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땅을 정복하는 하나님
[창세기 1 : 24-3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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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은 생명과 관계된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다. 지난 시간동안 천지를 창조(創造)하시고 땅을 구원(救援)하시고 생명을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고 번성(繁盛)하게 하시고 왕성(旺盛)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땅을 찾아오시고 구원하신 목적은 땅에 생명을 심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농부가 땅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도 땅을 찾았는데, 하나님은 풀이나 물고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심기 위해서 찾아오셨다. ‘땅’은 성경에서 ‘사람’을 상징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필요는 땅을 찾아서 땅에 생명을 심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다(사 66:1-2). 만일 보좌가 있더라도 발등상이 없으면 불안정하다. 발이 땅에 있어야 안정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뿌려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생명이 이 땅에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다.
1. 생명으로 정복하심(창 1:24-25)
오늘 말씀은 땅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이다. 물과 공중을 정복하신 하나님은 다시 땅을 정복해서 지배하고 다스리길 원하신다. 지금까지의 창조의 과정은 땅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땅을 정복할 때 무엇으로 정복하시는가? 생명으로 정복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생명으로 정복하신다.
이것이 사람과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점령할 때 기술로 정복하거나 궁극적으로 문화를 통해서 정복한다. ‘서구 문화가 동양 문화를 점령해 들어왔다. 징기스칸의 문화가 중국을 정복해 들어갔다.’ 이렇게 표현하듯이 사람은 아무리 정복해도 사람 자신의 생명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문명으로밖에는 정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땅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생명(生命)으로 정복하려고 하신다. ‘생명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정복한다는 개념과 전혀 다르다. 생명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생명을 심어서, 번성시켜서 거기서 왕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점령의 개념이다. 마호멧처럼 칼을 들고 세계를 정복한다든지 징기스칸처럼 말을 타고 세계를 정복한다는 이런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분배한다는 개념이다. 나누어서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정복은 비참하지만 하나님의 정복은 아름답다.
황폐한 땅은 씨를 뿌려서 싹이 나면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땅은 노출되어 있으면 부끄러운 것이다. 더럽고 가치 없고 황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이 나서 덮으면 깨끗하고 아름답다. 서양 사람들은 공간만 있으면 잔디를 심는다. 흙이 노출되어 있는 곳이 거의 없다. 흙을 밟을 일이 없기 때문에 신발을 신고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도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는 바깥에 나가면 흙이 많기 때문에 방안에 들어올 때는 신을 벗어야 한다. 우리는 서양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면 생소하다. 좋은 카펫을 깐 집안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잔디로 깔려있기 때문에 그들의 신발에는 흙이 묻을 일이 없다. 결국 흙은 생명이 와야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흙이 아무리 자신을 갈고 닦으려 한다하더라도 생명이 오지 않으면 부끄러움이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 도덕이나 종교로, 기술과 문화로, 철학이나 예술 등 모든 것으로 자기를 감싸고 덮어보려고 하지만 사람의 수치는 여전하다. 결국 생명으로 덮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덮여져야 아름다워지게 된다. 생명 없이 인간이 어떻게 부끄러움을 감추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정복이야말로 우리에게 축복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나를 정복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생명으로 나를 덮여주십시오. 나는 부끄러운 자니 하나님 당신의 생명으로 덮어 주십시오.”라는 뜻이다. 참 더러운 것이지만 하나님 생명으로 덮여지기만 하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일 수 없다.
