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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의미

신흥무관학교에 관하여

작성자신동현|작성시간09.07.21|조회수290 목록 댓글 0
머리말
이번 발행하는 독립 운동사 자료집 제10집은 ≪독립군 전투사 자료집≫으로 편찬한 것이 다.
구한말 이래 국내에서 의병을 주축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벌인 무력 투쟁은 경술국치 이후 그 무대를 만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료집은 당시의 기록으로 원병상(元秉常)의 수기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북로군정서의 막료 이정(李楨)의 진중일지(陳中日誌), ≪독립신문≫과 ≪진단(震檀)≫의 발췌집, 그리고 광복군 총사령부 창립과 한·중 양국 사이에 내왕한 서한집을 비롯하여 적측의 기록인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 일본 외무성 문서인 간도 출병 전말, 천락 각서(天樂覺書) 등, 독립군 전투사 연구에 참고될 수 있는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측의 기록은 객관성이 미흡할 뿐 아니라 민족의 주체성도 결여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단편적이요 추상적인 보고서나 흔히 떠돌아 다니는 미확인 정보자료 따위에 비하면 그런대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우리는 이러한 저희들의 기록을 통해서 저희들의 허물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항일 독립 운동의 요람지였던 추가가(鄒家街)에서 한국인 독립 투사들이 신흥 강습소를 세워 무관학교로 승격시키고 10년간 3천 5백여 명의 무관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혹은 일본 주구배를 사살하고, 혹은 각종 전투에서 분골 쇄신한 주역들을 배출시킨 그 일대기이다. 이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었던 원병상(元秉常)의 수기인바 창설기·전성기·확장기·폐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2) 진중일지(陣中日誌)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막료 이정(李楨)의 일기이다. 청산리 전투 직전의 북로군정서의 제반 상황을 차분히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가 1920년 9월 13일자로 끝나고 있음을 볼 때, 군정서 부대가 청산리 전투 직전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청산리 방면으로 이동한 날짜가 이 무렵이 아닐까 하는 점을 들 수 있겠다.
(3) ≪독립신문≫·≪진단(震檀≫ 발췌집
이 자료는 1920넌 중국에서 간행된 신문과 잡지로서 청산리 전투 및 기타전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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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을 고무 찬양함과 동시에 항일 전투 의식을 고취시킨 기사들을 발췌한 것이다.
(4) 광복군 총사령부 창립과 한·중 양국의 활동
이 자료는 한국임시정부 및 광복군 총사령부와 중국 정부와의 사이에 오고간 서한 내왕집이다. 기병학교 건립, 낙양(洛陽) 군관학교 한국인 훈련반 개설, 한·중 항일 연합 전선 문제, 임정 군사 진행 계획, 광복군 총사령부 창립, 광복군 각 지대의 활동 등 다방면에 걸친 의사 교환과 요청 및 협조에 대한 내용들로 되어 있어 당시의 한·중 우호와 협조상을 잘 엿볼 수 있다.
(5) 만주·시베리아 등지의 독립군 군사 상황
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이며, 만주 일대와 시베리아 등지의 한국인 독립군 군사 상황 즉 병기·용사 징모·훈련·식량 보급·단체 정황 등을 입수하여 보고한 정보 문서이다.
(6) 천락 각서(天樂覺書)
3·1 독립 운동이 터진 1919년, 간도를 중심으로 벌였던 한국인 독립 투쟁을 탄압 말살하는 작업에 진두 지휘를 맡았던 일본의 한 낭인(浪人)의 수기이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 끔찍스럽고도 무지막지한 것으로 천인 공노할 사실들이다. 즉 조선총독부의 자금을 받아 인간 살인마 만이 자행할 수밖에 없는 무기 등을 구입하여 일본군과 내통하고 마적단과 결탁하여 한국인 마을과 학교를 소각하고 독개스로 집단 참살시킨 사실 등을 반 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에서야 알게 되는 경악적인 기록이다. 이 자료는 해방 당시 미군이 압수해 갔다가 워싱턴에 있는 [미국가 공문서 보관소](내셔널 아카이브)에 보관시킨 것으로 독립 운동사 편찬 위원회가 요청하여 1백여 점의 자료와 함께 온 것이다. 여러 모로 소중한 자료인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군 참모부 기밀 문서·조선총독부 보존 문서·일본외무성 보존 문서·독립군 관계 재판 기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이 자료를 수집한 분과 번역한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1975년 10월 일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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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원병상(元秉常) 수기

이 글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었던 원병상(元秉常) 씨의 수기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창설로부터 폐교될 때까지의 내용으로, 창설기·전성기·확장기·폐교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10 년간 3천 5백 명이라는 무관을 양성 배출시킴과 동시에 이들이 청산리 전투의 승리 및 기타 독립군 전투에서의 대부분의 공로자들이 역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라는 것 등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편집자 주)
머리말
돌이켜 보건대 신흥무관학교가 창립된 지 60년이 흘렀다. 그 눈물의 시대를 겪은 처참한 동포나 선배와 동지들도 이제는 불귀의 고혼이 되지 않았으면 모두 거의 고령일 것이며, 그리 많지도 않을 것 같다.
