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연합의 길 - 다. 생명으로 건축함
(창2:19-23)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연합의 길 세 번째로 자기 생명으로, 자기 생명을 줌으로써 건축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이것은 아담이 돕는 배필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생물들 중에서 돕는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배필이라고 할 수 있는 합당한 이름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생물이거나 육체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각종 생물들을 이끌어오셨지만 그 안에서 자기의 배필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단순한 생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물들과 유사성은 있지만 단순한 생물이 아니고, 육체로서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이지만 단순한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배필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단순한 생물도, 육체도 아닙니까?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생물들이나 동물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면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원래 어원은 ‘기절시키다. 정신을 잃게 하다.’입니다. 혼수상태, 깊이 잠든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잠들매’라는 말은 상징적으로 그가 죽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담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뜻이나 생각이나 의사(意思)나 계획이 모두 다 잠들었다는 뜻입니다. 잠잘 때는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쉬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들게 하시니’라는 말을 썼습니다. 사실상은 그것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죽어서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수술을 할 때 전신 마취를 하면 사람은 의식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때는 어떤 뜻이나 어떤 계획이 있더라도 다 없어져 버립니다. 정지돼 버립니다. 그래야만 수술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을 때 아담의 모든 것이 다 정지되었고, 자기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였다고 하였는데, 혼수상태는 깊이 잠든 상태이고, 잠든 상태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바로 거기서 갈빗대를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갈빗대는 호흡 기관입니다. 우리는 허파로 숨을 쉬지만 허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갈빗대입니다. 결국 갈빗대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빗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은 호흡을 하지 못합니다. 갈빗대를 취하셨다는 말은 호흡하게 하는 것을 끄집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였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이 우주 안에 하나님의 신(神), 하나님의 영이 왔다는 것입니다. 영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육지가 드러나라. 식물이 나라. 해와 달과 별들이 있어서 징조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라. 물에는 고기가, 공중에는 새들이, 땅 위에는 짐승들이 있으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이 와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아담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생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2장 21절에서는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생기이고, 세 번째는 갈빗대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영에서 생명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이었는데 마지막에는 갈빗대입니다. 갈빗대는 호흡,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와서 어떤 창조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왔을 때 어떤 창조가 일어나게 되고, 생기가 왔을 때 어떤 창조가 일어나게 되고, 갈빗대를 취할 때 어떤 창조가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생명이 주어져서 무엇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기술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만들 때는 기술로 만들고, 일을 할 때는 생각으로 하지만 생명을 만드는 것은 생명이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들어가지 않으면 생명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엊저녁에 복제 양 다음에 복제 돼지를 만들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생명이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생명이 들어가지 않으면 생명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것은 생명을 취하기 위한 것이고, 생명을 취한 것은 또 다른 생명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
이 말은 갈빗대가 없는 자리를 살로 메꾸었다는 것인데, 살은 있어도 숨을 쉴 수 없습니다. 폐를 수술해서 갈빗대를 제거해 버리면 갈빗대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는 호흡을 할 수 없습니다. 살로 대신 채우셨다는 것은 숨을 쉬게 할 수 있는 것을 제해 버리고 대신 숨을 쉴 수 없는 것으로 채우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대신 채우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의 생각이나 뜻이나 의사(意思)나 계획이 있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의식이 없으므로 그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대신에 그 자리를 죽음으로 채우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생각이나 뜻이나 의사나 계획이 잠들어 죽음으로 그 자리가 대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온, 죽음으로 대치된 그 생명을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생명으로 교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담이 잠들고 갈빗대가 나와서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것도 기술적인 의미나 사업적인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라고 알아야 됩니다. 생기가 아담에게 들어온 것도 기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포기된,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기서 ‘만들었다’는 말은 ‘건축하다. 집을 짓다.’는 의미로 다른 것을 만드셨을 때와 다릅니다.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였을 때의 ‘창조했다.’는 말과, 아담을 만들었을 때의 ‘만들었다.’는 말과, 하와를 만들었을 때의 ‘만들었다.’는 말이 각각 의미가 다릅니다. 처음에 ‘창조하셨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었다는 뜻이고, 두 번째 아담을 만드셨을 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산 혼이 된지라.’ 하였을 때는 ‘어떤 형체를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재료를 가지고 형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나무와 책상을 예로 들면, 원래 나무가 산에 난 것은 창조라 할 수 있고, 그 나무를 가공한 것은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책상을 만든 것은 창조가 아니라 가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를 만든 것은 건축에 해당됩니다. 어떤 규모를 조합하고 연합시켜서 하나의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자를 만드신 것은 ‘지었다. 건축하였다. 세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와를 보고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였습니다.