푸른 초원을 보면 그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고 그보다 편안한 것이 없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편안한 색이 초록색이다. 우리 눈도 초원을 보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피로가 없다. 색 중에 가장 편안한 색이 초록색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편안한 색깔이 푸른 초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다. 사실 하나님도 쳐다보고 있으면 깨끗하지만 공허하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너무나 깨끗하고 맑지만 황당하고 공허하다. 그러나 푸른 초원은 아무리 봐도 피곤하지 않고 편안하다. 황량한 땅 사막을 보면 너무나 거칠고 메마르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나온 풀은 너무나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려 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땅을 정복하는 것은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께 정복당하는 것은 축복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나는 나대로 있고 하나님은 따로 두고 내가 필요할 때만 믿을 수 없는가? 필요할 때만 부를 수 없는가?’ 하고 생각한다. 주머니 속의 장난감처럼 하나님을 편리하게 내가 필요할 때만 부르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멀리하고 싶은 게 사람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축복이 무엇인지 모를 때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가 축복을 안다면 100% 완전하게 점령되기를 원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 14:8)”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라고 하는 것은 축복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100% 죽기를 원한다. 내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빌 3:10)” 이 말은 날마다 그가 나를 점령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죽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점령되어야 하지 내가 죽기만 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점령하신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다.
사람들은 ‘따로 복을 주십시요.’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받으면 복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 이것이 참 복이 아니고 하나님이 완전하게 나를 점령하는 것, 그것이 축복이다. 절에 가서 사람들은 잘 되게 해달라고 구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리석은 중생들아! 내가 무엇을 좀 주면 무엇을 하겠느냐? 너는 여전히 흙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을 좀 주십시요.”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내가 너의 전부이고 내가 너의 축복인데 네가 무엇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하실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라고 노래했다. 여호와가 나의 전부라는 것이다. 여호와가 나의 전부이지 여호와가 내게 조금 주시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복의 전부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 복덩어리로 보인다. 예수님을 하나님 자신이 덮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으로 차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요 1:14).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볼 때 구약은 사람은 사람대로 있는데 하나님이 무엇인가 주는 과정이다. 물이 없다고 하면 물을 주고 양식이 없다고 하면 양식을 주는 과정이다. 신약은 그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신약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하나님 자신이 복이신 그런 세계다. 무엇을 따로 따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복인 세계로 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이다. 사람들은 신약을 아주 적게 누리고 있다. 아주 조금밖에 누리지 못하고 있다. ‘주님 자신이 내게 복이구나. 여호와가 나의 산업이시구나. 여호와가 나의 생명이구나.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구나.’ 이렇게 누려야 신약을 완전하게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다. 마지막에 땅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만드셨다. 그래서 땅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풀이 났지만 그것은 완전한 점령은 아니다. 물고기가 있고 공중에 나는 새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점령은 아니다. 땅에서 움직이는 생명이 없으므로, 땅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없으므로 땅을 정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완전한 형상(形像)으로 정복되어지기 위해서 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짐승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형상(形像)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模樣)대로 사람을 만드심(창 1:26)
그러나 짐승들이 움직이고 뛰어다니고 노는 것은 되지만 그 안에는 인격(人格)이 없다. 그래서 여섯 째날 전반부에는 동물들을 만들고 후반부에는 사람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도 동물에 속한다. 그렇지만 다른 것은 인격이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하는 말씀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창조의 단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겉으로는 뭍을 드러내게 하고 식물을 나게 하고 물고기가 새들을 있게 하고 육축(六畜)과 움직이는 것과 기는 것들을 내게 하였는데, 다른 눈으로 보면 사람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다.
조각가가 조각을 하는 과정은 처음에는 흙덩어리를 가져다 놓고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은 흙덩어리를 가져오기 전에 이미 조각가의 속에는 어떤 이미지(image)를 가지고 있다. 어떤 상(像)을 가지고 있다. 그 상(像)을 조각하기 위해서 흙덩어리를 갖다놓은 것이다. 그리고는 매일 그 형상(形像)을 조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째 날에는 잘 모르고 둘째 날에도 잘 모르고 셋째 날에도 잘 모르는데 차차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형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모양이 드러난다. 그와 마찬가지다. 여기 여섯째 날까지의 과정은 한 인격체(人格體)의 인간을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인간 속에는 흙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있고 동물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상(像)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런 것들이 종합해서 올라가면서 마지막에 나온 것이 사람의 형상(形像)이었다.