국권을 회복하려고 우국지사들이 구국구민의 대업을 위해 천장단애의 험난과 형극을 헤치며 독립군 중견 간부 양성이라는 신성한 목표 아래 설립한 무관학교가 광복된 조국 땅에서 과소 평가, 냉소의 대상이 된다면 이것은 정의가 땅에 떨어짐을 말해 주는 증좌라 하겠다.
이 현실은 조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통석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통일이라는 벅찬 사명 아래, 민족 중흥의 근대화 정초 작업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 정기의 정신 요소가 집약된 기초 위에, 겨레의 영원 무궁한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명실 상부한 근대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이 때 지난날 신흥무관학교 정신이 새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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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단계 창설기
1. 독립 운동의 요람지인 추가가(鄒家街)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梁起鐸) 선생 댁에서는 안창호·이동녕(李東寧) 선생 이하 구국 운동의 선구자들로 조직된 비밀 결사인 신민회의 간부회의를 열고, 해외 독립 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치의 건을 의결하였다.
그리하여, 황해도 인 최명식(崔明植) 외 수인을 급파함으로써 현지를 답사해 본 뒤에 가장 적당하다고 인증되는 땅이 있다는 보고에 의하여 각 지방 대표에 비밀 통보가 전달되자, 각지의 우국 투사들은 조국의 조종이 되는 산인 저 백두산 서북으로 뻗어 나간 요동 반도를 향한, 여기서 조국의 광명을 찾으려고 실천에 옮기기 위한 제1착이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호영(李浩榮) 형제와 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주진수(朱鎭洙)·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이었다. 조국 광복의 큰 뜻을 품고 가권을 인솔하여 망명의 길을 떠나 구강(舊疆)에 찾아 들어갔으나 망국노(亡國奴)란 푸대접에 의지할 곳 없는 고아처림 내일을 알 수 없고, 또한 앞길이 막연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신념에서 구국의 첫 본거지로서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三源堡) 서쪽 추가가(鄒家街)란 지방에 우선 정착하였다. 이 독립기지를 정하는 데에는 이회영 선생이 장유순 동지 등을 대동하고 종이 장사로 변장하고 천신만고하여 추가가를 물색 정착하게 하였으나 토민의 비협조 배타가 심하여 중국의 고위층을 북경으로 찾아가서 만주 지방관에게 소개를 받고 봉천 당국의 명령과도 같은 지령을 토관(土官)에게 전달하게 하는 등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다.
이 곳 추가가 서편에는 남산(藍山)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북편에는 왕클령이라는 험한 준령이 가로 막혔으며 동남방에는 삼원보(三源堡)라는 조그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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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앞에는 유하현에서 통화현으로 통한 간선 통로가 놓여 있는 미개척된 산골짜기였다.
