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간구와 부활의 신앙
욥기서 14:1-22(구p.774) 찬송 490장 / 찬송 488장 20221030
오늘도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욥기서 14장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 욥기서 14장에는 욥기서 13장에 이어서 욥의 못다한 기도의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지난 주에 말씀을 나누었던 욥기서 13장 뒷 부분에 보시면, 친구들에게 실망을 한 욥이 이제 사람들을 의지하기 보다는 내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 하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욥기서 14장 전체 내용은 욥의 못다한 기도의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땅에서 잃어버린 것을 돌려 달라거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그런 기도입니다.
그리고 현세보다는 내세를 향한 기도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기도를 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욥의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욥기서 14:1-6절까지 말씀을 보시면, 욥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에 대해서 먼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 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 하시나이까”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여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다 여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람의 인생이라는 이 시간은 짧은 순간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시편 90:4절 말씀에 보시면, 모세가 우리 인생에 대해서 노래하기를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주의 목전에서 천 년이 지난 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라고 말씀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천년이라는 시간이 엄청나게 긴 시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냥 하루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밤의 한 순간 같다! 라고 말씀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8절 말씀에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일생을 100년으로 잡아도 이 100이라는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그냥 잠깐의 시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잠깐을 사는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 사람들은 “걱정으로 가득 채우고,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 채우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2절 말씀에는 비유로 설명을 합니다.
인생이 “꽃과 같이 시들어 버리고, 그림자 같이 지나가 버린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우리 인생은 흘러가는 시간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시간이 겉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그냥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을 그냥 두지 않고 “자세히 감찰하시고, 감시하시고 계시다가 시간이 되면,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서 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하나님 앞에 깨끗함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하루 하루 그냥 현실의 문제 속에서 뛰어다니다 보면, 순식간에 인생이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말씀에 보시면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라고 욥이 고백을 합니다.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 가운데서 절대로 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깨끗할 수 없고,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욥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 똑 같은 말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3:10절 말씀에 보시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서 무익하게 되어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 옛날 이 욥은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깨달은 바울이 고백한 말과 똑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아마 욥은 질병 가운데 고통을 당하면서 인생이 무엇인가? 깊이 묵상을 하는 중에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바쁘게 살다 보면요, 내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서 묵상할 여유도 없습니다. 욥처럼 이런 인생의 큰 문제를 만났을 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서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바쁘게 달려가기 보다는 이렇게 한번 멈추어서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병들어 병상에 있을 때, 죄가 드러나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을 돌아보고 성경을 보다가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변화 되기도 합니다.
이것도 은혜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찾아도 잘 못 찾아서 우상을 섬기면서 허겁지겁 짧은 인생을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5절 말씀에 보시면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음으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마지막 달과 그 날을 정하시고, 죽는 날을 정하시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게 정해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그 시간이 되면,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하나님 앞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욥은 지금 질병 가운데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건강하고 잘 살고 잘 나갈 때는 내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지만, 가진 것 다 잃고, 내 몸에 병이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이제 숨이 끊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은 그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다 포기하고,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욥이 첫 번째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주님이 정하신 시간이 되기 전에 “나를 쉬게 하옵소서”
6절 말씀을 잘 보시면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시면, 하나님이 내게서 눈을 돌려서 “죽는 날까지 홀로 있게 하옵소서”여기 홀로 있게 해달라는 말은 사실은 “쉬게 해달라, 안식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거꾸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돌이키사, 나를 쉬게 하사, 품꾼과 같이 그날을 마치게 하옵소서”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품꾼들, 일꾼들을 일을 마칠 때 기쁨으로 일을 마치는 것처럼, 내가 이 고통이 멈춰지게 될 때, 인생이 끝이 났을 때, 기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라고 지금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이 기도는 마지막 남은 죽음 앞에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른들이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 9988123이라고 기도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123 하루 이틀 앓다가 삼일 째 되는 날 잠자듯이 주님나라 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처럼 지금 이 욥도 자신의 마지막 죽음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고통이 멈추어지고,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으로 하늘나라에 가게 하옵소서!