아이가 자라는 것도 처음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는 쥐새끼와 구별이 안된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달이 찰수록 점점 사람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간다. 그래서 여덟 달이 되고 아홉 달이 되고 열 달이 되면 완전하게 사람이 되어서 나온다. 완전하게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을 때 출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섯째 날은 완전하게 사람의 모습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창조의 과정을 자연현상으로만 생각하니까 ‘과연 하루 동안에 창조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신학적(神學的)으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단계(段階設)로 보는 경우도 있고 진짜로 날짜라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사람과 관계된 것이다. 성경은 자연과학과 관계된 것이 아니고 철학을 위한 것도 아니고 천문학을 위한 책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가면 전부 사람이다.
식물을 단순히 식물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식물은 사람을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알고 믿었을 때 우리는 식물과 같다. 생명은 있는데 아직 움직일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생명은 있는데 아직 자라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천지만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사람은 결국 천지만물의 총화(總和)다. 형체적인 완성(完成)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든 만물을 보고 다스릴 수 있다. 우리 안에 그런 모양과 그런 상(像)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만물들은 다 부분이지만 사람은 총체(總體)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에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창 1:26)”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형상(形像)과 모양’에서 형상(形像)은 이미지(image), 모양은 폼(form)이다. 한자(漢字)로는 형상은 상(像)이고 모양은 형체(形體)라는 뜻이다. 하나는 더 내면적이고 하나는 표면적이다. 상(像)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책상이 보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형체(形體)이고 책상의 형체 이전에 책상의 상(像)이 있다. 상(像)이 먼저 있기 때문에 책상을 만들게 되었다. 상이 없으면 우리는 책상을 만들 수 없다. 희랍 철학에서는 이데아(idea) 라고 한다. 이미 사람 속에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을 표현한 것이 책상이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image), 하나님의 상(像)을 따라서 그 형체(形體)대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 형체는 표현(表現)이다. 우리가 더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모양이라는 말을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상(像)이라면 그리스도는 체(體)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형상이라면 아들은 형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를 아들의 모양을 따라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우리를 만들었다.
불교에도 이런 진리가 있다. 불교가 기독교 보다 더 알기 쉬운 말이 있다. 부처님과 석가모니의 관계가 그것이다. 사실 부처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르고 부처가 보이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보이는 것이다. 석가모니를 가리켜 ‘석가모니 부처’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예수 하나님, 그리스도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보이는 하나님,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보이지 아니한 아버지가 보이는 아들로 오신 것이다. 알고 보면 불교적인 용어가 훨씬 쉽다.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런데 하나님은 왜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만들어야 하는가?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목표는 당신의 생명이 땅에 충만하고 그 생명을 분배하는 것이고,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내가 생각한 그대로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가진 상(像)대로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집을 지어도 막상 집을 짓고 보면 내 속에 있는 그 상(像)과 다르다. 그런데 하물며 심부름을 시켰는데 내 속에 있는 그 상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은 어렵다. 결국 그 생명이 아니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속에 어떤 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사람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아무리 가르켜 주고 자세하게 설명해줘도 그대로 안된다.