남자는 ‘이쉬’이고 여자는 ‘이솨’입니다. 비슷한 말로서 ‘상대자(相對者)’라는 뜻입니다. 남자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라는 것입니다. 남성형에 대해 여성형이라는 말이니까 서로 상대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말은 완전하게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오늘 그리스도와 교회를 놓고 보지 않으면 이 말은 단순하게 ‘사람을 만들 때 이렇게 만들었다.’ 하는 신화(神話)와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지으실 때 꼭 이런 과정으로 교회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하였고, 사도행전 20장 28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교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얻으실 때 어떤 기술(技術)이나 능력이나 사업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은 기술로, 사업으로, 혹은 능력으로 교회를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작품이 될지는 몰라도 생명을 주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그 교회는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기술과 능력으로, 사업으로 만든 것이지 그 사람의 생명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마치 회사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회사는 창업자가 자기의 능력과 기술과 사업으로 키워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회사와 창업자와는 하나가 아닙니다. 이병철 씨와 삼성 그룹 사이에는 전혀 생명의 관계가 없습니다. 분명히 이병철 씨가 만든 것이지만 이병철 씨와 삼성 그룹 사이에는 사업의 관계, 능력의 관계, 기술의 관계밖에 없습니다. 오늘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업체가 아닙니다. 만일 교회가 사업체라면 교회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교회는 사업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능력으로 교회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능력으로 교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사업으로 교회가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생명을 주어서 된 것입니다. 그분 자신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생명을 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들 시대에 와서야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단지 제자들에게, 온 인류에게 자기의 생명을 주셨을 뿐입니다. 아담의 생명을 끝내고 부활의 생명을 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을 준 것이 교회가 된 것입니다. 씨를 뿌린 것이 밭이 된 것입니다. 씨가 와야만 밭이 됩니다. 다른 것은 아무리 있어도 밭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농부는 그 씨를 뿌린 것뿐이지 그 씨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씨가 없이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그분에게서 취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분이 죽고, 잠들고 난 다음에 거기서 생명이 나와서 교회가 건축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낳고, 아들은 교회를 낳았습니다. 이 과정은 전부 생명으로 된 과정입니다. 결코 기술이나 사업이나 능력으로 된 과정이 아닌 것입니다.
능력이 나타나서 병이 고쳐지고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수없이 모이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법으로 교회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미 벳세다 광야에서 교회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왔던 사람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서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죽고 다시 산 후에 교회가 나왔습니다. 그분에게 능력이 있을 때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에 의해서 사람들이 모였다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얼마나 교회에 대한 명백한 계시입니까! 이 계시가 분명하게 된다면 교회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참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시고, 아들은 교회를 낳았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주어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갈빗대를 빼내는데 내가 죽지 않고 어떻게 빼내겠습니까? 나의 생각과 뜻과 의사와 계획이 있는 한 나는 남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만 줄 수 있습니다.
요즘 TV 드라마에 허준과 그의 스승 유의태의 이야기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유의태는 허준에게 자기가 죽으면 배를 갈라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생체(生體)를 제자에게 주기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내줄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제자들을 불러놓고 그런 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이 없이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예입니다.