2. 신흥 강습소를 설립
슬프다. “창천이여 이 겨레를 살펴 보소서.” 하며 비분 강개, 절치 부심하는 동지들이 운집한 뒤에 분연히 궐기하여 국권 회복을 단연 맹세하면서 기약없는 망망한 피안(彼岸)인 광복이란 벅찬 희망을 안고, 1911년 봄에 이역 황야의 신산한 곁방살이에서나마 구국 사업으로 일면 생취(生聚), 일면 교육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내걸고 출발하였다. 생취(生聚)로는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하여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기관으로서 초대 사장에 이철영이 추대되고, 교육으로는 학술을 연마하여 군사 훈련을 주목표로 조국 광복에 중견 간부의 역군이 될 인재 양성을 하기 위해 ‘신흥강습소’가 창설됨으로써 초대 교장에 이동녕, 교감에 김달(金達), 학감에 윤기섭(尹琦燮) 교관에 김창환(金昌煥), 교사에 이갑수(李甲洙)·이규룡(李圭龍)·김순칠(金舜七)등이었고, 제3대 교장에 이광(李光)도 잠시 재임하였다. 이것이 곧 서간도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3. 토인 옥수수 창고 빌려 개교식
초기에 이 지방 토착민들은 신흥강습소가 왜인의 앞잡이라는 의혹으로 배척이 심하여 그들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사를 구할 수 없어 토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식을 거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하여 학교 명칭도 평범하게 강습소라고 붙였으나, 근본 목표가 구국 혁명 인지라 기실 내용적으로는 무관 양성을 시작하는 제1보의 출발이었다.
학교 이름 ‘신흥(新興)’이란 유래는 신민회(新民會)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 투쟁이라는 의미를 살려 ‘흥(興)’자를 붙인 것이다.
특히, 신민회를 강조한 것은 해외 독립 기지 설치와 무관학교 창설안이 신민회에서 나온 관계를 의미한 것이며, 기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해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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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적인 연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초대 교장으로도 신민회의 임원이던 이 동녕이 취임하였다.
이 해 1911년 겨울 필자(원병상)가 17세의 홍안 소년으로 통화현에서 북쪽으로 1백 50여리 거리의 눈길을 헤치며 밀림이 하늘에 닿는 듯한 신개령(新開嶺)을 넘어 추가가(鄒家街) 우탕구란 곳에 우거하는 교장 이동녕 선생을 찾아가 강습소 입학을 지원했을 때, 선생은 반가이 맞아 주시면서 진학의 시급을 강조하고, 아울러 따뜻한 지도로 격려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 추가가는 관민간 대부분이 추씨네가 많이 살고 있어 그 지명을 추가가라고 불린다는 것이며 역시 그 지방 권력가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당면 필요하고 타개하여야 할 애로는 반드시 이 지방 유력한 추씨를 상대로 교섭하여 직접·간접 협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해 12월에는 제1회 특기생으로 김연(金鍊)·변영태(卞榮泰)·성준식(成駿寔) 등의 유수한 애국 청년 40여 명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 해의 이주 동포들의 시련은 너무도 가혹하였다. 하늘도 무심하게, 고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지난 겨울의 폭한이 던저 준 소위 수토병(水土病)이란 괴질이 이역의 개척 문턱에 접어든 우리에게 가공 가경할 상처를 남긴 외에도, 임자(壬子年 : 1912年)·계축(癸丑年 ; 1913年) 양년은 가뭄과 서리의 천재까지 겹쳐 동포들의 사활 문제인 농사의 치명적 실패는 학교 운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어 주로 이석영(李石榮) 선생의 사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2년 가을, 서간도로 탈출해 나오는 동포의 수가 나날이 늘어가자 경학사(耕學社)는 발전적 해체가 되고 다시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어 초대 단장에는 허혁(許䓇)이 추대(2대는 李相龍)되었다. 그리고, 교포들의 안녕 질서를 위한 자치 단체로서 교육의 쇄신과 행정 기구를 다시 정비하려는 중앙 기관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거리에 떨어진 영춘원(永春源)을 거쳐서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옮기는 동시에 신흥 강습소도 이곳으로 이전 하였다.
