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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8. 만나 (4) 만나의 모양

작성자생명의 목장|작성시간21.02.01|조회수134 목록 댓글 0

48. 만나 (4) 만나의 모양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16:13~15)”

 

만나 네 번째, 만나의 모양에 대한 말씀이다.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작다”라고 하였는데, 먹는 음식은 작아야 된다. 크고 위대하면 먹을 수 없고, 작고 세미해야 먹을 수 있다. 작은 것도 우리는 먹으려면 더 잘게 씹어야 하고, 씹은 것도 다시 위장 안에서 다시 또 갈아져야 하고 분해되어야 되고, 그래야 흡수가 된다. 작을수록 흡수가 잘 되는 것이다. 결국 작게 작게 작게 자꾸 작게 되서 흡수가 된다. 크고 위대한 것은 보고 놀랄 수는 있어도 먹고 소화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은 크고 위대한 것을 자랑하고 크고 위대한 것을 내세우려고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먹고 소화해서 내 것이 되게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작고 세미하지만 먹고 우리가 소화해서 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황제가 나오면 황제는 크고 위대하지만 아무도 그 황제를 먹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황제와 같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일 그 땅 위에 황제가 둘이 생기면 하나는 죽는 것이다. 위대한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작은 것은, 작으면 작을수록 우리가 먹고 소화해서 하나가 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마치 만나처럼 작은 분이다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군중들이 예수를 붙들어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했다. 그 분은 다음날 아침에 자신은 “생명의 떡(요6:35)”이라고 제시했다. 나는 너에게 먹는 양식이 되기 위해서 왔지, 내가 왕이 되려고 온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왕은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내가 먹을 수는 없다. 내가 먹고 그와 같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기에는 작을지 몰라도 내가 먹으면 나도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격의 세계에서만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자기와 하나 되기를 바라며, 자기 자신이 복제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격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에서만 그러하다.

 

세상에는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다. 대통령이 되면 누구도 또 하나의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장관이 되면 누구도 자기와 같은 장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혼자 해먹어야 된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다른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기독교가 부패하게 된 것은 크고 위대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크고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 속에 부패하는 균이 묻어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 아무리 그렇게 안 되려 하더라도 저절로 그 문으로 같이 들어오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크고 위대한 것이 아니다. 작고 세미하고 소화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든지 먹으면 그것이 음식이 되고 양식이 되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에게 기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분이다라고 알고 믿고 있다. 그런데 기적은 음식이 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기적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하나 되지를 못했다. 점점 기적이 올수록 더 멀어졌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적을 보고 사람들은 따라가려고 한다. 그런데 따라가는 것은 숭배하는 것이지 결코 그와 하나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더 놀라운 이적을 행하면 행할수록 다른 사람들과는 멀어진다. 왜냐하면 그 사람하고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 더 다를수록 더욱 더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기적이 필요하기는 해도,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 되지는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자기와 하나 되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려고 오셨다. 그러니까 먹고 섭취할 만큼 작은 분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타락도 어디서 왔는가 하면 크고 위대함을 추구하다 타락에 이르렀다. 선악과를 먹을 때 “네가 이것을 먹으면 선악을 아는 일에 정녕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창3:5)” 하는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다. 이것은 크고 위대해지려고 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고, 위치를 잃어버리니까 행복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위치가 있는데, 그 위치를 크고 위대하게 만들려다 보니까 위치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흙은 크고 위대한 것이 아니다. 가장 천하고 작은 것이다. 거기서 모든 것이 생성되어 나오고 거기서 모든 것이 살아서 나오는 것이 흙이다. 생명의 법칙은 다 이러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작고 세미한 것 속에서 생명이 살아서 나오지, 크고 위대한 것에는 빛 좋은 개살구라고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는 “서리 같이 가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르다는 뜻과 마찬가지이다. “서리처럼 가늘다”고 하였는데, 서리를 보면 아주 섬세하게 생겼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신기하게 생겼다. 아주 세미한 결정체이다. 그렇게 신기하게 만들어질 수 없다. 어떻게 기온이 물을 얼려서 그런 일정한 모양을 만들어 내는지, 그런 세미한 모양을 만들어 내는지, 서리를 자세히 보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보아야 하고, 자세히 들어야 하는 그런 것이 세미한 것이다.

 

