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모압과 암몬 - 저주받은 백성의 씨
<창19:36-38>
36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지난 시간에 부끄러움의 역사, 부끄러운 구원의 싹을 봤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의 시작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것은 쭉 발전해서 결국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 온 손님과 같은 사람이고, 계시록 마지막에서는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제3의 장소, 하나님의 백성은 백성이지만 영광에 참여할 수 없는 그런 부끄러운 백성이 있다는 것으로 말씀했다.
오늘은 저주의 딸이다.
저주는 물론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근친상간의 의한 자손을 낳음으로서 부끄럽고 저주받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있을 수 없는 그런 백성의 근원을 보게 된다.
성경은 모두 씨가 있으면 싹이 나고 싹이 있으면 열매가 맺는 이런 방식으로 계시가 발전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심어진 것이 여러 과정을 거쳐 자라서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에 가면 수확을 거두게 된다. 농사짓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장막이 나온다. 이것은 평범하게 사람이 사는 집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오시고 하나님이 계시는 그런 입장이 되면 성막이 되는 것이다. 솔로몬 시대에는 성막이 되게 되고, 이 성전이 총체적으로 한 인격이 되었을 때 한 사람 안에 성막의 모든 것이 함축되게 되었다. 이가 바로 그리스도고 이 그리스도가 다시 확산되어서 한 집이 되었을 때 이것을 교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교회가 더 성숙해서 온전하게 열매 맺었을 때 새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새 예루살렘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장막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2장의 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모든 것은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씨를 보고 종국을 알 수 있는 그런 것을 위해서 보는 것이다. 싹을 보고 열매를 아는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은 씨를 보고 열매를 안다. 씨를 보고도 열매를 모르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가게에서 사 먹는 사람과 농사짓는 사람이 다른 이유는 가게에서 사 먹는 사람은 그 과일이 어떤 나무에서 열리는지도 모르고 어떤 씨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서울 아이들이 쌀 나무가 있다고 아는 것처럼 그런 것이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은 씨부터 시작해서 열매까지 알고 있다. 그래서 종자를 잘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종자를 잘못 선택하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을에 원하는 소출을 거둘 수 없다. 그래서 종자를 생산하는 산업, 육종 산업이라고 하는데 이 사업은 국가에서 특별히 보호하는 사업이다. 아무나 만들지 못하게 한다. 누에고치를 만들 때 그 씨는 정부에서 보급한다. 개인이 만들어서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종자가 잘못되면 잠사업이 다 망하기 때문에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씨는 그렇게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서 씨를 보고 열매를 아는 사람은 좋은 씨를 택해 갈 수 있지만 씨를 모르는 사람들은 가을에 열매 맺을 때 가서야 왜 이랬는가? 나는 이럴 줄 몰랐는데 이런 식이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씨를 보고 이것이 어떤 열매를 맺겠구나 안다. 어떤 일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일을 시작하면서 이 일이 결과가 어디로 가겠구나 그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것을 전혀 모르고 마지막에 가서 나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이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뜻밖이다 하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뜻밖이 아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그런 일은 없다. 내가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이다. 심을 때 무엇을 심었는지를 모르니까 마지막에 가서야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씨를 보는 것은 중요하다. 성경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모든 것이 씨로 시작해서 열매로 간다는 것을 보게 된다.
롯의 가족을 보면 세 부류로 나눠지는데
한 사람은 인도자고, 또 한 사람은 돕는 자고, 또 한 사람은 가족이다.
첫 번째로 인도자는 롯이다. 그런데 이 인도자는 혼미한 인도자였다. 명백하지 않고 흑백이 갈라지지 않은, 하나님과 사탄이 갈라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이 갈라지지 않은 혼미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인도자가 되면 결국 따르는 사람들이 다 어둠에 빠지게 된다.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도자는 눈이 밝아야 되는데 밝지 못하고 어두우면 뒤에 따르는 사람들이 다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선두주자가 앞에 있다. 그리고 그 선두주자가 늘 바뀌면서 간다. 아마 피곤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제일 앞에서 앞을 관찰하면서 인도하게 되는데 계속하면 눈이 피곤해서 그런지 가면서 대열을 바꾸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도자는 아주 중요하다. 교회에서도 인도자가 제일 중요하다. 모든 것은 인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돕는 사람인데 이것은 롯의 처다. 롯의 아내는 배필이니까 롯을 도와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소금 기둥이 된 사람이니까 합당하지 못한 돕는 자를 만나게 되면 인도자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제 구실을 다 발휘할 수 없다. 성경에서 보면 롯의 아내는 분명히 세상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다. 유황불이 떨어진다는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했다. 왜 뒤를 돌아 봤겠는가? 세상이 좋으니까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세 번째는 가족이 있다. 두 딸이 나오기는 나왔는데 자기의 생각에 좋을대로 하는 사람들이다. 인도자의 뜻에 따르는 것도 아니고 돕는 자도 아니고 자기 생각의 좋을대로 하는 자다. 결국은 불의한 무리가 되고 말았다.
