었다.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은 다부지고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냉철했다.
또한 절제력과 지략이 뛰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영지'를 책임지는 총사령관에 책봉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세상을 뒤흔들며 시대를 재편할 영웅의 등극이었다.
고대 유럽은 지중해가 세상의 전부였다.
그밖의 땅들, 즉 현재의 프랑스나 독일, 폴란드 같은 광활한 대지는 주목하는 이 별로 없었던 세상의 변방일 뿐이었다.
 
내부 정비가 끝나자 '한니발'은 거병했다.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곧바로 '사군툼'을 공략했다.
그 당시 '사군툼'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접경지역에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카르타고' 입장에선 그 존재가 늘 눈엣가시였다.
'사군툼'으로의 진격은 '제2차 포에니전쟁'의 서막은 알리는 진군나팔이었다.
 
"아버지의 한을 갚고, 조국의 영광을 드높이자"
그는 칼을 빼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절치부심'했던가.
그것은 '로마'에 대한 '와신상담'이었고 증오의 분출이었다.
BC 219년의 일이었다.
 
'사군툼'의 공략, 그것이 곧 본격적인 전투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로마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적들의 정세와 전쟁대비를 테스트하는 수준이었다.
나도 알고, 상대도 예측할 수 있는 방책은 이미 전략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계책으로 과감하게 상대방의 허를 찔러야 했다.
그것이 뛰어난 전략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분석했고 연구했다.
'한니발'의 진정한 파워와 위대함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니발'은 한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있었다.
그 스승은, 젊은 나이에 지중해부터 인도까지 드넓은 영토를 개척했던 걸출한 장수였다.
그 장수는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약 300년 동안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드로스'(BC 356-323)였다.
'한니발'은 그 '알렉산더 대왕'을 흠모했다.
그의 지략을 세밀하게 분석했고 철저하게 벤치마킹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유창했던 '한니발'은 끊임없이 학습하며 내일을 준비했다.
유사 이래 최고의 지략가인 동시에 불멸의 장수로 평가받는 '한니발'이었다.
그의 비결은 이처럼 끝없는 학습과 자기절제 그리고 불굴의 용기에 있었다.
 
아군도, 적군도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요충지는 전장으로 삼지 않았다.
누구나 다 간파할 수 있는 뻔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에 진을 친 채 이전투구하며 에너지와 물자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짓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로 진격할 때 꼭 거쳐야만 했던 지역이 있었다.
'마르세유'였다.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군'과 전투를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태리 반도'를 철저하게 유린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기존의 틀을 과감하게 갈아엎어야 했다.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전혀 새로운 전략으로 로마의 허를 찔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피레네'를 넘고 '알프스'를 넘자. 그것도 이 세상 그 어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혹한의 한겨울에 말이다"
정말로 뜬금 없는 계책이었다.
그당시 최고의 공포였던 역병보다 더 무섭고 더 무식한 계략이었다.
그것은 병사들의 숱한 주검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진군이었다.
'한니발'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떤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전략이었다.
한겨울에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는 넘어?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았다면 누가 있어 감히 이런 전략을 세울 것이며, 실행에 옮길 것인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기에 최고의 지략이자 묘책이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계책이 '중국 고대사'에도 있었다.
'촉한의 멸망'과 관련된 전쟁상황이 그랬다.
왕조의 기운이 서산에 걸렸던 '풍전등화'의 '촉나라'.
건국의 아버지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 '유선'이 보위를 이었으나 그는 '주지육림'에 빠져 국사를 잊고 살았다.
'강유장군'(촉나라)의 2만 군사와 '종회장군'(위나라)의 10만 군사가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두 나라 사이의 유일한 협곡에서
목숨을 건 채 대치하고 있었다.
그 통로는 마치 참새의 목구멍 같이 작고 좁았다.
그곳이 바로 '검문관'이었다.
 
위나라의 '등회장군'은 결단을 내렸다.
이곳에서 일진일퇴를 해봤자 어차피 성패는 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촉나라의 허를 찌르고 싶었다.
잘 훈련된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산길을 개척하며 전진했다.
그랬던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전인미답의 협곡을 건넜고, 죽음을 불사한 채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랐다.
온갖 고초를 극복한 뒤에 드디어 초의 주력부대를 측후면에서 공략했다.
촉은 완벽하게 허를 찔리고 말았다.
하늘도 땅도 예상치 못했던 완벽한 기습이었다.
촉한의 42년 '종묘사직'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절묘한 지략이었다.
그러나 위나라 '등회장군'의 이 작전도 '한니발'의 '피레네, 알프스 원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등회'의 지략은 '한니발'의 계책보다 480여 년이나 뒤늦은 싯점이었다.
 
