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구원자를 부르심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출 3 : 1 ~ 2
구원자를 부르심에 관하여 말씀드리겠다. 지난 시간에는 자격있는 자를 부르신다고 했다. 구원받는 자는 구원하는자의 자격만큼 구원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격있는 자를 기다리신다. 모세가 나오기 전에는 이스라엘을 그만큼 인도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4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이다.
모세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과정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유월절을 통해서 애굽의 바로의 치하에서 해방되어서 나온것과 광야에 나와서 성막을 건축한 두가지 사건이다. 유월절은 그들의 출발인데 영적으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 거듭남의 예표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절기를 선포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양의 피와 고기 무교병과 쓴나물로 구성된 유월절 이것은 사탄에게 붙잡혀 있는 인생이 구속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이것을 볼때 영원한 예식을 영원한 법칙을 선포했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하늘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했다고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속에 이것을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유월절을 선포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볼때 모세의 수준이 얼마나 놀라운 수준에 있었는가를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성막을 건축한 일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체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창조의 영원한 목표이고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인데 이것을 한 건축물을 통해서 표현한 것인데 이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 들려와서 유월절과 성막으로 표현된 것이다.
모세가 산에 들어 갔을 때 빽빽한 구름 속에서 하나님께 이런 계시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은 말로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음성, 사건이었던지 분명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람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있는 실제를 본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릐 음성을 들었다고 그러는데 객관적으로는 사울아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이런 말이 아니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의 말은 우뢰가 울었다 뇌성이 쳤다 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우뢰소리와 뇌성을 들었는데 그속에서 사울은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야 하는 소리로 알아 들은 것이다. 그러니까 산속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이속에서 모세는 유월절과 성막에 관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한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다린 것이다. 모세안에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렇게 번역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냉장고 속에 들어가면 차게 나온다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어떤 암시나 표현이 인간의 표현이 아님에도 받아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내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 자신의 어떠함 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일이다. 백성들은 산 밑에서 우리로 다시는 이런 광경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했다. 사울이 다메섹 가는 중에 보았던 것이나 백성이 산 밑에서 보는 것은 같은 것이었다. 사울의 동료나 이스라엘 백성은 뇌성과 벽력이 치는 것을 들은 것이다. 이중에서 사울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그리스도 안에는 유월절과 성막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세의 안에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예수는 교회를 건축함에 있어서 근본으로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인데 모세는 말씀이 왔을 때 유월절과 성막으로 표현이 되었지만 예수에게서는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인격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유월절과 성막의 실제는 한 인격이었던 것이다.
모세는 아직 인격으로 표현할 단계는 아니었지만 인격의 예표였으니 놀라운 일인 것이다. 인격을 미리 그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림과 예수님의 인격이 일치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구약시대에 모세가 놀라운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알게 되었다.
말씀이 유월절이 되고 십자가가 된 것이다. 생명안에 없는 것은 외워야하는데 외우는 것도 안에 어떤 개념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언어 속에는 어떤 개념이 있는데 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외우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광경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는 것은 그 사람안에 그런 개념이 있어야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성경은 마치 하늘에서 음성으로 불러줘서 쓴것 축자적으로 기록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은 인간의 작품이고 인간의 언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이 원리를 모르면 이것은 인간의 작품이다 하든지 신이 직접 손가락으로 썼다고 어리석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하면 우리는 그에 출생에서부터 다루심의 과정 안에서 이런 사람으로 조성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버려지는 과정부터 시작되었다. 낳서 죽임을 당하는 대신 버려짐을 당하고 갈대상자 안에서 누가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자기는 처음부터 구원자로 말미암아 건져진 자 였다. 버려지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구원자로 출발을 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 들어가서 자라게 되었는데 이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자라는 것과 비교가 된다. 그리고 동족에게 배반을 당해 미디안 광야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배신당하고 낮아지는 과정이 생기게 된다.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애굽의 모든 학술을 배웠던 그 사람이 광야에 나가 양치기가 된것인데 이것은 낮아질데로 낮아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하늘에 있다가 땅에 내려오신것과 같은 것이다. 인생이 에던동산에 있다가 세상으로 떨어진 것과 같다.