예수님 말씀이나 예수님 자신은 자세히 보아야 하고 그 말씀은 자세히 들어야 하는 그런 분이다. 사람들이 모두 거죽만 보고 이적을 행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가고 쫒아 다니다가 어느 날 가서는 모른다 하고 버리고 갔던 일이 있다. 이것은 자세히 보지 않고 거죽만 봤고 껍데기만 봤다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를 거죽만 아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이 분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작기 때문에 모른다. 위대한 것은 그냥 보면 안다. 황제나 왕은 어디를 가도 표시가 난다. 위대하고 크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크지 않고 위대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로 세미한 소리이다. 황제의 소리처럼 놀라운 소리가 아니고 세미한 음성이다. 그러니까 자세히 들어야 하는 그런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은 자세히 들어야 하는 말씀이다. 열왕기상 19장 12절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 음성을 들을 때 그 모습을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라고 하였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곳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세미한 서리 같은 분이다. 그 모양과 음성이 서리 같아서 자세히 봐야 되고 깊이 들어야 되는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큰 소리가 날 때는 따르다가, 세미한 소리가 날 때는 듣지 못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 말은 세미한 소리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27:46)” 이것은 세미한 소리이다. 가령 죽은 나사로 보고 ‘일어나라’ 하는 것은 큰 소리이다. 위대한 소리는 다 알아 듣는다. 그런데 “아버지여 하실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세미한 소리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들을 수가 없는 말이고, 깊이 들어야 아는 말이다. ‘어떻게 저런 자리에 갈 수 있는가? 저렇다면 인생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자세히 듣지 않으면 그렇게 들린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자리에 가보면 ‘저것은 저주가 아닌가?’ 이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자세히 봐야, 깊이 봐야 ‘저기에 진실이 있고, 저기에 행복이 있고, 저기에 인생이 있구나!’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언뜻 보면 모른다.

 

서리가 왔을 때 언뜻 보면 허옇게 보인다. 지난 번 가창에서 보니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허옇더라. 그래서 눈이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눈이 아니고 서리였다. 서리는 세미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도 역시 마찬가지로 세미한 모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분이다.

 

셋째로 “둥글다”고 했는데 깟씨같이 둥글다고 했다. 둥글다는 것은 원만하다는 뜻이다. 둥그니까 기울어진 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온전하고 영원하다 이런 것을 표현할 때 둥근 것으로 표현했다. 작지만 온전한 생명이고, 작지만 완전하다는 이런 뜻이다. 크지만 모가 난 것은 모자라는 데가 있는 것이다. 찌그러진 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아도 동글동글한 것은 부족한 데가 없는 것이다. 작아도 온전하다. 작아도 온전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 그러하다. 생명은 작아도 온전하다.

 

마찬가지로 인격도 커서 온전한 것이 아니라, 작아도 온전한 것이 인격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큰 것이 좋다. 수석을 하는 사람들이 돌을 가져다 놓았는데, 큰 돌은 어지간하면 다 보기가 좋다. 그러나 작은 돌은 아주 공교롭게 생기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큰 덩어리는 이리 봐도 모양이 되고 저리 봐도 모양이 된다. 바위를 보면 그렇다.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이 없다. 크다는 이유 때문에 바위가 보기가 좋다. 그러나 작은 것은 여간 잘 생겨도 잘 생긴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물질은 다 그렇다. 크면 무조건 다 좋게 보인다.

 

그런데 인격은 그렇지 않다.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진실이라야 좋은 것이다. 작고 둥근 것이다. 인격은 작고 둥글어야 한다. 생명도 마찬가지로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작아도 생명 차체가 온전해야 되는 것이다. 개미의 생명이라도 온전하면 되고, 코끼리의 생명이라도 온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건강한 생명이라야 되는 것이지, 크다고 해서 생명이 좋은 것이 아니다. 작다고 해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보면 작은 사람이 더 딴딴하고, 오히려 힘이 있다. 큰 사람이 허벙한 경우가 있다. 생명은 크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작아도 온전하면 된다. 둥글다는 것은 온전하다는 그런 뜻인데 그리스도는 만나처럼 둥근 분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네째로 “희다”고 한다. 희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말인데 깨끗한 것은 단순한 것이다. 세상은 무엇인가? 크고 위대하지만 혼합된 것이다. 어차피 커지려면 혼합이 되지 않고는 커질 수가 없다. 순수한 것으로는 커질 수 없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섞어야 커지게 된다. 그런데 깨끗한 것은 단순한 것이다. 색도 한 가지 색이 깨끗한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것이다. 우리가 바벨을 보면 그것은 혼잡이라는 뜻이다. 왜 혼잡인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게는 만들었지만 깨끗함과 단순성이 없어서 진실하지 못하다.

 

주님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은 깨끗하고 단순한 길이다. 거기는 여러 가지가 없고 오로지 ‘나는 인생이니까’ 하는 이것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부르시니까’ 이것 밖에는 없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왜냐하면 ‘나는 아들이니까’ 이것 밖에 없다. 너무 단순하다.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오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나는 아들이니까, 나는 인생이니까, 나는 흙으로 지어졌으니까’ 이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없는 그것이 깨끗한 것이고 그것이 단순한 것이다.

 

그리고 이 깨끗하고 단순한 곳에 권능이 있는 것이다. 큰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이고 순진하고 온전한 여기에 권능이 있다. 그러니까 “희다, 흰 눈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깨끗하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세상과 아주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로 가는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는 저절로 깨끗하고 단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복잡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복잡하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단순해지지 않으면 불행해진다.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그 유일한 목적 하나만 있어야 행복하고 그래야 힘이 있는 것이다. 유일한 목적을 위해 지어진 존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능력이 없어져 버린다. 용도도 없어지고 가치도 없어진다. 오로지 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한 목적으로만 쓰여질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생도 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서 사용될 때 그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그 때 권세가 있기 마련이다.

