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시작 https://youtu.be/KyF1Wfm_P0c?si=I_SF2F5jLfoUaZJd
(2026.06.07. 주일 예배)
본문 말씀 : 사도행전 7:51-8:1
주 제 :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깨닫게 된다.
1. 고요한 움직임
며칠전에 선거가 있었고, 이제는 온 세상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조용하다고 느낄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 스가랴서 1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감찰하시기 위해서 감찰자들을 보내셨는데, 한 감찰자가 보고를 합니다. 세상이 평안하고 조용하다 했어요. 그랬더니 곁에 있던 한 천사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지 70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렇게 조용합니까? 무슨 일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이지요. 세상이 조용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말씀을 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말씀은 기운차게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되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조용하고 편안하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많아지고 믿음의 공동체가 크지니까 해야할 일도 많아졌어요. 주님의 일을 해야할 일꾼들이 필요해졌어요. 그래서 믿음이 충만한 일곱 사람이 일꾼 즉 집사로 선출되었습니다. 집사는 원래 일꾼, 즉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절대 감투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BC 586년에 유대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나라가 없어졌다는 뜻이지요. 나라가 없어졌으니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전부 바벨론으로 잡혀가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가 가야만 했습니다. 나라도 없이 떠도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일곱 사람이 정확하게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다만 이때 세상의 공용어는 거의 헬라어 였으니까 이들을 가리켜서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뛰어났습니다. 뛰어나면, 원래 옆에서 집적대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시기하는 것이지요. 스데반이 뛰어나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이 고발을 했어요. 고발을 당해도 스데반은 거침없이 자기가 해야할 말을 다 하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돌을 던져서 죽였어요. 이 사건으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칩니다.
2. 시련
기독교인들이 많아지니까 이것을 밉살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많아졌다고 해도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유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은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전하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채찍으로 때려도 그래도 전하고 믿는 사람은 자꾸만 늘어나요. 뭔가 조치를 해야 하겠는데, 방법이 없어요. 그러다가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다 하고서 무지막지 하게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죽이고 했어요.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온 세상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함으로 해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온 세상으로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가는 곳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온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의 시작이기도 하고, 또 사도행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하기만 했으만 편안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아무 일도 없는듯이 그대로 조금씩 믿는 사람이 늘어나기만 하면 좋을 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믿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3.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내 삶에 시련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누가 시련을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내게 어려운 일이 닥칠 수 있습니다.
이 때, 힘들어 하고만 있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초대장이라고 생각하시고 이 초대장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그것을 고민하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예 생활이 편안하였겠습니까? 힘들었겠지요. 그때 모세가 나와서 그들을 이끌고 에집트를 탈출했습니다. 에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이 편안했겠습니까? 아니면 탈출해서 광야로 가는 것이 편안했겠습니까? 물론 에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으면 편안합니다. 그런 상태가 세상이 조용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들은 영원히 노예생활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상태를 좋아합니다. 변화가 없는 것이요. 편안하기만 한 상태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가 이런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내가 편안하기만 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려고만 하지 말고, 내가 이 시련에 어떻게 반응할까를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당연히 변화에는 위험도 따르고 귀찮기도 하고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단지 노예생활의 기간이 연장되기만 하는 것뿐입니다.
4. 시련은 계속 됩니다.
또 하나, 이 변화의 특징은 이것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련이 한 번 휘몰아치고 조용해지지 않습니다. 한 가지 시련이 끝나고 나면 계속됩니다.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생각해 보십시다. 몇가지 재앙이 있었습니까? 재앙이라고 하니까 이집트의 왕 바로만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지 재앙이 있을 때마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욱 더 가혹해집니다. 너희들이 아직 평안하니까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하면서 더 가혹해져요. 짚도 주지 않으면서 벽돌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할당량은 줄어주지 않아요. 삶을 더욱 가혹해 갑니다. 내가 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시련은 그치지 않습니다.
5.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시련을 당해서 시련에 압도되어서 기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 보여도 분명히 돌파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이 너무 힘들면 그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기도하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해도 해도 아무리 기도해도 전혀 변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만 포기해 버려요.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제일 안타깝습니다.
스쿠루 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늙은 악마가 젊은 귀신에게 한 수 가르쳐줍니다. ‘얘야, 그 영감쟁이 말이야(하나님을 마귀는 영감쟁이라고 합니다.) 어리석게도 자기 아들들에게 믿음을 심어준다고 계속해서 시련을 주는 거야. 이때가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야! 이때 우리는 많은 인간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와야 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어. 그 늙은 영감쟁이가 정신차리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치워야 해. 너는 재빨리 하나님이라는 것은 없어. 전부 거짓말이야 그렇게 속삭여야 해’
이런 마귀의 수법에 속아넘어가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한층 더 강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가월현 목사님을 보면 참 은혜가 됩니다. 그분은 북한 선교를 위해서 일합니다. 그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북한에 한 번 들어가보기는 커녕, 북한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겨우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에서도 오래 있지 못합니다. 소련에도 가는데 오래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항상 북한 근처만 빙빙 돌아요. 그런데 이제 겨우 소련에 장기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았어요. 그것을 받겠다고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하고 그렇게 지치지 않고 그것을 향해서 가는 모습이 너무 은혜스러워요.
우리 중에도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련은 힘듭니다. 시련을 좋아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보다 더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믿음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이상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 수준까지는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계속 시련도 주시고, 잠시 쉬게도 하시고, 잠시 쉬어서 힘이 생기면 또 한 계단을 높이기 위해서 또 시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 도대체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십니까? 이렇게 하지 마시고, 시련 가운데서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마시고, 당당히 이겨나가십시오. 그러면 머지 않아 시련도 그치고 우리의 믿음을 더 굳건해지리라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