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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손가락

그날이 오면

작성자현기욱|작성시간26.03.28|조회수53 목록 댓글 0

 

 

2026년 3월 25일에 한 인간이 죽었다.

그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었다.

재야인사, 민주세력, 대학생들,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수많은 정치인들에게 온갖 고문과 폭행을 자행했던 '인면수심'의 야수였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었던 '저승사자'였고, 독재정권의 '충견'이었다.

그는 고문과 조작의 달인이었던 탓에 유달리 승진이 빨랐고 종국엔 훈장까지 받았다.

그랬던 '고문 기술자'가 고독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인생의 헛됨과 삿됨에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근안'이 죽었다는 기사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고문, 폭력, 압제, 핍박, 절규, 피울음이 내 가슴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내가 2018년 1월에 써두었던 글이 생각났다.

그 글을 찾아서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아니,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그의 정권은 7년 내내 서슬 퍼런 암흑기였다.

'광주'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태어난 사생아였다.

또한 정통성이 없었기에 철권통치로 일관했던 '역사의 이단아'였다.

냉혹한 시절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민주주의가 막 움트기 시작했던 '문전옥답'에 인정사정없이 제초제를 뿌려댔다.

독성이 강해 뿌리까지 말라 죽기 일쑤였다.

좌절과 절망으로 어린 새싹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또한 재야인사, 선량한 학생들, 민주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불법으로 구금했다.

 

수많은 양심수와 민주인사들을 고문하고 폭행해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갔다.

시도 때도 없이 언론엔 재갈을 물렸다.

또한 수시로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세상에 경종을 울려대면서 비열한 정권의 보위를 획책했다.

애당초 잘못 태어난 '독재정권'이었지만 서푼짜리 권력을 손에 쥔 채 정권의 시녀노릇에 매진했던 얼빠진 인간들도 적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 때 충견을 자처했던 '안기부'와 '경찰'이 바로 그들이었다.

 

1987년의 겨울은 매우 춥고 암울했다.

그해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22살 '박종철 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죽었다.

천인공노할 '물고문' 때문이었다.

명백한 '고문치사'였다.

하지만 경찰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테이블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과실치사'로 위장했다.

 

말도 안 되는 경찰의 궤변에 국민의 분노지수는 측정이 불가할 정도로 끓어 올랐다.

비등점을 향해 빠르게 치닫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과 거짓으로 일관했다.

위정자들과 부역자들의 머릿속엔 정권의 보위만 가득할 뿐 국민의 평안과 복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 죄 없는 스물두 살 청년의 안타까운 주검.

그의 절명으로 인한 후폭풍이 팔도강산을 야멸차게 할퀴며 지나갔다.

광풍이었다.

그 반향은 민주화를 향한 강력한 허리케인이 되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서운 기세였다.

1987년 1월 14일, 그날 이전엔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 이름.

1987년 1월 14일, 그날 이후엔 누구라도 다 알게 되었던 그 이름.

그가 바로 1965년 생, '고 박종철' 열사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엄청난 파도를 일으켰다.

성난 민심은, 독재를 청산하고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이자 새 시대를 갈구하는 애끓는 비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광주의 피눈물'을 기억하자며 처절하게 절규했던,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분출했다.

모두가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눈물겹고 결의에 찬 투쟁으로 승화될 수밖에 없었던 엄중한 시국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결정적인 뇌관으로 작용했다.

 

요원의 불길처럼 민주화 요구는 전국을 강타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으로 모였고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쳤다.

그 뜨거웠던 구호는 '독재타도'와 '호헌철폐'였다.

더 이상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가 아니라 국민들이 투표로 직접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피 맺힌 절규였다.

그래야만 선거를 통해 독재를 일소하고 정통성이 부여된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터였다.

절박함과 애틋함이 꽁꽁 언 대지를 시나브로 녹여내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 뜨거운 열기는 변곡점을 향해 치달았다.

민주주의를 향한 간절한 염원과 소망, 그 결의에 찬 국민들의 대오엔 제동장치가 없었다.

그래서 멈출 수도 없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국민주권'을 향한 거대한 쓰나미를 막아설 수 없었다.

'시대의 요청'이자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해 여름은 무척 덥고 습했다.

1987년 6월 9일.

또 한 명의 아까운 젊은이가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절명했다.

국민들은 절망했고 다시 한번 격분했다.

그 청년은 66년 생, 겨우 스물한 살 청년이었다.

여리고 명석했던 그는 연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고 이한열' 열사였다.

그의 가엾은 절명은 불타는 요원에 기름을 붓게 만든 결정적인 트리거였다.

걷잡을 수 없었다.

정치인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인, 주부, 노인, 청소년들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자발적인 집결이자 '거룩한 분노'였다.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평균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독재타도'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궐기했다.

두 젊은이의 안타까운 희생 앞에서 세상은 붉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폭력경찰의 만행에 대한 공분이 뜨거운 눈물과 절규로 솟구쳤다.

백성들의 응축된 분노와 민주화를 향한 열기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역대급 폭풍이었다.

