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모노레터 - 화첩기행 네 번째
백두대간의 중추로 가는 오르막이어서 고한, 추전역을 지날 때는 숫제 하늘 사다리라도 타고 올라가는 느낌입니다. 뎅겅뎅겅 종소리가 울리는 저만치 허공에서 십자가 불빛 하나가 보입니다. )
그는 오랜 세원 이 화두話頭같지도 않은 화두를 잡고 씨름해왔노라고 했습니다. 새벽이면 물안개 피어오르고 석양이면 낙조 아름다운 수승대를 드나들면서, 왜 이런 천혜의 자연 무대를 버려두고 인공조명 아래서 과장된 몸짓에 뻔한 대사를 늘어놓아야 하는 것인가 회의하였다고.
그러고 보니 수승대는 과연 세계 수준의 연극 무대로 꼽히는 데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거북 모양의 커다란 바위를 휘감아 돌아가는 물길을 바라보며 동글게 않은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객석이며, 붉은 배롱나무로 뒤덮인 고색창연한 구연서원龜淵書院과 관수루觀水樓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전통미와 자연미가 연극 속에 녹아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언젠가 거창은 또 하나이 아비뇽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예감을 지니며, 나는 바위처럼 버티고 선 이종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발레리노이던 내 인생에 지진이 일어나는 사건이 터졌어. 어느 날 도쿄에 들어온 ‘안토니오 가데스(Antonio Gades, 에스파냐의 무용가 겸 안무가, 민속무용의 동작을 예술적으로 완성한 플라멩코의 대가)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게 된 거야.’
7분이 넘으면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10분이 넘으면 대개 헉헉대기 시작한다는 토로(Toro, 죽음으로 몰리는 소와 투우사의 긴장을 묘사한 춤)나 불레리아스(Bulerias, 빠른 템포의 에스파냐 민요에 맞춰 추는 플라멩코의 고전적인 춤)를 출 때면 그 격렬함 때문에 흡사 생사를 넘나드는 투우사 같은 기분이 든다고.
섬진강 물 팔아서 땟거리도 마련하고 자식 놈 공부도 시켰다면서, 섬진강은 자신에게 문전옥답門前沃沓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추억의 곳간을 뒤지며 시인의 입에서는 그리움, 기다림 같은 말들이 나옵니다. 이미 서울에서의 내 일상 속에서는 죽어서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버린 말들입니다.
상상력이 생물生物이라는 것을 아파트에서 지내며 느끼곤 합니다. 저 섬진강에 나가 황혼과 새벽에 은어 같은 언어를 쉼 없이 건져 올렸을 시인이 나는 부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