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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 500년, 불꽃 같은 100년

작성자공자(류제곤)4동 1204호|작성시간26.06.09|조회수28 목록 댓글 0
(수필)

어둠 속의 500년, 불꽃 같은 100년
옥창열


늦은 밤, 거실의 불을 끄고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다큐멘터리 영상에 몰입해 있었다. 화면 가득 차오른 것은 푸른빛조차 가닿지 않는 북극해의 깊고 시린 심해였다. 그 암흑의 공간을 배경으로 거대하고 기이한 생명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린란드상어, 일명 북극상어라 불리는 존재였다.

화면 속 상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날렵하고 위협적인 바다의 포식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친 가죽에는 세월의 흔적 같은 이끼와 상처가 가득했고, 눈은 기생충 때문에 멀어 흐릿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움직임이었다. 시속 1km 남짓, 사람이 느릿느릿 산책하는 것보다도 더 더딘 속도로 꼬리지느러미를 한 번 젓는 데만도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방을 유영하는 것 같았다.

해설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이 상어의 수명이 자그마치 400년에서 500년에 달한다는 것이다. 15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소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고, 그 후로도 수백 년을 더 산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깊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백 년이라니. 조선왕조 오백년이라는 역사의 무게가 한 생명체의 일생과 맞먹는다는 사실에 경외감과 함께 묘한 부러움이 일었다. 인간의 백 년 안팎의 삶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찰나에 불과한가.

그러나 화면이 바뀌고 방에 홀로 남아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가슴속에 일었던 부러움은 점차 깊은 사유의 질문으로 바뀌어 갔다. 과히 그 오백 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인간의 백 년보다 더 축복받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북극상어가 오백 년을 버텨낼 수 있는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살아있지 않은 듯 살아가는 것’에 있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 세포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몸속에 천연 부동액을 가득 채우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심장박동과 신진대사를 극한으로 낮춘 ‘초절전 모드’의 삶. 그것은 뜨겁게 살아 숨 쉬는 생동이라기보다는, 영하의 냉장실 속에서 노화와 부패를 지연시키며 오랫동안 견뎌내는 거대한 인내에 가까워 보였다. 격렬한 기쁨도, 번뜩이는 감각도 없이, 그저 생존이라는 본능의 끈을 길게 늘어뜨린 채 어둠 속을 부유하는 오백 년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온혈동물인 인간의 삶은 얼마나 뜨거운 불꽃인가. 얼음장 같은 물 속에 적응한 생명에 비하면, 우리는 펄펄 끓는 피를 온몸으로 순환시키며 살아간다. 이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세포를 태우고 손상시키며, 그 대가로 상어보다 훨씬 빠르게 늙어가고 백 년이라는 시간 뒤에 소멸한다. 하지만 그 짧고 뜨거운 시간 동안 인간이 누리는 삶의 밀도는 상어의 오백 년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에게는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의 풍요와 감각의 깊이가 있다. 우리는 봄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구절초나 개망초꽃을 보며 계절의 변화에 감탄할 줄 알고, 그 소박한 아름다움을 한 편의 시나 글로 빚어내어 영원에 박제하기도 한다. 마음을 울리는 선율에 영혼을 싣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짓기도 하고, 자식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연민을 나누며 삶의 숭고한 의미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은 뇌의 진화나 과학적 메커니즘을 떠나, 신이 온혈의 인간에게 부여한 특별한 축복이다. 상어에게 오백 년이 그저 묵묵히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이라면, 인간에게 백 년은 매 순간을 추억과 감동으로 채워 넣는 ‘의미의 직조’이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깊은 깨달음을 얻고 누군가와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삶의 질과 밀도는 아무런 감정 없이 흘려보내는 심해의 수백 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고 뜨겁게 살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자연이 북극상어에게 지루하도록 ‘긴 시간’을 허락했다면, 인간에게는 세상을 투명하게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깊은 마음’을 선물했다.

TV를 끄고 돌아선 서재 책상 위, 하얀 원고지 위에 볼펜으로 글을 꾹꾹 눌러쓴다. 비록 상어처럼 수백 년을 살 수는 없을지라도, 내게 주어진 이 짧고 역동적인 백 년의 시간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사색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부지런히 글로 써 내려가리라 다짐해 본다. 차가운 바다의 오백 년 긴 잠보다, 매 순간 깨어 흐르는 이 뜨거운 백 년이 내게는 더없이 과분한 축복이자 기쁨이다.

출처: 비공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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