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유일한 길
2019. 1. 18. 이현래 목사
모든 문제가 시작할 때는 모두 아주 간단하게 시작한다. 왜냐하면 시작한 사람도 간단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복잡하다고 생각했으면 시작을 못한다. 그런데 잘못된 생각은 가면 갈수록 복잡해져가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해결이 안 된다. 잘못된 것을 고치려면 점점 문제가 간단해져야 한다. 그래야 해결이 된다. 문제가 커져서는 해결이 안 된다.
인간 문제도 마찬가지로 처음 시작은 간단하다. 창조도 간단하고 이탈도 간단하다. 창조는 하나님이 하셨으니까 우리는 복잡한지 간단한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우리가 듣기는 간단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이 말씀은 더 이상도 더 이하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또 이탈도 아주 간단하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는 말을 듣고 이탈했다.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이 시작한 것은 점점 단순해지면서 답이 명료해지는데, 사탄이 시작한 것은 처음은 간단한 것 같은데, 갈수록 퍼지고 커져서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해진다.
세상문제를 보면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딘지 모른다. 더군다나 서양 문명이 전파되면서 생각을 해도 어떤 근원을 생각하기 보다는 현상에서 답을 찾으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과학적이다.
지금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의학계를 보면 과학적인 여러 도구나 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조사해서 현상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해결은 안 된다. 왜냐하면 근원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벌써 20년이 되었는데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에 가니까 조울증 환자에게 상담하고 말고가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말을 들었다. 조울증 환자는 자기 몸에서 염분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몸은 모든 것을 항상성을 유지해야 한다. 너무 달게 먹으면 당분을 배설시키고, 너무 짜게 먹으면 염분을 배설시켜서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항상 항상성을 유지하는데, 이 발란스가 깨져버리면 병이 되고 만다.
그런데 조울증 환자의 피검사를 해보면 피의 염분농도가 다르다고 한다. 그러면 조울증은 치료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왜냐하면 피를 검사해서 이런 이상이 있는지는 아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몰라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생명은 신비하다. 생명은 전부 유기적이기 때문에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증상이 생기려면 많은 과정을 거쳐서 증상이라는 마지막 단계로 표현이 된다. 그것을 연구해서 치료하니까 증상을 보고 치료하는 대증요법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한 번 정신과 환자가 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 병원에 다녀야 한다. 아직은 약이 없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현대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인류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신학도 현대문명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갈수록 복잡해지는 것 같다. 신학자들이 연구한다는 것이 아주 지엽적인 것들로 연구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수 없이 많아져서 점점 더 지엽화되고 있다. 뭘 해결하려고 또는 뭣 때문에 신학을 하려는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 신학공부를 많이 하고 싶은데 못했다. 어제는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것에 빠져들 사람인데 하나님이 막으셨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형편이 안 돼서 못하게 되었다. 내가 저렇게 되었더라면 지금 뭘 하고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생물학자에게 뭘 연구하느냐고 질문하니까 곤충 앞다리를 연구한다고 한다. 뒷다리 연구하는 사람, 앞다리 연구하는 사람, 곤충 눈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세분화되어 있으니까 평생을 곤충 앞다리를 연구하다가 만다.
우리 인생문제도 그런 것 같다. 내가 신학을 다 모르지만 잠깐 들어보니까 그런 방향이었다. 그것 자체로는 말이 되는데, 인생의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답을 찾지 못하고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행히 오리엔트 문명은 모든 것이 근원에 달려있다. 신의 계시라고 해서 비과학적이다. 그런데 답은 거기에 있다. 우리같이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찾아가야지 복잡한 것을 찾아가면 나 자신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문제의 근원은 간단하다. 사람의 생각과 세계에 들어오면 복잡해진다. 아담은 처음에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하나님 같으면 하나님도 편하고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하나님 일을 다 하고, 하나님 마음을 다 알아서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하고 생각했다고 할 수도 있다. 꼭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는 일이 된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좋겠는가? 우주 안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생기겠는가? 그래서 아담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복잡하게 되고 말았다. 바벨론, 바벨탑까지 가서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곤충 앞다리 연구하는 사람과 곤충 눈을 연구하는 사람이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평생 연구하는 것이 그것뿐이라서 다른 것은 모른다. 한 가지에 몰두에서 연구한 사람들은 다른 것은 아예 모르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전문의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자기 분야밖에 모른다. 대학교(학부) 때는 다 배운다고 하는데, 전문의 과정을 겪어서 면허를 받고나면 다른 것은 거의 모른다. 어떤 하나만 깊이 아는 그 사람이 전문가이다. 우리처럼 다방면으로 알고 하는 사람은 박사가 아니다.