롯의 집은 전체적인, 총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집안이다.
누구 하나라도 깨어 있는 사람이 없고 다 흐리멍텅하고, 세상에 빠져 있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이런 사람들로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다.
돕는 사람, 인도자, 따르는 사람, 모두가 중요하다.
한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는 돕는 사람이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하갈이고 하나는 사라다. 하갈은 육신 안에서 돕는 자였다. 아들을 낳았으니까 돕는 자는 돕는 자인데 단지 육신적인 아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이스마엘을 낳은 자이다. 그리고 사라는 생명 안에서 돕는 자이다. 그래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라로부터 낳은 자라야 네 씨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적절한 돕는 자를 통해서만 이삭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합당한 돕는 자를 통해서만 이삭이 나오지 아무나 돕는다고 해서 이삭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가족과 롯의 가족을 비교하게 되는데 이 두 가족은 원래는 하나였다. 아브라함이나 롯이나 한 피에서 나온 사람들이니까 원래 하나다. 그런데 생업적인 이유로 서로 다투다 보니까 갈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유익 때문에 사람이 분열된다는 것이다. 자기 유익을 구하다가 보면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하나였지만 롯은 떠나게 되었다.
소돔 땅을 보니까 물댄 동산 같았고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소돔은 죄악이 관영하였더라 했다. 육신적인 모든 것은 다 좋은데 그곳은 죄악이 관영한 곳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 문제다. 육신적으로 좋은 것을 택할 것인가? 죄악이 관영한 곳을 택할 것인가? 이런 문제다.
롯은 죄악이 관영하든지 말든지 육신적으로 풍요롭고 좋은 땅을 선택했다. 그 결과로 헤브론을 떠나게 된 것이다. 헤브론에는 연합이 있다. 헤브론이라는 이름 자체가 연합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롯을 불러서 최종적으로 연합의 장소인 헤브론에 거하게 했다. 아브라함도 거기 거하고 이삭과 야곱도 삼대에 걸쳐서 헤브론에 묻히게 되었다.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는 삼대가 묻혀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마지막 도착할 종착지가 어딘가? 그것은 헤브론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했는가? 지금처럼 천당에 간다거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열조에게로 돌아간다 이렇게 생각했다. 다윗이 죽어서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모세가 죽어서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전부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했는데 열조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헤브론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최종적으로는 헤브론으로 가는 것이다. 연합이 있는 곳으로, 하나 되는 곳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곳으로 간다.
롯은 헤브론을 떠나게 되었다. 결국 합당한 입장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통이라는 합당한 입장을 떠나게 되고 살기 위해서, 우리말로 하면 생업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교통을 버리고 형제를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헤브론을 떠날 때 롯은 인도자를 잃게 되었다. 자기 삼촌 아브라함은 롯의 인도자였다.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오는 동안에 롯은 아브라함의 인도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곁을 떠났으니까 결국 인도자의 곁을 떠난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떠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도자를 떠나게 되면 자기가 독불장군이 되어서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게 마련이다. 머리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머리가 없으면 방향을 잃어버린다.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머리가 되려고 해서 그렇다. 참 머리이신 하나님을 거절하면 결국 자기가 머리가 되는데 우리는 머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머리지 사람이 머리가 아니니까 이 사람의 인생은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게 된다.
지렁이는 머리가 잘라지고 나서도 꿈틀거리기는 꿈틀거린다. 그런데 방향 없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나온 인생은 결국 갈팡질팡하다가 죽는다. 머리가 없으니까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어떻게 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거기서 최선을 찾는다, 옳은 것을 찾는다, 정의를 찾는다, 이런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찾는다고 하더라도 머리가 없는데 무엇을 찾겠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를 아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잘 사냐 못 사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머리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머리가 어떤 머린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머리가 뱀이면 몸도 뱀이 되는 것이고, 머리가 소면 몸도 소가 되는 것이니까 롯의 결정적인 실패의 원인은 헤브론을 떠나면서 인도자를 잃었다는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 밑에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자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는 자기 혼자 가다가 보니까 소돔으로 흘러 들어갔다.
