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66. 가나안으로 가는 길(1)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남

작성자생명의 목장|작성시간20.11.20|조회수48 목록 댓글 0

66. 가나안으로 가는 길(1)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남

<창11:27-32>
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 오세에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노아의 후손에서 십대를 거쳐서 아브라함이 나왔는데 아브라함의 길, 그것은 곧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육지 같으면, 물질적인 것 같으면 아무나 가고 오고 되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이 특별한 길이고 또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만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보여진다.

데라의 계보를 보면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이렇게 세 아들을 낳았다. 아브람은 사래를 통해서 이삭을 낳고 나홀은 밀가를 통해서 브두엘을 낳고 브두엘은 이삭의 아내가 되는 리브가를 낳았다. 그리고 하란은 롯을 낳았다. 그런데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죽고 그 아들 롯만 따라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브람과 롯 가정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롯은 또다시 소돔으로 갈라지고 아브람만 성지에 살게 되는 그런 결과가 되게 되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왜 데라는 가고자 했지만 못 갔을까 하는 이유가 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을 보면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며 다른 신을 섬겼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데라는 가고 싶었지만, 갈려고 했지만 못 갔다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나홀은 왜 못 갔을까 하는 것인데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머물렀다. 거기서 더 이상 가나안으로 진출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역시 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자세한 기록이 없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첫 번째는 죽은 자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란은 이미 본토에서 죽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가는 노정에 포함될 수 없었다. 아예 가고자 할 수도 없고 또 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산 자가 필요하지 죽은 자로서는 자기를 표현할 수 없다. 죽은 자에게서는 이미 하나님의 일이 끝나기 때문에 죽은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꼭 육신적인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죽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깊이 계시해준다. 아담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은 결국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이런 말인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니까 결국 죽은 자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 하는 것이 첫째로 보여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 했으니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섬기면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없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한 하나님만이 머리가 된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 한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그 나라에 참여할 수가 없다. 데라는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을 섬겼다. 아무리 가고자 원할지라도 다른 신을 섬기고서는 갈 수가 없다. 옛날에는 이것이 신이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많은 것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에게서 절대적인 것, 그 사람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이 그 사람의 신과 같다. 그것들이 신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 그 사람의 신의 위치에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가 그 사람의 신의 위치에 있기도 한다. 다른 신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종교적으로 말하는 그런 신만을 의미하지 않고 수많은 것들이 신이 될 수 있다. 세상을 요란케 하는 가수라든지 스포츠맨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어 있다 하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그 나라에 참여할 수가 없다.

세 번째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들어가도 함께 살지 못한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마지막까지 그 땅에 들어갔는데 결국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인데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같이 살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었다. 롯은 소돔 땅을 볼 때 물이 넉넉하고 농사짓기가 좋고 목축하기가 좋고,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서 그것을 택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다음 구절에서 소돔은 죄악이 관영 했더라 이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죄악이 관영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이 살기에 좋다는 이유로 거기를 택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의 표본이다. 롯은 결국 소돔 땅에 살다가 유황불을 맞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겨우 거기서 살아나기는 살아났지만 결국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고 말았다. 모압과 암몬의 조상은 저주받은 조상이다. 왜냐하면 그 후손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도록 규정되었다. 아무리 함께 한 땅에 살았다 해도 세상을 사랑하면 한 세계를 갖지 못한다. 아브라함과 롯은 그렇게 멀리 살지 않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첫째로 산 자의 하나님이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일곱 남편을 지났던 여자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렇게 말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니까 현재적인 하나님이다.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적인 하나님이다. 영원한 현재다. 이 안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시간적으로 생각할 때 현재 이러면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고 생각 되는데 하나님이 현재적이라는 말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영원히 현재적이다. 이 영원히 현재적인 하나님 안에는 과거라는 것이 없다. 그것도 영원히 현재니까. 미래라는 것도 없다. 그것도 역시 현재니까. 영원 안에 있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항상 계시는 분인데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니까 산 자의 하나님이다.

죽은 것은 절대로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다. 시체를 만지지 말아라 이런 말이 나오는데 누가 죽은 자냐? 바로 아담이 죽은 자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아담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죽은 자의 삶이고 그것은 죽음을 실행하는 삶이지 결코 산 것이 아니다. 육신적으로는 호흡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죽은 것이니까 사신 하나님과는 관계가 끊어졌다. 사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은 다 죽은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오게 된다.