인생문제도 그렇게 되면 아무리 해도 답이 없다. 차라리 세상문제나 인간문제를 해결하려면 불교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아주 조리있게 사람의 문제를 해명하고 원인을 찾아서 대책을 이야기해준다.
요즘 불교의 승려들이 나와서 설교하는 것을 보면 아주 잘해서 목사 설교 듣는 것보다 낫다. 목사 설교를 들으면 답답하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승려들의 말을 들으면 합리적이고 누구나 수긍이 된다. 설교를 들으려면 그런 것을 듣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대한민국이 복잡해진 것처럼 복잡해졌다. 설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미 거듭나고 바꿔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설교를 한다. 믿음을 강조하고 충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방향이 바꿔진 사람이 할 일이다. 그냥 아담으로서 해도 안 되는 일이다.
바울이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2).”고 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저런 소리를 하는가 하지만 그 말이 맞는 말이다. 다 무익하게 되어서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이런 세계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온 것을 보면 청천벽력 같은 소리이다.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는 것이다. 이 말을 무식한 사람이 해 놓으니까 말이 많다.세상을 몰라서 그렇지, 우주를 몰라서 그렇지, 진리를 몰라서 그렇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비웃는 사람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천하인간의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종교다원주의가 생겼다. 유일하니 절대적이니 이런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것이 지금의 현대문명이다.
요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제일 거부감 많은 것이 유일하거나 절대적이라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그렇게 받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말하면 말이 안 된다. 왜 그것을 유일하다고 하는가? 왜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하는가? 왜 그것을 강요하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요즘 젊은 아이들의 말이다.
그런 곳에 가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은 끝났다.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소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이 아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난감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없어지거나 재생하거나 해야지 앞으로 불교에게 밀리지 싶다. 불교에서 하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온 것이지 그냥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성적으로 들어보면 불교의 말이 맞다. 그런데 왜 교회를 왔는가?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나는 베드로의 말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경험으로는 그 말이 맞다.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는 이 말은 너무 맞는 말이다. 왜 그런가? 문제의 근원을 가지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나는 별로 잘못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모르시겠지만 나는 말썽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내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 나는 빗나간 사람이었다. 내 자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환경이 좋아서, 배운 것이 그래서, 나는 모범생이 된 것뿐이지 원래 태어나기를 다르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 다 같은 인간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 옳은 말씀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한다. 무슨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가? 옛날에 나는 그 말씀이 인정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니까 나도 죄를 범해서 안 된다는 말인가? 내가 그만한 죄를 지었나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 제대로 들리지 않고 다르게 들린다. 내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말씀이 별로 없고 그렇다고 하더라는 식으로 들리고 남의 이야기로 들렸다.
하나님 하신 말씀이 내 이야기로 들리면 그때부터 다른 것이 생긴다. 그런데 내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말씀으로 듣는다. 그러니 사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는 지옥을 내놓고 믿지 않으면 펄펄 끓는 불구덩이에 간다고 하니까 그것이 겁나서 교회를 다니고 했었다. 아주 순진한 때였다. 요즘에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그래서 전도가 안 된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 같은 것을 만들어서 젊은이들을 불러들여서 교회 테두리 안에서 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몇 사람이나 하나님 말씀이 들릴지는 모른다. 그렇게 어렵게 되었다.