정죄 받을 장소를 흘러 들어간 것이다. 합당치 못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 사람은 결국 물결을 따라 흘러 들어가게 된다. 머리가 없어서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결국 물결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세상은 유행을 따라서 흘러간다. 시대를 따라서 계속 흘러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흘러가는 것이다.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낫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로 가는 것이다. 가다가 또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계속 흘러 들어가는데 이렇게 흘러 들어가면서도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문명이 발전하고 경제력이 부강해진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 것인가 그것밖에 없다. 주말이 돌아오면 놀 일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목적도 방향도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없으니까. 인생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바로 머리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깃점이 없으니까 여기가 몇 m가 되는지 얼마만큼 더 가야 되는지 이런 것을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시작이 있어야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소알에 갔다. 너무 멀어서 못 가겠습니다, 가까운 소알 땅에 거하게 해 주십시오 했다. 이것은 오늘 많은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같다. 모두 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절에 다니는 사람도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도 소원 성취하기 위해서 전부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롯이 가지고 있던 입장과 꼭 같은 입장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일년내내 거의 전 교인이 다 새벽기도에 참석한다고 해서 참 기특하다, 어떻게 새벽 기도에 다 나오느냐 물었더니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를 시킨다고 한다. 소원을 두고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일주일 동안 기도하게 하고 그것이 성공하면 한 달 동안 하게하고 그리고 그것을 하고 나면 3개월, 백일동안 하게하고 이런 식으로 하다가 보면 일년 내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소원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자기 소원을 위해서 새벽마다 잠 안자고 기도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는가? 갓 바위 부처님은 돌멩이니까 아무리 자기에게 와서 소원 성취를 빌어도 속이 안 상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속이 상하겠냐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몰아쳐 가고 있다. 인도자들이 사람들을 그렇게 이끌어가고 있다.
롯은 결국 소알 땅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나와서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동굴에 들어가 살았다. 그러니까 자기의 소원 성취를 목적으로 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침내는 하나님이 그 소원을 이루어줘도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동굴로 다시 옮겼다. 소알 땅에만 머물렀더라도 이렇게까지 큰 사건이 안 일어났을지 모른다. 옆에 사람들이 모두 있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나와서 외딴 곳 동굴에 두 딸과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헤브론을 떠나고 정죄의 상황 안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선택을 가지고 간구해서 소알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결국 그 본성이 다시 나와서 동굴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굴 속에 따로 떨어져 살았다. 짐승들 세계에서도 따로 떨어지면 죽는다. 호랑이가 양을 사냥하는 것을 봐도 무리 속에 들어가서 갑자기 잡아내지는 못 한다. 흩어서 따로 떨어진 놈을 잡아먹는다.
사람이 연합을 떠나서, 사람들을 떠나서 자기 혼자 거하게 되면 결국 사탄의 밥이 될 수밖에는 없다. 내가 비록 연약하다 할지라도 옆의 사람과 같이 있으면 먹혀 들어가지 않게 되는데 나 혼자 떨어져 있다가 보면 내 생각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믿는 사람들이 분열한다. 교회가 왜 모두 분열하는가? 왜 교파가 모두 갈라지는가? 이것들은 모두 이와 비슷한 이유로 분열하게 된다. 자기 생각 때문에 분열한다. 명분이야 교리 때문이고 제도 때문이라 하지만 알고 보면 사실은 다 자기 생각의 옳을 대로 살려고 하다가 보니까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혼미한 인도자는 포도주에 취해 있었다 한다. 그래서 눕고 일어남을 알지 못했다 그랬다. 이것이 혼미한 인도자의 상황이다. 술에 취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다. 자기 통제력을 잃게 되고 그래서 앉고 서는 것을 모른다. 딸들이 자기를 상관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혼미한 상태니까. 인도자는 맑아야 되는데 맑지 못하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은 혼미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 소돔에 들어갔을 때 롯은 자기 아내가 세상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말리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은근히 동조하면서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잘 된다는 것만 생각하면 같이 동조하게 된다. 아마 롯의 처는 재산을 모으는데 아주 능력이 있었다든지 이럴 수가 있다. 그래서 롯은 재산 모으는 재미로 은근히 그것을 기다리고 조장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참 많이 있다. 그러니까 자연히 합당한 돕는 자가 될 수가 없다.
임금이 온전하지 못하면 신하도 온전할 수 없다. 임금의 생각이 그릇되어 있으면 신하들의 생각이 온전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인도자가 혼미하기 때문에 돕는 자 역시 마찬가지로 더 혼미할 수밖에 없고 세상으로 점점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고 결국 남편까지 끌고 들어가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합당한 돕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 롯의 실패의 원인이었다. 결국 있었던 것은 그마저도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도 없다가 보니까 혼자 있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남편은 아내가 있어야 한 짝이 되어서 하나가 되게 되는데 남편에게 아내가 없다가 보니까 결국은 이런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아내가 있었으면 이런 일은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돕는 배필이 없다가 보니까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롯으로 하여금 도덕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집에 천사들이 들어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와서 내어놓아라 소리를 지르니까 자기의 두 딸을 내어주면서 너희가 이 딸과 상관을 하고 손님들에게는 하지 말아라 이렇게까지 말했다. 이것은 벌써 소돔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남색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다. 요즘 같으면 호모라고 하는 그런 것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롯은 그런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둔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문화에 오래 젖어 있으면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게 된다.