여자는 살아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다 죽었다. 산 자인 여자에게 끊어진 사람은 결국 다 죽은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끊어진 사람은 모두가 죽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결국 죽은 사람이다. 이 죽은 사람은 다시 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을 향해서 다시 살아나야 그때 하나님과 관계가 되지 하나님께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니까 죽은 자가 되고 말아버린다. 이 죽은 자는 하나님과 무관하고 죽은 자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참 하나님이어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데라는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참이신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신을 섬기고 있는데 참인지 아닌지 그것이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 하면 안 보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그 아들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냐? 예수를 볼 때 예수의 하나님은 진실하다, 예수의 하나님은 참이시다, 그렇게 증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참이시니까. 석가모니도 있고 많은 사람이 다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우리가 모른다. 그들을 보고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참인지 아닌지를 모르지만 보이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그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인 아들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된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예수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 그가 하나님이라고 하신 그 하나님, 그리고 그분을 그분 되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참 하나님이라고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할 때 우리 조상의 하나님 그렇게 말한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런 뜻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아무리 그 땅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다.

세 번째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이것은 롯을 통해서 볼 때 적당하게 섞여서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롯은 아브라함과 지역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완전히 세계가 달랐다.

하나님은 구별되신 분이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된다 이런 뜻이다. 하나님은 구별되신 분이시다. 어떤 것과도 구별되신다. 모든 것과 다 구별되신다. 특별히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니까. 자기로 말미암지 않는 모든 것과 구별되신 분이시다. 그분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시는 분이시다. 콩을 거두면 콩을 거두시는 분이시지 콩을 뿌리고 아무 것이나 다 거두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지으실 때도 사람을 지으시고 자기를 표현하기를 원하셨으면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완전하게 자기로 말미암은 것 이외는 어떤 것이라도 다 구별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좋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왜 구별하시는가? 이것이 생명의 문제다. 생명을 보면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그 생명에서 나온 것만 그 생명에 관계되지 그 생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생명에 관계되지 않는다. 개는 개의 새끼를 낳게 되고 소는 소의 새끼를 낳게 된다. 이것은 아주 엄격하고도 정확하게 구별되는 것이니까 절대로 섞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섞일 수 없는 것은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에 섞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분이 만드신 것, 그분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은 그분의 생명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그 안에 섞일 수 없고 어느 것도 그 안에 참여할 수가 없다.

롯은 세상을 사랑함으로 함께 하지 못했는데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구별되신 하나님이시다. 자기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신 분이시라는 것을 보게 된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왜 이렇게 갈라져야 되는 것인가? 다 가지 못하고 왜 갈라져야 되는 것인가? 그것은 참이신 하나님의 한 인격을 목표로 해서 가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것은 거기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요즈음 종교에서 기사와 이적 같은 것을 많이 주장하는데 기사와 이적을 목표로 한다면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상관이 없다. 또 재물을 사랑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데 가보면 여러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재물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해도 역시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면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고서는 참 인격이 나타날 수가 없다.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는 데서는 순전한 인격이 나타날 수 없고, 세상을 사랑하는 데서는 깨끗한 인격이 나타날 수 없다. 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어렵게 보이는가? 그것이 어렵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한 인격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날 종교적인 상황을 보면 그것이 한 인격을 목표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많은 것들이 수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천주교 안에는 수많은 종교적인 것들이 다 수용되고 있고 기독교 안에 역시 수많은 종교적인 것들이 다 수용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인격과는 무관하다. 기적과 이사를 행한다 해도 인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죽은 자도 있고 산 자도 있고 그 안에는 모든 것이 혼합되어서 바벨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조직이 아니고 생명이니까 어떤 것도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포함될 수가 없다. 소의 세계에는 다른 것들은 포함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것도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포함되지 못한다.

아브라함에게 최종적으로 말씀할 때 “너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하셨다. 이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뜻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 이것은 그의 출생지다. 이것이 그 사람의 근본인데 그 사람의 근본을 떠나라는 말을 보면 사람은 결국 근본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에서 잘못되어 있다. 근본이 아담이니까, 아담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그런 말이 되게 된다.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고 이런 것들을 결국 종교 안에는 그것이 다 필요한 것들이지만 한 인격을 목표로 하는 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구별되어 가는 길이다.

➀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기 때문에 갈 수 없게 되고

➁나홀은 데라와 함께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갈 수가 없고

➂롯은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땅에 가기는 했어도 한 축복을 누릴 수 없었다.