 
제2단계 전성기
1. 신흥의 제2 기지 합니하(哈泥河)
이 곳은 동남쪽에는 태산 준령인 고뢰자(古磊子)가 하늘을 찌를 듯 일왕(一徃) 30 리 거리로 우뚝 솟아 있고 북쪽에는 청구자(靑溝子)의 심산 유곡이며 남서쪽에는 요가구(鬧家溝)의 장산 밀림이 둘러싸인 그 사위의 준험은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라 할 수 있는, 신비경 같은 이 지역에 파저강(波潴江) 상류인 일위대수(一葦帶水) 합니하 강물이 압록강을 향해 흐르고 있어 생도들에게 유진무퇴(有進無退)의 자연 교훈이 갖추어진 이 강 북쪽 언던 위에, 신축한 고량대하(高樑大厦)의 병영사가 마련되어 각 학년별로 넓직한 강당과 교무실이 생겼다. 아울러 부설된 내무반 내부에는 사무실 편집실·숙직실·나팔실(喇叭室) 식당 취사장·비품실 등이 구별되어 있고 낭하에는 생도들 성명이 부착된 총가(銃架)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1913년 봄에 학교가 이전된 뒤 황림 초원에 수만 평의 연병장과 수십 간의 내무실 내부 공사는 전부 생도들 손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삽과 괭이로 고원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내왕 20 리나 되는 좁은 산길 요가구 험한 산턱 돌산을 파 뒤져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하는 중노역이었지만, 우리는 힘드는 줄도 몰랐고 오히려 원기 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히며 진행 시켰다.
이 교사 건축 공사에는 전기 이석영 선생의 재력과 생도들의 총력적인 노력 봉사가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교사 앞 45도로 기울어진 경사 언덕 아래 인접되어 있는 이석영 선생댁에서는 고국에서 단신 탈주해 나오는 돈 없는 생도들에게 다년간 침식 제공도 아끼지 않았고 학교 유지에도 정신적, 물질적으로 그 뜻이 지극히 크고 높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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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당시, 이 곳 드넓은 황야에는 하루 종일 걸어도 백의 민족을 만나 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불과 수년 안에 어느 산마루, 산골짜기에도 우리 교포들의 발자취가 안 간 곳이 없었고 울창한 밀림 속에도 오두막, 움집들이 들어서지 않은 곳이 없게 되자, 이것을 본 토민들은 상부의 지시라는 구실 아래 물물 상통을 거부하면서 우리를 축출한다고 위협했고, 더우기 청장년의 학교 교육은 오해의 대상이 되있다.
그리하여, 부민단(扶民團)에서는 애국 기관 및 각 단체와 회의를 열고 연장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나의 동포 잃었으니 이웃 동포 내 동포요.”
“나의 형제 잃었으니 이웃 형제 내 형제라.”
이러한 억지 표어를 내 걸고 대의(大義)를 위하여 일치 단결하였다. 그리고, 의복·모자·신발 등을 그들과 똑같이 일체 변장함으로써 상호 친교 운동을 적극 추진해 왔다. 그 성과가 매우 좋아서 배척의 선풍으로 긴장했던 교포들의 불안은 점차 줄어 들었다.
여기 한 가지 특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 토착민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숭모와 염원이었다. 우리 동포를 그처럼 배척하면서도 그들은 안 의사의 의거 이야기만 나오면 저 말단 농민들까지도 고개를 숙이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선열의 뿌린 피가 이 민족의 가슴에까지 생생하게 살아 남은 것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2. 무관학교 승격과 교사 낙성식
이 해 1913년 5월에는 그동안 우리가 열망하던 교사 낙성식이 있었다. 그리고, ‘신흥 강습소’란 이름도 ‘신흥무관학교’로 승격하였으니, 이는 우리 겨레의 일대 경사였고 독립 운동 사업의 일보 전진이었다. 이로부터 통화현 합니하는 우리 독립군 무관 양성의 대본영이 되고 구국 혁명의 책원지로서의 새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학교를 상기하니 그 앞에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은 잊을 수가 없다. 그 강가에는 언제나 조그마한 배 한 척이 매일 바쁜 걸음치는 생도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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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결을 들려 주기도 해왔다. 밤이면 학교 둔덕 앞에는 일련의 고기잡이 불이 순식간에 불야성을 이루고 강물 위에는 뗏목들이 계속하여 강을 덮어 떠내려가고 있었다. 큰 뗏목 위에는 조그마한 움집이 있어 아침 저녁 밥짓는 연기와 함께 고국의 압록강을 향해 내려가는 그 뗏목이 유난히도 인상적이었다.
3. 신흥학우단 조직
교사 낙성 후부터 신흥무관학교는 4년제 본과에다 6개월, 3개월의 속성반을 병설하고, 속속 이 곳을 찾아 드는 젊은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한 대량 교육을 시작했다. 그리고, 졸업한 뒤 2개년간은 교명에 따라 의무적으로 복무한다는 규정도 만들었다.