딸들을 보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손을 가지려고 했다. 길을 무시하고 목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방법을 무시하고 결과만 생각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 이런 생각이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좋은 목표를 달성하려면 방법도 좋은 방법이어야 한다. 옳은 것을 표현하려면 방법도 옳은 방법이어야 한다. 가령 도둑질을 해서 하나님께 헌금한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방법이 나쁜데 좋은 곳에 쓸 수 없다.
길을 무시한 목표는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되고 방법을 무시한 결과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결과만 좋으면 된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정당한 길에서 정당한 것이 나온다. 옳은 길에서 옳은 것이 나오지 잘못된 길에서 옳은 것이 나올 수는 절대로 없다. 콩을 심어 놓았는데 팥이 나온다든지 팥을 심어 놓았는데 콩이 나온다든지 이런 일은 절대로 없다. 사람은 잘못 되어도 세상의 이치는 이치대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절대로 콩 심은 데서 팥이 나는 법은 없다. 잘못했는데 잘 되었다 이런 일은 없다. 공부를 안 했는데 성적이 좋았다 이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길을 무시하고 목표만을 중시하는 이것이 문제를 가져왔다. 오늘날 교회에서 문제되는 것도 그것이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교회를 확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세상 방법을 도입한다. 남에게 질세라 세상 방법을 도입하고 있다. 얼른 보면 일이 아주 잘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일이 잘 되는 줄 알지만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손상시키고 만다. 방법이 잘못되기 때문에 인격에 손상이 온다.
복음의 목표는 한 인격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확장한다는 것은 마치 롯의 두 딸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손을 가지려고 아버지를 상관한 것과 같은 이치다. 종자는 많이 퍼졌다. 모압과 암몬이라는 많은 종자가 퍼졌지만 그것은 저주받은 민족이 되고 말았다. 근친 상간에 의한 자손을 가지게 되었다. 모압이라는 말은 아비에게서라는 말이다. 아들을 낳아 가지고 이름을 짓기를 모압이라고 했다. 아비에게서 낳았다. 암몬이라는 말은 벤암미라는 말인데 이것은 친족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것 자체가 이미 근친상간을 의미하고 있는 이름이다.
본성만을 추구하는 교회, 본성만을 추구하는 교파, 본성만을 추구하는 복음 전파, 이런 것들이 모두 이런 원리를 가지고 있다. 목적만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런 것이 되고 만다.
민수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했다고 되어 있다. 모압은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백성을 초청했다. 그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는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지만 이방 사람들은 아주 음란한 춤을 추면서 제사를 드렸다. 그런 제사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해서 음행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압 사람들이 발람을 매수해서 하나님 백성을 저주했던 사건이 민수기 22장에 나온다. 또 발람은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뜨리려고 모압 족속과 의논했다 하는 말이 민수기 31장에 나온다. 모압 족속의 후손들이 결국은 다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민수기 25장에서 모세에게 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백성의 두령을 잡아 태양을 향해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떠날 것이다. 백성의 두령들이 앞장서서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을 잡아 죽이라 이렇게 했고 너희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 모압과 암몬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지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10대 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신명기 23장에는 그렇게 경고를 주고 있다.
창세기에서 세 가지 출생을 보게 되는데 이스마엘의 출생, 모압과 암몬의 출생, 이삭의 출생을 보게 된다. 이스마엘은 육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아들을 의미하고 모압과 암몬은 근친상간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삭은 순전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만 낳은 아들을 의미한다. 결국 이삭만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른 것은 다 제거되었다.
이삭은 길을 따르고, 방법을 따르고, 과정을 따르고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에 쓰여지게 되는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멀리까지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여기서 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라는 여자는 그의 절대적인 갈망 때문에 결국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결국은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되었다. 절대적인 갈망을 가진 한 여자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스러운 족보 안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갈망을 가진 자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모압과 암몬의 교훈, 이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성취하겠다는 사람들에게 큰 경고를 주게 되는 것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아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방법과, 온전한 길을 통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될 때까지 아들을 못 낳아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고 꼭 이삭으로 낳은 자라야만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을 성취하겠다고 하는 세상의 방법이 오늘 교회에 들어오면서 교회들이 얼마나 부패하게 되고 곁길로 가고 죄악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모압과 암몬의 결과를 보면서 이 경고를 받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라도 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