그만큼 '한니발'의 작전은 기발했고 출중했다.
그러나 그 댓가는 혹독했다.
극한의 추위와 배고품 속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물자는 탕진되었고 보급도 끊겼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병 시 보병이 약 9만, 기병이 1만2천, 전투 코끼리가 37마리였다.
그러나 '피레네 산맥'을 넘고 '갈리아 땅'을 꺼치며 알프스 북사면에 도착했을 때 보병은 3만8천, 기병은 8천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일부는 진군 중에 전사했고 일부는 탈영했다.
한겨울에 '한니발 군대'가 '알프스'를 넘었을 때 최종적으로 보병은 2만 명이었고, 기병은 6천이었으며 전투 코끼리는 전멸된 상태였다.
피해가 극심했으나 완벽하게 로마의 허를 찌른 건 사실이었다.
 
피해가 심하다고하여 포기할 '한니발'도 아니었고, 회군할 '카르타고' 군사들도 아니었다.
온갖 신산과 처절한 고행 속에서도 그들은 한 발 한 발 목숨을 건 채 진격했다.
끝내 지옥의 땅, 한겨울의 '알프스'를 넘어 북부 로마에 당도했을 때 한니발의 군대는 고작 보병 2만에 기병 6천 정도였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댓가였다.
재정비가 시급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하늘이 내린 축복이 아직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왜 목숨 걸고 원정에 나섰는 지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이었다.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후에 양측은 다시 치열하게 격돌했다.
'이태리 반도' 북부에서의 피어오른 최초의 전쟁포화, 그것이 바로 '타키누스 전투'였다.
넋놓고 있다가 허를 찔린 '로마군'과 목숨걸고 알프스를 넘어 온 '카르타고군', 양자의 사기와 투지는 애시당초 비교를 불허했다.
'한니발'의 압승이었다.
이 싸움으로 북부는 대부분 '카르타고군'의 칼날로 인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계속 남진하는 동안 2차 전투에서 '한니발'은 심한 눈병에 걸려 결국 한 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로마를 향한 철저한 응징만이 그의 가슴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승기를 잡은 '한니발'은 바로 로마로 진격하지 않았다.
쪽빛물결이 넘실대는 '아드리아해'를 따라(이태리 반도의 동부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던 남부의 여러 영지들을 완벽하게 제압할 심산이었다.
남부까지 제압한 후에 비로소 세상의 중심인 로마의 명줄을 끊어버릴 심산이었다.
 
로마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 최강이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규범과 제도도 오늘날의 제국들 못지 않게 잘 조직되어 있었다.
열린 사회였고 포용과 관용의 나라였다.
로마도 곧바로 대규모의 군단을 출범시켰다.
두 명의 집정관, 즉 '파울루스'와 '바로'가 전면에 나섰다.
전열을 갖춘 로마군단은 철천지 원수, '카르타고군'을 섬멸하기 위해 남부로 진격했다.
엄청난 거병이었다.
국운이 걸린 전투가 될 터였다.
 
양국의 운명은 그렇게 이태리반도 동남부에서 결판이 날 예정이었다.
그곳이 바로 역사의 패권을 놓고 처절하게 결돌했던 '칸나이 평원'이었다.
세상의 두 기둥, '카르타고'와 '로마'는 그 칸나이 평원에서 운명의 백천간두를 향해 빠르게 치닫고 있었다.
풍부한 물자와 최신 장비로 중무장한 로마군 8만 7천과 숱한 싸움에서 단금질되고 예리하게 벼려진 카르타고군 5만이 최후의 일전을 앞둔 채 대치하고 있었다.
집정관 '바로'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전쟁장비와 병사의 숫자 면에서 우세한 형국을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략의 아버지 '한니발'의 기지와 계책을 극복할 순 없었다.
 