 

다섯째 “단단하다”는 말은 확고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그 형태가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모양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확고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확고한 위치를 갖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위치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어떤 것으로도 그 모양을 바꿀 수 없다. 형태를 변경시킬 수 없을 만큼 확고한 형태다.

 

그러니까 우리가 확고한 사람이 되려면, 내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요동치 않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는가? 강심장이 되어야 되는가? 그렇지 않다. 강심장도 별 수 없다. 결정적인 자리에 가면 강심장도 별 수 없다. 확고한 자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운명만이 확고하다. 그것은 누구도 흔들 수 없다. 흔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흔들릴 수도 없으며 흔들릴 필요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것은 요동치 않는 자리다. 어떻게 하늘은 요동치 않는가? 왜 하나님의 보좌는 요동치 않는다고 하는가? 왜 그리스도는 요동치 않는다 하는가? 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위치는 단단하고 확고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을 사람 되게 하려면 그 위치가 확고해야 한다.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하면 안 된다. 언제나 영원토록 동일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그런 분이니까, 그분을 영원히 그렇게 하려면 우리 위치가 확고해서 영원히 똑같아야 한다. 그 똑같을 수 있는 자리는 이 자리 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결심을 해도 결심이 똑같을 수는 없다. 내 생각이 똑같을 수 없고 또 내 마음이 똑같을 수 없으며, 무엇도 다 똑같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그 자리만 우리는 절대 불변의 자리이고,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리이며, 내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자리이다. 이것만이 단단하고 견고한 자리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만 요동치 않는 사람이다. 바다가 엄몰해 올지라도 요동치 아니하고, 폭풍이 불어올지라도 요동치 아니하며, 땅이 진동할지라도 요동치 않는 그런 사람이 된다.

 

십자가 안에서 그의 형태는 영원히 확고하게 고정되었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자리로 고정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랐다고 한다. 하나님 보좌 우편은 영원히 확고한 자리이다. 그 자리에 올랐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여섯째 “모양이 베델리엄 같다”고 하였다. 베델리엄은 진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진주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 있고 조개에서 나오는 것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조개에서 나온 것이다. 나무에서 나오는 것은 나무의 진이 나와서 응고된 것인데, 그것을 베델리엄이라고 한다. 목진주(木珍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밝고 투명하다. 눈알처럼 생겨, 눈동자 같이 맑고 투명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통찰하는 그런 눈이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투명한 눈이다. 계시록에 보면 네 생물이 나오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계4:6)”고 한다. 이 말은 그 존재 자체가 완전히 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존재 자체가 앞 뒤에 전부 눈이니까 그렇다. 눈으로 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런 뜻이다. 맑고 투명하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라고 하였다. 단순하고 깨끗하고 확고한 그 자리에서, 모양이 베델리엄 같은 그리스도를 우리는 보게 된다.

 

일곱째 “그 맛이 신선한 기름 맛 같았다”고 한다. 신선한 기름 맛은 한면으로는 향기롭고, 한면으로는 달콤한 것이다. 참기름도 처음 짜서 먹으면 기름임에도 불구하고 그 향기가 신선하다. 그리고 맛이 달콤하다. 설탕처럼 달지는 않지만 달콤하다. 그리스도는 신선하고도 향기롭고 맛있다는 그런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덟째 “꿀 섞은 과자 맛 같았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달콤하다는 말이다. 꿀 섞은 과자 같다는 것으로 달콤하다는 말이다.

 

아홉째 “이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이것은 비밀이다는 것이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하늘에서 왔고 피조물에 속하지 않고 그렇지만 인간을 기르는 것이니까 신기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영으로서, 장막으로서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왔는데 영인지 물질인지 모른다. 그래서 논란이 많이 생겼다. 어떤 사람은 순수하게 영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파에서는 예수는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고 어떤 파에서는 ‘인간이지 신은 아니다’ 한다. 그래서 논란이 생겼다. 왜 이런 논란이 생겼는가? 그분이 분명히 살아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것은 사실인데 겉모양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신처럼 보이고 어떤 면에서는 인간처럼 보여서 나온 논란이다.

 

이 비밀이 어디 있는가? 무엇이 이런 것이 있는가?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데 다만 우리 속에 살아서 생명이 되어 나를 변화케 하고 나를 새롭게 하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그런 것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사람 속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케 할 수 있다. 영도 물질도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면서 우리 안에 거하는 생명으로서, 우리의 인격이 되시기 때문에 그것은 비밀이다 이것을 알 수 있다. 비밀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어떠함이 그대로 만나의 특징들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49,51)”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하늘에서 온 만나로 오셔서 당신의 모든 인품과 인격을 통해서 우리를 사망의 늪에서 구원하시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만나가 되시고 우리 안에서 양식이 되시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시고 우리 안에서 인격이 되셔서 우리를 변화케 하고 새롭게 하고 우리를 확고하게 하시고 비밀스럽게 하신 당신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영원히 먹고 삶으로서 당신과 하나가 되고,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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