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가족밴드'에 사진을 올렸다.
신선했고 야무졌다.
'태종대' 앞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한 뒤 슈트를 벗으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바다에서의 본격적인 '다이빙 실습'이었다.
'오픈워터 다이버'가 되기 위한 후반부 강습 중 하나였다.
아들이 올린 몇 장의 사진을 보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전 세계 다이버들의 라이선스 중 70% 이상을 배출하는 '다이빙협회'가 있다.
그 단체의 이름은 'PADI'다.
'스쿠바 다이빙'에선 가장 대중적이면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PADI'는 'Professional Association of Diving Instructors'의 약자다.
이 'PADI'가 부여하는 '다이빙 자격증'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 바로 '오픈워터 다이버 과정'이다.
제대로 배운 기초가 평생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자격증 입문교육은 통상 이론과 실내 수영장에서의 훈련으로 시작된다.
실내교육이 끝나면 바다로 나가 실제적인 강습으로 이어진다.
규정된 다이빙 횟수를 채우고 과정을 수료하면 비로소 '다이버 자격증'을 부여받는다.
아들의 사진을 보자 자연스럽게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해병대 시절'에 나도 다양한 '수중훈련'을 경험했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많이 했고 또 자주 했다.
당연히 '스쿠바'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양훈련' 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과정은 뭐니뭐니 해도 '렁수영(lung swimming)'이었다.
지금도 생각만하면 치가 떨리고 숨이 막힐 정도다.
'렁'(LUNG)은 스쿠바 장비의 핵심이었다.
'공기통'을 '렁'이라고 불렀다.
'렁수영'은 '스쿠바장비'를 착용한 채 침투하거나 퇴출하는 '전투수영' 중 하나였다.
'레귤레이터'(호흡기)를 입에 물고 했다면 그렇게까지 '죽을맛'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편안하고 용이했겠지.
그러나 대원들에게 '레귤레이터'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single lung'(공기통 1개짜리)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문제는 'double lung'(공기통 2개짜리)이었다.
무게가 엄청났다.
슈트 입고, 웨이트벨트(납벨트) 차고, 핀(오리발)까지 착용한 채 수영을 했다.
핀을 착용한 '전투수영'은 대부분 '횡영'이었다.
'더블렁' 무게 때문에 내 몸이 자꾸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엄청나게 무거운 '더블렁 장비'를 멘 채로 제한시간 내에 몇 킬로미터를 주파해야만 했다.
'렁수영 훈련'엔 처음부터 '레귤레이터'가 준재하지 않았다.
강철 공기통, 그것도 '더불렁'의 무게 때문에 육신이 계속해서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호흡을 할라치면 물이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핀(오리발)을 착용한 상태에서 두 다리를 파워풀하게 교차시키는 '가위차기' 방식으로 전진했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선 호흡을 해야만 했다.
호흡을 하려면 강력한 발차기로 자꾸만 가라앉는 육신을, 특히 머리 부분을 수면 위로 치밀어 올려야 했다.
이 방법 뿐이었다.
달리 대안은 없었다.
무쇠 같은 '하체의 파워'가 곧 대원들의 생존을 좌우했다.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모든 에너지를 갈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물속이었지만 입에선 개거품이 버걱거렸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전진하다 보면 대부분 무쇠같은 허벅지일지라도 대퇴근에서 쥐가 났다.
심각한 경련이었다.
죽을 맛이었다.
물속에선 눈곱만큼이라도 꼼수가 통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방심하거나 하체의 파워가 쇠잔해지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모두가 똑같은 입장이라 누가 누구를 도와줄 수도 없었다.
허벅지 근력이 약한 사람에겐 더블렁 장거리 수영은 아예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지상에서처럼 대원들 속에서 적당히 묻어갈 수 있는 훈련도 아니었다.
바다는 비정했고 정말로 무서웠다.
개인별 능력이 수중에서는 확연하게 갈렸다.
무거운 쇳덩어리 '더블렁'의 무게보다 두세 배 더 파워풀한 '가위차기'로 육신을 수면 위로 치밀어 올려야 했다.
그러면서 파도를 가르며 쉼없이 전진해야 했다.
심장과 근육이 터질 때까지 전진할 수 없었던 대원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중도에 포기를 선언했다.
'수중훈련'은 '지상훈련'과 차원이 달랐다.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호흡이 안되면 그것은 곧바로 죽음이었다.
아무리 처절하게 악전고투를 할지라도 인간의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바다는 그랬다.
'해상훈련', '수중훈련'엔 그런 과정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물속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한시간 내에 '미션'을 완수하지 못하면 여지없이 실격이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나의 경험담을 서술하자고 이 글을 시작했던 게 아니었다.
아들의 '오픈워터' 사진을 보면서 느꼈던 감회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들 사진을 보는 순간, 옛날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사회 초년생 시절에 '스쿠바'가 그리워서 '속초'에 몇 번 갔었다.
그 당시만 해도 속초 '영금정' 앞바다가 레저로서의 '스쿠바'를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점점 일이 바빠지고 직무가 넓어지면서 그 이후론 '스쿠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슈트'를 입어본 적이 언제였던지 모르겠다.
아주 까마득했다.
그래서 아들의 사진에 더 감회가 깊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대개 첫 경험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첫 사랑, 첫 출근, 첫 등반, 첫눈, 첫 항해, 첫 작품, 첫 도전...
아들이 경험했던 부산 '태종대 앞바다'에서의 최초의 '오픈워터'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 느낌, 그 떨림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서너 번 '바다강습'을 마치면 '다이버 라이선스'를 받게 될 것이다.
'자격증'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도전을 통해 배움과 감동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먀말로 삶을 풍요롭게 엮어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라고 믿었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일렀다.
돈을 벌어 '부동산'에 집중하지 말고 세상의 다채로운 '경험'과 '감동'을 차곡차곡 쌓아가라고 얘기했다.
아비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그렇게 기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관된 나의 조언이었다.
'소유나 권력'보다는 '소통과 공감', '나눔과 헌신', '경험과 감동'이 삶의 요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면 대학은 곧바로 방학에 들어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집 에이스인 딸과 아들도 귀환할 것이다.
맛있는 치맥으로, 우리 가족 네 명이 힘찬 건배를 하고 싶다.
아들의 '오픈워터'를 축하하면서 말이다.
"Open Water Diver & License, Congratulation"
매사에 열정적인 두 청년들.
그 싱그런 젊음이 부럽다.
또한 아름답고 멋지다.
청춘의 심장은 인생의 불꽃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최후의 블랙홀'이다.
뜨거운 열정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 바로 청춘의 활화산 같은 심장 아니던가.
생각만 해도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친다.
좋다.
건투를 빈다.
파이팅 !!!
2017년 6월 8일, 목요일.
새벽에 큐티 마치고
아들의 OPEN WATER 사진을 보면서 몇 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