구약시대는 율법을 주었다. 율법은 너무나 자세하다. 오늘날 법이 더 자세하지만 당시 고대법(古代法)으로서는 이보다 정밀한 법전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세밀하게 가르쳐도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에게 짐이었고 실패였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客)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 5:14).”라고 되어있다. 그러면 그날 사람은 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에는 우리가 단지 일 안하고 놀고 있는 그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다른 것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사람이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안식일 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주장한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안식일인데 왜 지키지 않느냐?’고 한다. ‘안식일은 지키라는 말은 있지만 폐(廢)하는 말은 없지 않는가? 언제 주일을 지키라고 했는가?’라고 공격을 한다. 그러나 그러는 자신들은 정말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가? 껍데기만 지키고 있다. 사람에게 아무리 가르쳐줘도 안된다. 그래서 생명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포크레인은 우리의 손과 같이 생겼다. 손의 마디와 포크레인이 구부려진 모습이 같다. 우리는 어릴 때 손으로 흙을 팠다. 손이 아파서 많이 팔 수 없다. 더 많은 흙을 파기 위해서 포크레인을 만들었다. 그래서 포크레인은 ‘손의 형상을 따라 손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얼마나 완전한가! 굴삭기가 땅을 파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잘 만들었는가를 생각하면 너무나 신기하다. ‘손의 형상을 따라 손의 모양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신기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지키려고 하면 먼저 그의 형상과 모양이 회복(回復)되어야 하지 내가 율법적으로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라.’하는 것을 많이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생명(生命)대로, 그 형상과 모양대로 되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 페이로다나 불도저를 가지고 굴삭기로 쓰려고 하면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으로는 그렇게 소원하지만 왜 되지 않는가? 우리가 페이로다를 가지고 굴삭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안된다. 일 이전에 형상과 모양이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고 예수가 원하는 일을 하려면 예수님과 하나인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일을 할 수 있지 사람은 하나가 되지 않았는데 일만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도저를 가지고 굴삭기의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얼마나 완전하신지!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완전한지!
3.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심(창 1:28)
그 형상(形像)과 모양을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지배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 원칙을 떠나면 거꾸로 하게 된다. 형상과 모양은 빼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만 하게 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 말을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라고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형벌을 받게 되었다. 자연을 개발한 결과로 인간은 무한한 공해(公害)의 피해를 받게 되고 마지막에는 태양까지 손상을 입어서 인간을 말살시킬 날이 오게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는 ‘사람에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구나.’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반대로 사람은 자연에 순응(順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과학이 전혀 발달하지 못했다. 한쪽은 정복(征服)하고 한쪽은 순응(順應)했는데 둘 다 틀렸다. 우리는 자연에게 복을 줄 사람이었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린다.(창 1:26)’는 것이 인간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념이었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나눠줘서 은총을 입혀줘서 마치 흙을 잔디밭이 되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개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는 순응하게 되고 하나는 과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과학이 발달하고 동양에서는 자연주의 철학이 발달하였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개념으로 땅을 축복할 자로 알아야 한다. ‘정복이라는 것이 나폴레옹이 정복한 그런 정복이 아니고, 지배가 징기스칸이 지배하는 그런 지배가 아니고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분배하는 것이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분배하는 것이구나.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나눠주는 것이고 은택(恩澤)을 주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상과 모양을 찾는 그것이 급선무다. 예수를 왜 알아야 하는가? 예수는 그 형상과 모양을 그대로 갖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그분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가?’를 아는 것보다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것을 만들 수 있고 할 수 있지 기계를 모르고 어떻게 기계를 만들 수 있는가? 그러니까 그분을 아는 것이 먼저다.
‘영생(永生)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우리가 정말 그를 믿으려면 그를 알아야 한다. 내가 정말 모르고 믿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믿으려고 하면 정말 어렵다. 아무리 믿으려 해도 의심이 생긴다. 그러나 정말 아는 친구는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앎에 이르는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은 결혼으로 마친다. 결혼은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안다는 것이다. 부부가 오래 살게 되면 서로 안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계 22:17)’라고 하면서 신랑과 신부가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알게 되고 창조자와 피조물이 알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알게 된다. 남편과 아내가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서로 알게 되면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다.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도 이렇게 구원하시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개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우리를 당신의 형상(形像)으로 회복(回復)하려고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한다.(갈 4:19)’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일을 한다. 다른 일이 아니다. 교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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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안에서 찾으시고
우리의 모든 개념과 관념과 우리의 생각을 다 바꿔서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점령하고 지배하고 다스려서
우리가 당신으로 완전히 덮이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모습으로 채워지고 덮여지기를 원하고
당신이 원하는 형상과 모양대로 재창조되기를 원하고 구원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