여러분 성도라면 이 죽음을 그냥 막연하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런 기도로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의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 죽음 앞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또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 나라에 갈수 있도록 죽음도 준비할 줄 아는, 지혜롭고 믿음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욥은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해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7절 말씀에 보시면, 나무는 잘려져도 뿌리만 있으면, 움이 돋고 연한 가지가 나오면서 새로 심은 것처럼 또 자라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무는 희망이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는 깨어날 수 없고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욥이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10절 말씀에 보시면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 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을 합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강한 자라도 “죽으면 끝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내 영혼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11절 말씀에 보시면, 비유로 설명을 합니다.
마치 바다의 물이 증발해서 사라지듯이, 강물이 말라서 줄어들 듯이 사람도 죽으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에 보시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잠을 깨지 못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될 때까지 죽은 자들의 영혼들이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음부나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은 이 죽음 이후의 세계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서 정확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이제 두 번째 기도를 하게 됩니다.
13절 말씀에 보시면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내가 죽어서 “스올”에 갔을 때, 나를 감추시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때까지 “규례를 정해서 나를 기억하옵소서”
여러분 죽는 날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처럼 마지막 심판의 날도 정하셔서 나를 기억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하는 겁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스올이라는 곳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내가 죽은 뒤에 스올에 있다가 마지막 심판날이 되면, 내가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부터 이 욥은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을 하게 됩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보시면 욥기 “내가 풀려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풀려난다”는 말이 원래는 “변화되어진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욥이 부활의 신앙을 가졌다! 라고 우리가 해석을 합니다.
사실 부활이라는 개념은 신약에 와서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죄인들 중에 더 이상 회개하거나 돌아올 사람이 없을 때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때 이 땅에 있는 모든 시간과 법칙은 종료가 되어지고 이제 영원히 사는 세계로 변화 되어질 때 성도들도“영원히 사는 몸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이 있기도 전에 이 욥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가 죽은 뒤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면 내가 반드시 “변화되어 질 것을 지금 믿고 있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부활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말씀에 보시면
“주께서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지막 때에, 이 부활의 때에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대답을 할 것이고, 주님께서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나를 “기다리신다, 주님도 나를 사모하신다” 라고 지금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7-18절까지 말씀에 보시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죄는 사해 질 것이고, 하나님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나의 삶을 다 계산해서)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들추어 내지 않으시고) /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인을 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아교 풀로 붙이신다, 없애버린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욥은 지금 죽음 이후에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비록 내가 병으로 죽는다 할 지라도, 주님이 마지막 때 나를 기억하시고, 부활의 때 나를 부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이렇게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8-22절까지 말씀에 보시면,
이 땅에서 이런 부활의 신앙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인생 속에서 슬픔과 고통 중에 살면서 이런 부활에 대한 소망도 없이 그냥 허무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18절 말씀 앞에는 원래 “그러나”라는 접속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산이 무너지고 물에 돌이 깎여 지고 또 물에 땅의 티끌이 씻겨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20절 말씀에 보시면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내시오니 /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잘 보시면, 이 땅에서 이런 내세에 대한 소망이나 부활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신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존귀한 지도 비천한지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슬픔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그냥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지금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2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
그의 육체, 몸은 고통을 당하고, 그 영혼도 슬피 울며 애곡한다는 것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욥은 죽음을 앞두고 자기 영혼을 위한 기도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평안을 주옵소서, 죽음 후에 내 영혼을 기억하시고 부활의 때 나의 이름을 불러 주옵소서”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이런 현실의 고통의 문제를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에 보시면, 이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5:51절 말씀에 보시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어지면, 죽은 자들이 다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때가 올 것이고, 우리도 변화되어지는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부활의 신앙이 분명한 성도들은 이 땅의 죽음이라든지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그렇게 힘들게 생각하지 않는다! 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서 선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사망아! 죽음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담대하게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가는 이 인생의 고통도 우리는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도 즐길 줄 아는 것도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시면 고난이 올 때 핍박을 받을 끼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막연한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욥의 이 부활의 신앙을 보면서,
우리도 내세에 대한 소망과 이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 죽음과 현실에 고통의 문제를 넉넉히 이기면서, 오늘도 덤으로 사는 인생처럼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 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의 위로, 교통,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으로 예배하며, 가정과 직장에서 엎드려 예배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머리 위에, 우리 가정과 자녀들과 손으로 하는 모든 생업과 대구샤론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