그 거룩한 분노는 준엄하고 단호했다.

 

민주와 자유를 위해,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리라는 국민들의 명령은 준엄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파는 끝내 그 명령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민심이 곧 천심이었다.

총칼과 탱크로 무자비하게 짓밟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규모도 아니었다.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금자탑'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바로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이었다.

 

군사독재의 숙주였던 민정당과 그 당의 대표였던 노태우가 끝내 백기를 들었다.

'국민의 준엄한 명령'을 받들겠다고 선언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역사적인 '6.29 선언'이었다.

드디어 우리도 우리의 지도자를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보다도 더 극적이고 더 빛나는 '무혈혁명'이었다.

또한 시민들의 완벽한 승리였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 '교육 자율화', '평화적인 정권이양' 등 선진 민주사회로 가는 기틀을 시민의 힘으로 구현했다.

무수한 핍박과 압제 속에서도, 심지어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불타는 의지는 결코 식지 않았다.

'6월 민주항쟁'으로 촉발된 대한민국 민주주의 찬란한 개화.

그 눈물겨운 축배도 바로 국민들의 단합된 마음과 정신의 승리였다.

 

나보다 1년 후배인 '종철이', 2년 후배인 '한열이'가 희생되었던 1987년.

나는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서 복무 중에 있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85년에 해병대에 자원입대했고 87년엔 부대의 '하리마오'였다.

그 당시엔 군대 내에 세상의 정보와 언로가 매우 제한적인 상황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대원들도 외부의 실상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시국이 매우 위중하다는 것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특수부대 '고유의 미션'을 수도 없이 점검하고 대비하며 지냈다.

 

위급한 시국에 적들의 무모한 준동이 감지되거나 조국의 명령이 하달되면 우리는 즉각 미션에 투입될 터였다.

우리는 학생들의 시위나 국민들의 봉기를 제압하는 부대가 아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지체없이 바로 북한으로 기습침투하여 매우 특별한 미션을 수행하는 부대였다.

소수정예가 신속하게 기동하여 다양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철저하고 예리하게 담금질 되어 있었다.

우리 대원들은 저마다 '일기당천'의 특급 전사들이었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조국을 위한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20대 초반, 가슴 뜨거웠던 그 당시에는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과장이 아니다.

진짜로 그랬다.

 

그렇게 긴박했던 1987년의 상반기가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었다.

'6.29 선언' 이후에 비로소 부대의 긴장감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1987년 12월 24일에 전역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새봄이 되었을 때 다시 캠퍼스로 복귀했다.

1988년 3월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간의 사정과 정서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87년 1월에 '박종철 열사', 6월에 '이한열 열사'의 값진 희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분노의 물결이 거대하게 출렁였다는 것.

국민의 간절한 소망과 일치된 단결로 빛나는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

그런 큰 팩트는 부대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복을 입고 있을 땐 세상의 밑바닥에 흐르던 시대정신과 세세한 정황을 잘 알 길이 없었다.

그랬던 까닭에 먼저 가신 '민주열사들'에 대한 송구함과 회한을 떨쳐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은 그 이름, '박종철과 이한열'.

최근에 영화 '1987'을 보았다.

비통함과 애절함으로 눈물이 많이 쏟아졌다.

두 열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주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민주와 자유를 위해 절규하며 헌신할 때, 나는 구체적인 실상을 모른 채 외진 산속에서 세상과 격리되어 지냈다.

국민이나 군인이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국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동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분과 역할이 현저하게 달랐으므로 각기 다른 방식과 다른 모습으로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 부대에 부여된 '고유한 미션'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실제적으로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자발적인 신념으로 숱한 땀과 눈물을 쏟았다.

고강도 특수훈련에 나의 심신을 온전하게 갈아 넣고 있었다.

그렇게 뜨겁게 복무하다 87년 연말에 전역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1987년의 그 뜨거웠던 '민주항쟁'에 나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던 현실 앞에,

훗날 진한 아쉬움과 회한이 남았다.

하지만 나는 충직한 군인으로서 나의 분본에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매 순간 우리 조국을 위해 정열과 헌신을 불사르며 복무했다.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곡점을 통과했던 1987년에 내가 서울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배웠을 것인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몇 년 간 '대한민국의 안위'를 책임졌던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목숨 바쳐 최선을 다했던 시기였기에 결코 후회는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던 30년 전의 피 끓는 역사를, '장준환 감독'이 멋진 작품으로 승화시켜 세상에 내놓았다.

여러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했고 눈물이 벌컥 쏟아졌다.

감동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전율도 일었다.

이 지면을 빌려 '장 감독'에게 다시 한번 진심 어린 오마주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로 인해 우리의 삶과 조국의 미래에 대해 한번 더 깊게 사유할 수 있었던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과 소명을 각자의 가슴판에 한번 더 새길 수 있었다.

이제는 깨닫고 느꼈던 바를 말이 아니라 진중하게 실천하며 살고 싶다.