성경을 보고 내 말로 들렸다는 것은 너무 놀라운 일이다. 전혀 이치에 안 맞는 말을 믿는 것이다.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믿어야 될 말인가? 믿지 않아야 될 말인가? 그런데 그 말을 믿는다. 그것이 정말로 믿어진다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정상적이지 않은 그런 일이다. 이것이 정말로 믿어지는 것은 기적이다. 안 될 일이 됐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안 될 일이 됐다고 하는 이야기가 없다. 다 될 일이 되는 것이지 안 될 일이 되지 않는다. 인과응보이다. 그런데 성경은 안 될 일이 된 것이 너무 많다. 그것을 믿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잘못 교조적으로 교리적으로 문자적으로 믿으면 사람이 이상하게 된다. 안 될 일을 믿고 있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이상한 사람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교리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면 참 좋은 사람도 많지만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왜냐하면 사고방식이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사고방식만 그렇게 되니까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
나는 40년 동안 설교라고 생각하고 말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설교할 자신이 없다. 설교를 하려면 나도 못하는 일을 하자고 해야 한다. 나도 못하면서 남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설교를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성경이 있어서 40년 동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성경이 없었으면 설교를 못한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우리는 성경에 있는 대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재미있다. 논문은 이러이러한 것을 모아서 정리해서 합리화 시킨 것이다. 논문은 마지막 끝에 가면 답이 있다. 그런데 성경은 마지막 끝에 가면 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맨 처음에 한 말이 답이다.
창세기의 답은 창세기 1장 1절에 있다. 그것이 답이다. 요한복음은 요한복음 1장이 답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있다. 귀납적인 방법이 아니다. 서양학문을 하는 방법이 아니다. 성경은 학문이 아니다. 편지를 쓰는데 논문처럼 쓰는 사람이 없다. 급한 이야기부터 하고, 왜 그랬는가 하는 것은 뒤로 하는 것이지 논문 쓰는 것처럼 써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은 맨 처음에 있는 말씀이 답이다. 그것만 알면 뒤에 있는 것은 읽어보지 않아도 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시작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했는지, 무엇 때문에 창조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 구절만 알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이상한 길을 걸어왔다. 성경을 다 읽어보지도 못했고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것밖에 없는데, 걸리기가 딱 그 첫 구절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궁지에 몰리니까 갈 데가 없고 길이 없으니까 근원적인 문제로 가게 되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여유가 없으면 근원적인 문제로 가게 된다.
내가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게 된 것은 내가 성경을 연구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니까 그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길이 없으니까 사람이 목숨을 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의지력이 약해서 그것도 못했다.
거기서 배회하다가 그 말씀이 어떻게 들려왔다. ‘내가 너를 지었다.’는 말씀에 ‘나는 피조물입니다.’하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것이 내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대답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큰 파장으로 퍼져나갈 줄은 몰랐다. 내가 지식을 추구했더라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창조론자를 지지하는 사람이 되거나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거나 하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 인생과 결부되어 있으니까 그 다음이 순서대로 성경에 써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나는 피조물이구나.’하는 것을 아고 나니까 ‘나를 왜 지었을까?’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또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뭘 모르는 사람은 질문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뭘 좀 아는 아이들이 질문을 하지 모르는 사람은 질문 자체가 안 된다. 시험공부 하는 아이들이 뭘 모르는지를 알아야 공부가 되지 뭘 모르는지 모르는 학생은 공부가 안 된다. 책상에만 앉아있지 진도가 안 나간다. 선생님을 만나도 뭘 모르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물어볼 것이 없다.
설교를 들으나 성경 강해를 들으나 물어볼 것이 없다. 그 자체의 지식적인 것은 물어볼 수 있어도 자기 인생과 관계된 것은 물어볼 수 없다. 문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그냥 끝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진 존재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그런데 이것을 왜 고치지 못하는가? 마귀가 와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알아도 못 고치고, 몰라서도 못 고친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죄 문제를 취급하는 거의 유일한 종교이다. 불교나 유교는 죄 문제가 별로 없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죄가 기본이다. 기독교하면 죄인데 아직도 해결아 안 된다. 서양 사람들은 교회에 안 다니고 예수를 믿지 않아도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가 죄라는 것을 다 안다. 기독교문화권 속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우리가 교회를 다녀봐서 안다. 죄 죄 하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만 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맨날 그것만 회개를 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다. 회개를 했으면 고쳐져야 하는데 고쳐지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모른다는 말이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문제만 계속 풀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이 복잡하니까 말이 많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경도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고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이탈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은 건져내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건져냈느냐는 것이다. 한 가지 문제다.
