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대학친구들과 포천 산정호수와 명성산에 갔었다.
계곡물이 어찌나 맑고 차던지 연방 탄성이 흘렀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싸간 김밥과 캔맥주 하나씩을 나눠마셨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 하나가 하는 말이 자기는 초등학교 때 별명이 "양가"였다고 했다.
난 처음에 姓氏의 양가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는 장씨였다)
그런데 듣고 보니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
'수우미양가'에서 '양과 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4학년 때까지 양 이상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늘 시험만 보면 '양과 가'였으므로 선생님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했다.
지금도 동창회만 나가면 친구들이 자기를 "양가"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한 마디 거들었다.
"이 사람아! '양가'는 참 좋은 말이네. 선생님이 자네에게 그런 좋은 별명을 붙여 주셨으니 작금의 자네가 이렇게 훌륭한 어른으로 거듭난 게 아닌가? 그 선생님께 오히려 고마워 하시게"
그리고 몇마디 덧붙였다.
"본디 良이란 양호하며 좋다는 의미요, 可란 가능성이 크고 미래가 창창하다는 얘기 아니던가? 이보다 더 좋은 닉네임이 어디 있단 말인가? 秀는 빼어남이요, 優는 우수함, 美는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지. 모두 현재 진행형일세. 그러나 良可는 현재 보다는 미래를, 오늘 보다는 내일에 더 가중치를 두고 있는 단어지. 열심히 정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자네는 그 별명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경희대를 졸업하고 지금처럼 대기업의 잘나가는 간부가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일세. 그게 다 양가의 덕분인 줄 알라고"
우리는 모두 허허허, 하하하 하며 웃었다.
소시적엔 그랬었다.
모든 학생들의 성적이 수.우.미.양.가로 표기됐었다.
사실 그리 큰 의미는 없는 거였지만 초등때는 왜 그리도 그것이 크게 보였을까?
초등때 별명이 "양가"였다는 친구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컷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내 마음이 저릿해왔다.
어린 나이에 상처가 됐던 모양이다.
지금은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다.
나도 혹시 자녀나 어린 아이들의 점수에만 관심을 두는 그런 어른은 아닐까 하고 한 번 더 나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산행중에 내내 곰곰이 생각해 보았던 문제였다.
어른들이 효율성과 합리성이란 잣대로 만든 제도가 때로는 그 취지와 무관하게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교육현장에서 이런 표기법은 사라졌지만 꽤 오랫동안 어린 학생들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했던 성적표 표식방법이었다.
지금도 그 친구만 생각하면 '양가'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2003-06-24 / 현기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