믿음과 소망이 '앎'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승화될 수 있어야만 값진 삶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당신들이 떠난 이후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그 정신과 기개를 우리는 절대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엄청난 파도를 뚫고 전진하면서 수많은 일들을 성취해 냈지요.

철저하게 무능했고 시대의 요청에 눈감았던 '박근혜 정부'를 탄핵했고, 청년기부터 약자 편에서 고군분투했던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민주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으나 위정자들의 부패와 변절 앞에선 단호한 채찍을 들었고, 변명과 궤변엔 법과 원칙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응징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배신, 거짓과 모반은 일소하되 공정과 헌신엔 아낌없는 박수도 보내고 있지요.

백 마디 말보다 침묵 속의 실천으로 우리 조국을 반석 위에 반듯하게 세우겠습니다.

이 기도와 간구를, 두 열사를 비롯한 모든 민주영령들께 성심을 다해 약속하는 바입니다.

부디 우리 조국을 굽어살펴 주소서.

 

영화가 끝났다.

관객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30여 년 전에 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합창했던 '그 노래'를 가슴속으로 열창했다.

이 영화의 부제도 그래서 '그날이 오면(When the day comes)'이 아니던가.

가사를 음미하며 한번 더 읊조려 보았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이 노랫말은 음미하면 할수록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역사가 간곡한 당부를 던지는 듯했다.

"그곳에 없던 자 알지 못하고 그곳에 있던 자 잊지 못하리"

"비루한 일상을 뛰어넘어 진정한 용기와 결단으로 참세상 만들리"

 

한 초롱의 물이라도 메마른 대지에 열심히 뿌리고 싶다.

그리하여 작은 생명체 하나라도 더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고 싶다.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되고 길을 잃으면 잠시 헤매면 그만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긴 인생에서 최종 '목적지'와 '좌표'를 잊지 않는 것이리라.

오늘 새벽 큐티 시간에도, 인생의 분명한 좌표를 되새기며 '사명이 이끄는 삶'을 살겠노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열심히 일하자.

돈도 벌자.

그런 값진 소득으로 각자의 가정과 마을과 이웃들을 돕고 섬기자.

한평생 내 가족만의 호의호식을 위해 진력하는 삶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역사에 향기로운 족적을 남기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극장을 나서며 내 또래였던 '두 열사'를 생각했다.

하늘나라에서도 부디 우리 조국을 굽어살펴 주시길.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두 열사'에게 존경과 감사를 고백했다.

 

지금은 2018년 1월 하순이다.

역시나 날씨는 31년 전처럼 몹시도 춥고 황량하다.

민주화는 이룩했으나 계속되는 위정자들의 부정부패, 권력자들의 각종 변칙들, 연이어 터지는 참사에 국민들의 영혼까지 스산하고

애닲기 그지없다.

아직도 대한민국엔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각종 문제들은 '극복과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낙심과 좌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세계 2차 대전 후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수많은 나라들 중 '민주화'와 '산업화' 그리고 '과학기술'에 박차를 가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우리는 저력이 있는 국가였다.

역량과 능력이 출중한 민족임을 자력으로 증명했고 세계가 인정했다.

 

다시 희망찬 미래를 위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 뜨겁게 뛰어 보자.

머지않아 새로운 '문명의 태양'이 한반도 동쪽 바다에서 두둥실 떠올라 전 세계를 더욱 밝게 비춰줄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믿는다.

하늘이시여.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주소서.

 

 

 

 

 

 

 

 

 

 

 

 

 

 

 

 

 

 

 

 

 

 

 

 

 

 

 

 

 

 

 

 

 

 

 

 

 

2018년 1월 28일, 일요일.

 

영화를 보았다.

아품과 회한, 미래와 희망이 여과 없이 교차했다.

그런 심정으로 '1987'의 후기를 몇 자 적었다.

땅콩처럼 작은 나라.

그러나 골리앗처럼 위대한 성취.

이 말도 안 되는 심각한 역설이 바로 대한민국의 진정한 힘이었다.

미래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세상의 '국제표준'을 정하거나 논할 때,

각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반드시 코리아의 의견을 먼저 구하고 경청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어느새 'k 민주주의'가 세상의 표준이자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굳어졌다.

 

인생은 짧다.

진정한 '사과'나 '반성'도 없이 또 한 인간이 떠났다.

'전두환'도 그랬는데 '이근안'도 그랬다.

속절없이 떠나버린 허접한 영혼.

서푼짜리 권력을 손에 쥐고 스스로 충견이 되기를 자처했던 가엾은 영혼.

독재자가 던져주는 개뼉다귀 하나에 충성을 맹세하며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온갖 방법으로 고문했던 비열하고 불쌍한 영혼.

그 한 인간의 죽음 때문에 이 글을 찾아 다시 읽었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고, 세상은 '인과응보'로 점철된다.

본디, 인생이 그래서 무서운 거다.

잘 살다 잘 떠나야 한다.

선택이 아니다.

산 자들의 목숨값에 대한 신의 엄중한 명령이니까 말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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