이런 버려지고 , 자라나고 , 배반당하고, 높아지고 , 낮아지고 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목자로 양육이 된 것이다. 우리 인생의 모든 과정들이 그리스도를 기준하고 목표로하는 과정을 사용되어 진다면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구원자로 양성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버려졌기 때문에 구원을 아는 것이다. 배반 당했기 때문에 자기를 신뢰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낮아졌기 때문에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과정들이 필요하고 이런 과정이 찾아 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 어디인지 주님이 가신 길이 어디인지를 알게 된다면 어떤 환경도 다 복이 된다. 모세가 자격이 되었을 때 부르셨다는 것은 구원은 구원자의 수준에 달렸기 때문에 자격이 되었을 때 부르신 것이다.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모세만큼 지었다는 것이고 교회가 건축 되었다는 것은 예수만큼 되었다는 말이다. 성막은 돌로 지은 집으로 발전하였지만 교회는 새 예루살렘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니까 차원이 하나는 형상이고 하나는 실제로 달라지는 것을 볼수 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되었다는 것은 은혜위에 은혜이다. 모세로 말미암은 구원도 놀라운 것이지만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은 더욱 더 놀라운 것이다. 모세로 말미암은 구원안에서는 돌로 지은 집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만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 안에서는 한 인격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인격안에 하나님을 갖는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에 이 은혜는 은혜위에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누가 나를 부르냐 누구 안으로 부름을 받는가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수준 안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구원은 구원자의 수준 만큼 된다는 것이 오늘날도 역역하게 알 수가 있다. 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지만 만나보면 그 교회의 수준만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안에 학식이 많은 사람도 있고 이런 저런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교회의 수준을 보인다. 그러니가 구원자의 수준의 그 이상은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왜 필요한가를 아는데 중요한 문제이다.
성철스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었다면 우리도 고행을 해야한다. 어찌 되었든 그 만큼 고행을 해야 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구원을 그냥 가질 수 있는 그런 구원을 주신 것이다. 내가 쟁취해가는 그런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이룬 구원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런 구원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차원이 다른 놀라운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에 내려가 이드로의 양무리를 칠때 하나님이 부르셨다. 장인의 양무리를 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기를 것에 대한 예비적인 것이다. 자기 양때를 키운 것이 아니고 남의 양때를 먹이는 것이니 하나님의 목자 하나님의 구원자는 자기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양을 치는 사람인 것이다. 장인의 양을 치면서 야곱처럼 자기 양때를 따로 챙겼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가 되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장인의 양때를 치고 있는 모세를 불렀다는 것은 모세가 장인의 양때를 성실하게 먹였으면 하나님이 그를 불렀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내것도 아니고 장인 것인데 잘하면 뭐하냐 생각했다면 야곱처럼 삼촌에게 가서 내몫은 무엇입니까 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양대를 갈랐던 것처럼 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맏기면 전부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자리에서 불렀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양 때를 칠 때 남의 양때지만 참 목자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 참 주인의 마음으로 양떼를 치고 있었다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 받을 수 있다.
구언자는 자기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니 철저하게 종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자기것이 없어야 하는 사람이어야한다. 야곱처럼 내 몫은 어디입니까 하는 사람은 안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옮기는 것이고 세상사람에서 교회 사람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탄에게 종 되었던 사람을 하나님의 종된데로 옮기는 것이고 하나님과 같아 지려려고 하는 사람을 십자가 안으로 이끄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야곱처럼 내 몫을 어디 있냐 하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사람을 옮기는 것이 구원이다. 이런 사람이 올 때 까지 하나님은 기다렸다가 이 사람을 부르신 것이다.
장인의 양떼를 기르고 지켰는데 이것은 백성을 기르고 지키는 훈련이었다. 생명을 공급하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목자의 일이다. 무이 있는 곳으로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잘 공급을 하면 양떼들이 다 살찌고 풍성하게 되고 만일 게을러 그대로 놔두고 놀다가 오고 하면 메마르게 된다. 옛날 소를 키울 때 아침 일찍 언덕에 소를 메놓고 오후에 물도 먹이고하면 소가 살쪄서 번질번질하게 되지만 게을러 나무믿에 메놓고 놀다 저녁에 물만 잔뜩먹여 오면 배는 부른데 소는 살이 찌지 않는다. 이런 목자에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맞기 겠는가하는 것이다.