오직 죽음으로만 생명이 대치됩니다. 자기에게는 죽음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서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죽고 너희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살고, 내가 살게 되면 다른 사람이 죽게 되는 이치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일생이 갈빗대가 빠져 나간 인생입니다. 죽음으로 그 자리가 대치되어 있었고, 빠져 나간 갈빗대는 교회가 되어 각처에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고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절대적인 하나는 오직 생명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데서는 하나된 것이 없습니다. 죽고 다시 난 생명 안에만 하나된 것이 있습니다.
생래적(生來的)인 생명 안에는 하나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은 거기서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의 배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생래적인 생명과 죽고 다시 난 생명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생명, 생물학적인 생명 안에는 하나됨이 없습니다. 육체 안에는 하나됨이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서 다 분리돼 있습니다. 소와 개가 다르고, 개와 말이 다르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같은 육체이지만 다릅니다. 거기서는 절대로 하나됨이 없습니다.
두 번째 생명, 죽고 다시 난 생명, 부활한 생명 안에만 하나가 있습니다. 그 이전의 생명 안에는 하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전 생명을 가지고 ‘왜 하나가 안되는가?’ 한다면 어이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평생동안 싸워 봐도 안되는 일입니다.
엊저녁에 어떤 형제가 간증하면서 “옛것은 다 끝나고, 구약이고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다.”라고 하였습니다. 생물학적인 존재 안에서는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형제는 아내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결혼하기 전에 3년을 좇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까 하나가 안되어 40년 동안을 싸우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옛것이 떠나가고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생물 안에서는, 육체 안에서는 하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왜 하나가 안 되는가? 왜 둘로 갈라져 있는가, 왜 셋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죽음을 거쳐서 나온 것만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갈빗대 대신 살로 채워진 자리에서만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 갈빗대가 생생하게 있고서는 생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으니까 이 여자야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비록 사탄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하와는 깨끗합니다. 이 생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복할 가능성이 늘 있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온전한 생명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갈빗대에서 나온 교회는 비록 세상으로 인해서 오염되고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갈빗대에서 나온 것이므로, 죽음을 거쳐 나온 생명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능성을 절대로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역사 안에서 교회들이 크게 혼란을 빚어서 큰 홍수처럼 밀려가고 있어도 항상 생생하고 맑은 지하수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흘러가는 물결밖에는 보지 못하였고, 겉으로 흘러가는 교회의 역사밖에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맑은 물, 생명의 물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죽음을 거쳐 나온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히 없어질 수 없는 생명입니다. 흙탕물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맑은 물이 나오고 생수가 나옵니다. 물이 다 없어졌는가 했더니 땅 속에서 생명수가 솟아 나와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전히 발전하고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건축’이라고 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합해서 하나의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니까 건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판자 조각을 연결해서 지어진 것이 방주이고, 여러 가지 재료로 지어진 것이 집입니다. 이것이 건축입니다.
통나무를 가지고 새겨 놓은 것은 조각이지만, 여러 개의 조각들을 붙여 놓은 것은 건축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여러 개의 조각들을 붙여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구조물입니다. ‘여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건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나와서, 그 생명이 퍼져서 그 생명이 다시 건축되어진 것입니다. 씨를 뿌려서 밭이 되고, 열매를 거둬서 곡식의 단이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건축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통나무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판자 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연합해서 있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교회는 그분의 생명의 변신, 생명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가 되었을 때는 모양은 분명히 다르지만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생명이 완전한 생명이기 때문에 언제 다시 나와도 완전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풀 씨가 한번 떨어지면 언제 나와도 한번은 나오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떨어졌기 때문에 언제 나와도 그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하나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주님이 죽으심을 통해서 건지시고 갈빗대로 우리를 창조하셔서 새로운 인격 새로운 단체 새로운 사회가 되도록 우리를 건축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아담이 말했던 것처럼 주님 자신이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신 말씀을 우리가 듣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영원토록 주의 형상이 드러나서 당신의 갈빗대가 얼마나 온전한가를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완전한가를 우리를 통해서 증거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