인격은 참 하나님과의 관계다. 어떤 기적의 하나님과의 관계도 아니고 또 어떤 능력의 하나님과의 관계도 아니고 참 하나님과의 관계다. 참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은 참 인격이 되고 참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참 인격이 될 수 없고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생각할 때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한 동산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람을 지어서 동산에 두었다 한다. 그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말인데 그 영역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에덴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에게서 이것이 화염검으로 가려져서 숨겨지게 되고 그 다음에 아담은 땅을 유리하는 자가 되게 된다. 결국 동산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의 영역이 없다 이런 뜻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와서 처음으로 한 땅을 다시 지정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이다. 숨겨져 있었던, 감추어졌던 한 동산이 회복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한 땅을 허락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땅을 차지하는 역사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팔레스타인과 또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UN도 어찌할 수 없고 아무리 약속을 해도 소용이 없고 협정을 해도 소용이 없다. 어느 순간 터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땅은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명이나 똑 같은 것이니까. 2,000년 동안 그들은 땅을 잃고 전 세계에서 유리하면서 심지어는 600만이 나치 독일에 학살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 땅이라는 것이, 자기 나라라는 것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땅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참 기이하다. 구약 시대나 지금이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한 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우리 대신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땅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땅에 대해서 생사를 걸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은 에덴이 절실히 필요하구나, 사람이 살 수 있는 영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과 가나안의 다른 점은 이 동산은 하나님이 지어서 사람에게 준 땅이었다. 그래서 그냥 들어가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땅 안에도 역시 사탄이 있었다는 것이다. 뱀이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 이것이 점점 확실해져서 가나안은 그냥 하나님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이 점령해야 할 땅이다. 거기는 가나안 7족속이 살고 있는 땅이다. 다른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이다. 함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땅인데 이것은 자기 땅이 아니고 점령해야 하는 그런 땅이었다. 왜 점령했어야 하는가? 사탄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탈환해야 하는 그런 동산이다. 옛날처럼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적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갖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갖는 것이다. 에베소서를 보더라도 마지막에는 전사가 되게 된다. 신부가 되고 그 다음에 전사가 된다. 피조물에서 백성으로, 백성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배필로, 배필에서 군대로 이렇게 발전하는 이유는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에덴의 실패 때문에 결국 전쟁을 해야 한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영역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 그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냥 차지할 수가 없는 일이다. 적이 살고 있는 땅이라면 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때는 그 땅에 전쟁이 없었다. 숫자가 적으니까 전쟁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200만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갈 때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애굽 땅에 들어갈 때는 겨우 70인이었다. 그래서 바로는 그 사람들에게 고센이라는 제일 좋은 땅을 주고 거기 살아라 이렇게 말했는데 이 백성이 점점 많아지니까 결국 이것은 놔두면 안되겠다, 큰일나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서 이스라엘을 학대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미미한 존재일 때는 세상이 다 관대하고 용납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점점 커질 때는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에덴동산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거기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존재였으면 사탄이 유혹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의 위치가 점점 자라면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가 될 것이니까 사탄은 그것을 미리 막기 위해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이고 그를 자기의 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한 인격으로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커지면 커질수록 적과의 대결이 명백해진다.

처음에는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참 적을 모르고 주변의 형제들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고 생각하기 쉽고 다른 것이 적대한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점점 자라갈수록 적은 하나뿐이구나, 사탄만이 유일한 적이구나 그것을 깨달아 가게 된다. 한 인격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는 그 자리에 가서 인격이 아닌 모든 것이 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에서도 아담이 점점 성숙해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을 했다면 그러면 사탄은 거기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거기 복종하기 싫으니까 사람을 유혹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이 땅을 점령하는 일은 한 인격으로만 가능하다. 기사와 이적으로 사탄을 패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 마치 사탄을 이길 것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귀신 나부랭이나 쫓아내는가 모르겠지만 사탄과는 전쟁 할 수 없다. 이 전쟁은 인격의 전쟁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할 때 맨 먼저 한 전쟁이 이 인격의 전쟁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할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렇게 함으로서 전쟁에 승리를 하게 되었다. 이 승리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전파될 수 없었다. 이 승리가 없었으면 그의 나라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서 승리했기 때문에 그의 나라가 전파된 것이니까 오늘 날 교회를 통해서 그의 나라가 전파되려면 이 승리가 먼저 있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자가 우대를 받고 있고 높임을 받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으며 사탄의 세계를 이기겠는가? 돌로 떡을 만들 필요마저도 없는 사탄을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 인간이 그런 능력으로 이기겠냐는 것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이미 가지고 있는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냐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전혀 몸이 부딪힐 필요가 없는 사탄을 거기서 뛰어 내려서 어떻게 이기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사와 이적이나 능력으로 사탄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사탄을 이기는 것은 오직 인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승리니까. 결국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인격이지 기사와 이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는 생각할 때 기사와 이적을 행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신들도 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이신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없다. 어떤 신을 증거 하는 것은 될지 몰라도 바로 그분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한 인격을 목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 한 인격을 목표로 부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만 그 땅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땅을 얻지 못하고 유리하는 자로서 거처가 없이 살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가나안 땅이라는 한 땅을 정하시고 그리로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세상에서 혼합되어 있던 자를 구별해서 오직 그 땅에 거하기에 합당하도록 축복하시고 인도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아브라함만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 사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가 온전하게 인격을 목표로 하는 나라라는 것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그 나라를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오직 이 하나만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음을 인하여 감사 드립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목표가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이 되게 되기를 원하고 그분 한 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