생명을 공급하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목자의 일인데 이것을 장인의 양떼를 치는 동안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렀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광야 서편에 이르렀다는 말이 있고 거기서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 서편이란 것은 뒤편, 멀다라는 뜻인데 풀이 없어 멀리 까지 갔을 것이다. 양떼의 양식을 찾아 먼길을 간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은 양떼를 먹이기 위해 찾고 찾아가다 서편으로 멀리 간 것이다. 이것이 결국 세상에서 먼 곳이 되었고 구별된 것이 되었다. 일부러 간 것이 아니고 양떼의 먹이를 찾아서 가다보니 멀리 멀리 그리 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산이 있더라는 것이다. 거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목자가 양떼를 위해서 멀리까지 양을 먹이기 위해서 찾아가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산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다. 이 사자는 천사라고 번역 할 수도 있고 신부름 꾼으로 번역 할 수 도 있지만 구약 안에서는 대부분 여호와가 나타날 때는 그 사자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보내신 자가 따로 있고 보냄을 받은 자가 따로 있는데 보내신자와 보냄을 받은자가 하나라는 원리이다. 표면적으로는 사자고 이면적으로는 보내신이 이다. 보내신이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와는 직접적으로 교통 할 수 없다. 모세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암시를 받아 인간의 언어로 번역을하고 인간이 알 수 있는 양식으로 만들어 냈을 때 우리는 알 수 있었던 것같이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자였던 것 같은 원칙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언제나 사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사자라고 해 놓고는 나 여호와는 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자를 통해서 보내신 이가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보내신이와 보냄을 받은 자가 하나다라는 원리를 따라서 예수님이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보냄을 받은자와 보내신자가 하나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니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고 예수님은 사도들을 보내신 분이다. 여기서 보내신이는 늘 감추어져있다 항상 보냄을 받은 자만 나타난다. 예수님은 보냄을 받은자였으니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면 보내신이를 만났어야한다. 그런데 보내신이는 따로 있어 너는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를 영접한 자는 너희를 영접할 것이요 한 것이다.
사도들도 엮시 보냄을 받은 자이니 보냄을 받은자를 영접한 것이 보내신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이 사자의 원칙이 신약에 와서 사도 혹은 종이라는 표현으로 들어난다. 오늘날도 누가 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찾아 왔다면 우리는 하나님 따로 보냄을 받은자 따로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온 자가 곧 하나님 자신이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나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범죄 하고 나단이 찾아 왔을 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여호와여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했다. 나단을 하나님으로 받은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는 왕인데 선지자 한 사람을 얼마든지 무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불렀다는데 떨기나무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한다. 불꽁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 바로 모세와 이스라엘이 가시떨기 나무 같았다는 것이다. 가시떨기는 보통 잡풀 이름없이 있는 그런 나무들을 말한다. 히부리 말로 시아라고 하는데 건조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덤풀이나 관목의 일반적인 용어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나갔을 때 바로 이 시아 가시떨기 나무에 자식을 놔두고 대성 통곡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난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메마른 땅에 앙상하게 나 있는 수풀이니까 우리가 볼때 아주 고달파 보인다. 사막에 조금 나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살아 갈까하는 생각이 들게하는 종류의 것들인데 그런 자리에 이스마엘을 놔두고 대성통곡을 한 장면이 나오고
욥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굶주렸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아주 메마른 땅에서 간신히 자라나고 있고 수목들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엘에이의 여름은 건기라서 나무들이 빠짝 메말라 간신히 살고 있다. 잔디는 다 죽어 없고 집집마다 스프링 쿨러로 메일 물을 주어야 한다. 겨울에는 비가와서 나무들이 아주 좋다. 그래서 겨울에 다녀온 사람은 지상천국이더라고 말하고 여름에 다녀온 사람은 메마른 것을 보게 된다. 그래도 집안에 있는 것은 물을 주니 파랗게 되어 있지만 길거리의 나무에도 물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물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많이 주지 못하고 안죽을 만큼만 주는 상태인데 사막에 있는 것들은 어쩌겠는가 이런 것이 가시떨기인데 여기에 불이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불은 영광을 상징하는데 그렇게 메마르고 죽지 못해 사는 그런 이스라엘에 메마르고 죽지 못해서 장인의 양떼를 치고있는 모세와 가시떨기는 일맥상통한다. 성질과 형편이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불이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가시 떨기 나무가 불이타는 것이 아니고 나무는 그대로 있는데 불이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모세나 이스라엘의 형편은 도저히 영광스러울 수 없지만 그위에 영광이 임하고 있더라는 말이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이 본 사람이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흙으로 지어진 인생이 별거냐 아무것도 아니다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흙으로 지어진 인생위에 임하신 하나님 그에 목적을 둔 하나님 영광스러운 목표를 두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자체로만 생각하면 가시떨기 나무와 똑같다. 그러나 이 인생위에 두신 하나님의 임제는 놀라운 것이다.