'바로'의 군대는 직사각형의 대오를 취하고 있었다.
정면돌파 방식이었다.
전통적인 병법이었다.
진부했다.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초승달 대형'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활용하셨던 '학익진 또는 일자진'과 비슷했다.
중무장한 보병을 초승달 대형으로 길게 배치했고 그 대열의 양 끄트머리엔 잘 훈련된 '정예 기병대'가 진군의 나팔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의 군대도 기병대를 갖고 있었으나 '한니발'의 기병대와는 전투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바로'는 여전히 중무장한 보병에, 한니발은 학익진의 정예 기병대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 점이 '바로'의 한계였고 '한니발'의 남다른 지략이었다.
 
개전이 되자마자 '한니발'의 기병대가 '바로'의 기병대를 단숨에 초토화시켰다.
추풍낙엽이었다.
승기를 잡은 '한니발'의 기병대는 '로마군'의 보병 주력부대를 에워싸며 측면과 후면에서 무참한 도륙을 자행했다.
초승달 대형의 카르타고 보병들도 직사각형의 로마군을 급속도로 포위해 들어갔다.
전면에만 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바로'의 군대는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받게되자 곧바로 '오합지졸'로 돌변했다.
금세 대오가 무너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바로'가 선택했던 작전은 참담한 패배로 이어졌다.
완벽한 패착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로마군은 오도가도 못한 채 철책에 갇힌 패잔병일 뿐이었다.
무자비한 살육이 뒤따랐다.
'칸나이 평원'은 순식간에 '섬멸의 강'이자 '도륙의 바다'로 돌변했다.
시뻘겋게 솟구쳤던 로마군의 핏물이 드넓은 칸나이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끔찍한 대학살이었다.
BC 216년 8월 2일이었다.
그날따라 지중해의 태양은 더없이 드높았고 하늘은 맑았다.
 
'카르타고군'은 6천이 죽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열두 배인 7만이 몰살당했다.
1만은 포로가 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주검들이 대평원을 벌겋게 물들였다.
애시당초 집정관 '바로'는 용맹한 지략가 '한니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가엾은 로마의 병사들은 추풍에 낙엽지듯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다.
'로마군'의 씻을 수 없는 패전이었다.
그것은 병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공부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았던, 그러면서 과거의 성공방식에만 집착했던 리더의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었다.
 
오늘은 2016년 7월 26일이다.
지금 이 순간, 자기 스스로를 '리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다시 한번 이 대목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어제 성공했던 전략이 오늘도 잘 먹혀들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위험한 착각이다.
끊임없이 '자기진부화'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리더의 태만은 리더 혼자만의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조직 구성원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 사유의 여정은 이태리 반도 동남부에 있는 '칸나이'였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채 고대 전쟁사를 사유하고 있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칸나이'.
지금은 업무에 바빠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역사의 현장들을 하나씩 하나씩 탐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계속해서 내 노트에 '사유의 흔적들'을 열심히 기록하고 있기에 언젠가는 꼭 한번씩 탐방해 보려고 한다.
가서 그 치열했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쟁, 혁명의 교훈과 통찰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배울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주마간산일 망정 '한니발'의 스토리텔링을 한번 기술해 보았다.
한니발 스토리가 모두 종결된 것도 아니다.
오늘 내 사유의 여정은 북부 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출발해 '피레네', '갈리아', '알프스'를 넘어 '칸나이'까지 원정의 여정을 따라가 보았다.
'제2차 포에니전쟁'의 결말, 로마가 낳은 최고의 장수 '스키피오 장군'의 카르타고 정벌, 한니발과의 치열했던 '자마전투', 한니발의 최후, '카르타고 왕국의 몰락' 등은 다음에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기술해 보기로 하자.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략의 아버지', '한니발'에 대해서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 더 심도있게 기술해 보고 싶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잠간씩 짬을 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화도 많이 울렸고 외부에서 미팅도 잦다.
늘 시간이 빠듯하여 아쉽지만 이 또한 내가 엮어가는 고마운 일상이기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언젠가 은퇴하면 책의 향기속에 푹 파묻혀 살고 싶다.
 
오늘도 사랑하는 모든 분들, 내내 행복하시고 평안하시길 빈다.
또한 무더위에 건강관리도 잘 하시길 기도한다.
인생은 언제나 아름답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이태리 남부 '칸나이 대평원'과 '한니발'의 지략을 생각하며.
그가 갔던 긴 원정길을 따라 가며 사유의 노트에 몇 줄 적어 보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