구약성경에는 국가적인 문제도 있으니까 그것을 빙자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 목적은 아주 간단하다.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것과 똑같다. 아들을 잃어버렸으면 아들을 찾는 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으면 드라크마를 찾는 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인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성경도 아주 간단하다. 바벨로 가는 사람들은 도저히 안 될 사람들이니까, 거기서 스스로 우리가 잘못했다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거기서 여론조사하고 통계를 내서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고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냈다. 불러낸 것이 시작이다. 제2의 창조를 위해서 우리를 불러낸 것이다. 부르심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올 수가 없다. 이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왜 부르심을 거절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부르심에 응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몰라도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이 있고, 다 아는 것 같은데 부르심에 응하지 않고 자기가 해보겠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유를 잘 모른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절대로 후회함이 없다. 물론 부름 받아도 택함 받은 사람도 있고, 택함 못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다 부름 받음에 속해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아브라함이 좋았다면 당연히 예수를 좋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말씀할 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8:56,57).”고 비난했다. 그런데 예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는 사람이 맞다. 아브라함을 참으로 좋아하면 예수를 좋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구원이 있고, 예수 시대에도 구원이 있다. 아직 예수가 오지 않았어도 구원 받은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다. 왜? 아브라함을 따라오면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롯은 아브라함이 아닌 다른 것을 따라갔으니까 멸망했다. 아브라함을 따라온 사람은 결국 예수 안으로 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그 계보가 같은 계보이다. 꼭 유대 민족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질이 같은 계보이다. 100살에 아들을 얻었다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더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야기로 하면 황당한 이야기이다. 100살에 어떻게 아들을 낳겠는가? 아브라함의 생각이 맞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사라의 생각이 맞다. 웃었다고 되어 있다.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잘못했으면 책망을 크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책망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아이들이 뭘 모르고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벌을 주는가? 모르고 한 것인데 어떻게 벌을 주겠는가? 그래,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고 할 수도 있다. 모르고 하면 그렇다. 그리고 영 이야기를 해도 벽창호고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고 해야 한다. 기어코 알게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이 죽는다. 도저히 안 될 사람에게는 네 말이 맞다고 해야 숨을 쉬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러실 것 같다. 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그래, 그래, 네 말이 당분간 맞다고 말씀하지 않을까 싶다.
아브라함의 100세라는 말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뛰어 내렸다는 그 말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유일하게 약속을 받았다. 네 후손을 이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나님의 그 약속 때문에 이 가나안에 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이 땅을 네게 주겠다는 것이고, 네게 후사를 주어서 바다의 모래수와 같이 하늘의 별 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이 두 가지를 약속했다. 그런데 이것이 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믿음까지 다 끝났다. 믿음까지도 거기서는 소용이 없다. 의롭다함을 받았던 그 믿음까지고 거기서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사람에게 거기서 믿음이 소용이 있겠는가?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하고 말할 때는 할 것을 다 해봤다는 그 말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내가 다 했는데 왜 나를 버리느냐는 말이 아니겠는가? 나로서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안 된 자리가 사람에게 또 있다.
아담은 그것을 좀 이겨보려고, 그것을 좀 어떻게 해보려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지 않았겠는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우리 속에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다.
우리 안에도 정말로 우리가 한계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우리 안에도 만일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이 들어온다면 그것을 안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5:12).”하는 말은 아담 한 사람인데, 그 안에 우리가 다 포함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라고 안 그렇겠는가? 거기서 믿음을 지키겠는가? 우리가 극복 못할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극복을 못한다. 이기지 못한다.
죽지 않게 해주겠다고 하면 무엇을 내놓지 못하겠는가? 죽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나는 그것이 자신이 없다. 죽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해주겠다고 하면, 그것이 내가 믿어지면 나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나는 죽어도 안 하겠다고 할 자신이 나에게 없다. 하나님이 그것을 미리 아시고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범죄하지 않도록 해 주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