천사보다 더 낳은 영광을 사람에게 배정해 놓은 것을 알 때 부름을 받게 된다. 이것이 부르심의 근원이다. 영광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된다. 아부라함은 이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서 부름을 받았다고 되어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 할 곳으로 가라한 말씀을 듣고 갈데아 우르를 떠났다고 되어있다.
그 영광에 하나님이 부르지 않았으면 어떻게 갈데아 우르를 떠나겠는가? 고향과 친척을 떠나야 되는데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없었으면 누가 떠나 겠는가 우리나라 초창기 형편이 어려울때 가난하고 망한 사람들이 고향을 떠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잘 되었다. 그런데 고향에서 뭐좀 하는 사람들은 끝가지 남어 있다 몰락했다. 양반이라고 기둥뿌리 잡고 있다 세상은 개화될때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천민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생겼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사람이 없어 안되었다. 양반집에서는 자녀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해서 어쩔수 없는 집에서는 자녀를 팔아 먹은 것이다. 선교사들이 쌀 한두말 가져와서 사정하면 그것을 받고 자녀를 주었다. 그사람들을 데려다 이화학당을 연 것이다. 초창기 이화학당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사람들이 미국에 유학을 해서 신문화를 들여온 것이다.
고향에서 그것이 영광스러웠으면 누가 안 떠났겠는가만 몰랐고 그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것이 있는데다 자식을 주면 굶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보낸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지시할 곳으로 가라 했을 때 그 영광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왔겠는가 하는 말이다. 만일 아부라함이 정말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서 그렇게 왔다고 할 수 도 있고 또 부르신 이의 영광이 너무 컷기 때문에 나왔다 할 수 도 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영광의 하나님이 불렀다고 되어 있다.
이런말을 한 것은 베드로나 스데반이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부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부라함도 그 영광을 보고 부름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 말씀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거기 딸려서 부름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 상의 아들 위에 임한 영광, 다 달아났는데 그 속에서 임한 영광을 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의 근거가 되고 거듭남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께서는 이것을 보여 주기를 원한 것이다. 이것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한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의 거듭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원은 세상의 영광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꿔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름 받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가시떨기 나무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부름받아 나온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산에서 이광경을 보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애굽을 나오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의 영광이 보이고 있다. 모든 것이 다 망하겠지만 이 인격만은 영원할 것이고 이 나라만이 최종적인 나라가 될 것이고 완전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그를 따르고 믿고 그에 나라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구원자는 자기 안으로 백성을 부른다. 모세는 모세 안으로 불렀고 예수는 예수 안으로 우리를 불렀다. 그 안에 감추어진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되게 되고 그 분위에 임했던 영광이 우리 위에 임하게 되는 원칙인 것이다.
기도합시다.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주셔서 모세보다 더 낳은 구원 안으로 영광의 구원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갈 아무 가치없는 인생인데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영광스러운 인격의 열매를 걷을 수 있는 위치로 우리를 바꿔 주시고 거기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렇게 표현되는 당신을 보면서 우리가 앞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그를 통해서 인생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우리로 깨닫게 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르고 그를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 것을 감하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