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놀이 사기군
카드 놀이 사기군(1594-5)
순진한 청년이두 명의 사기군에게 속임수를 당하고 있는 장면을 코믹하게 그렸다. 이 작품은 모사품만도 50여 종이 넘는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초기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인물의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잘 표현했다. 카라바조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렸다.
화려한 색채에 사실주의적 화품으로 담아낸 작품은 당시에 주도적 예술 사조였던 르네상스 화풍이나 매너리즘과는 다른 화풍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신화나 영웅을 표현하지 않고 로마의 평범한 일상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카라바조
1571 - 1610)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이탈리아어: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karaˈvaddʒo][*], 1571년 9월 29일 – 1610년 7월 18일)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북부 지방에서 포도밭을 가진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예수회의 로마 대학을 졸업하고ㅗ 예수회의 사제가 되었다. 삼촌 루도비코는 밀라노 교구 소속의 카콜릭 신부였다. 집안이 지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는 밀라노에서 페테로자노의 화실에서 4년 동안 미술 공부를 했으나 자연을 통해서 스스로 공부한 것이 더 많다고 한다. 페테로자노는 당시의 밀라노가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강했고, 신앙만이 지고의 선으로 생각하던 시대였다.
1576년(5세)에 밀라노에 잠시 이주하지만 급속도로 번지는 페스트를 피해서 카라바조로 다시 돌아온다. 이듬해에 페스트로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등 집안 어른 세 명을 잃는다. 이때부터 어머니가 가족을 부양했다. 1584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밀라노로 다시 돌아와서 화가가 되기로 결힘한다.
16세기 말의 이탈리아 화단은 기교적인 장식미를 강조하는 매너리즘 미술이 유행했다. 롬바르디아(밀라노 지역)에는 자연을 그대로 표현하는 미술양식이 남아 있었다. 이 화풍은 레오나르다 다 빈치의 빛과 그림자의 표현 기법과 자연 관찰을 통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빛과 어둠의 대비(테네브리즘이라고 한다), 등장 인물의 긴장된 표정, 물체의 정밀 묘사는 롬바르디아의 자연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592년에 로마로 가서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다. 그는 밑그림 없이 화폭에 색칠을 하는 아랄 프리마 방식을 따른다. 이것으로 봐서 베네치아에 들려서 그림 공부를 했으리라 추측한다. 로마에 머문 초기에는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계를 이었으리고 본다.
로마의 (체사리)화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길거리에 나가 패싸움을 벌려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때 그린 테네브리즘 화법은 당시의 로마의 화법과 차이가 났다. 로마의 뒷 골목을 배회할 때 우연히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났다. 추기경은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델 몬테 추기경의 주문을 많이 받았다. 이때 그린 메두사로 하여 그의 명성은 피렌체까지 퍼졌다. 그의 화풍은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로마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극적인 조명과 사실적인 묘사로 바로크 양식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사실적이고 파격적인 주제들로 인해 비난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나 점차 인정받게 되어 유명해진다. 로마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미술의 흐름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이때 그린 ‘성처녀의 죽음 혹은 영면’은 마리아의 묘사가 카톨릭의 종교관과 맞지 않다면서 거부를 당하면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루벤스가 이 그림을 알아 보았으나 주문자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에 발표된 그에 관한 비평은 16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앞의 3년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비평은 이렇게 말한다. "2주간의 작업 후 그는 데리고 다니는 하인과 함께 한 두 달간 칼을 들고 테니스장 여기저기를 으스대며 다녔고 싸움이나 논쟁에 개입되기도 하였다." [1]
로마 시대에 무절제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그러나 ‘성처녀의 죽음’을 그린 후로는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주문량이 급격히 떨어졌다. 난폭한 성격으로 점점 포악해져서 주변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다. 이때 그린 ‘엠바오에서 저녁 식사’는 당시의 불안했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에도 1608년 몰타에서 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나폴리 등지로 도망을 다니면서 그렸던 그림들이 다시 거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유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학자들의 연구로는, 나폴리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빈민층을 그린 탓이 아닐까 한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그를 고의로 살해한다. 다음 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 년간의 활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 에콜레(Porto Ecole)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되어 거장으로 재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