내가 지난해 2월에 추가가에서 이동녕 선생의 지도로 동흥(東興)학교 최종 학년에서 1년간 차기 진학 준비를 마치고 이 해 2월에는 합니하(哈泥河) 무관학교 본과 3기생으로 입학한 뒤 3개년간 전교 생도반장 복무와 아울러 만 4년 만에 졸업하였다.
1913년 3월 우리는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였다. 교장 여준(呂準), 교감 윤기섭 (尹琦燮) 양 선생 이하 제1회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의 발기로 조직된 이 학우단은 무관학교의 교직원과 졸업생이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는 일종의 동창회 성격을 띤 단체로서 처음에는 명칭을 ‘다물단(多勿團)’이라고 하였다가 그 뒤 부르기 쉽게 ‘학우단(學友團)’이라고 개칭하였다. 그리하여, 이 학우단은 당시 혁명 청년의 강력한 결사인 서간도 독립 운동의 핵심체로 성장하였다.
신흥학우단의 목적과 강령은 다음과 같다.
[목적]
혁명 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 일각까지 투쟁한다.
[강령]
(1) ‘다물’의 원동력인 모교의 정신을 후인에게 전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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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겨레의 활력소인 모교의 전통을 올바르게 자손 만대에 살린다.
(3) 선열 단우의 최후 유촉을 정중히 받들어 힘써 실행한다.
선열의 시범
(1)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몸을 바쳤노라.
(2)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를 잊었노라.
(4) 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5) 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키라.
[중요 사업]
학우단은 본부를 삼원보(三源堡) 대화사(大花斜)에 두고 단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1) 군사 학술을 연구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2) 각종 간행물을 통하여 혁명 이념의 선전과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3) 민중의 자위체를 조직하여 적구 침입을 방지하고,
(4) 노동 강습소를 개설하여 농촌 청년에게 초보적 군사 훈련과 계몽 교육을 실시하고,
(5) 농촌에는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 교육을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초대 부서]
초대 단장 김석(金石)
총무부장 이근호(李根澔)
편집부장 강일수(姜一秀)
그 외 운동부·조사부·토론부·재정부 이상 6부를 두어 각각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운영해 왔다. 특히, 편집에서는 월간 잡지 단보를 발행하여 혁명 이념의 선전과 학술 연구와 정신 연마를 고취하고 일선 투사들의 투지를 앙양했으며 교포들의 당면에 관한 사항을 실어 당시 유일한 항일 투쟁지가 되었기 때문에 왜적에게는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7월에 발행된 창간호는 군사·시사·문예·농사에 대한 기사를 실어 이역에서 뉴스에 굶주려 오던 교포들에게 간 곳마다 좋은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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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토요일에는 단의 발전을 위해 토론회가 열리며 학술 이론과 투쟁 의식에 대한 웅변도 토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제3대 부서는 다음과 같다.
제3대 단장 이영(李英)
총무부장 원병상(元秉常)
편집부장 장정근(張廷根)
기자 이의직(李義直)
기자 이병찬(李秉瓚)
운동부장 이병세(李炳世)
토론부장 배헌(裵憲)
재정부장 강한년(康翰年)
조사부장 엄주관(嚴柱寬)
이상과 같이 구성된 부서로서 강철같이 단결된 명실이 상부한 운동선에 핵심체로 되었다.
학우단의 단시(團是)는 다음과 같다.
(1) 시베리아 요동 천리
거침없이 편답할 때
야수 마적 다 만나고
만수 장림 설한풍에
갖은 고초 다 겪어도
일편단심 나라 위해
우리 단의 정신일세
(2) 백만 적을 무찌르던
을지 소문 수범대로
포연 탄우 불바다 속
동정 서벌 육탄삼아
구국 대성 하신 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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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절불굴 절개로세
이것 이곳 우리 단시
4. 영내 내무 생활과 군기 엄정
본교의 내무 생활과 훈련은 아래와 같다.
[1913년 당시 재직 교직원의 명단]
교장 여준(呂準)
교감 윤기섭(尹琦燮)
후임교감 이상룡(李相龍)
학감 이광조(李光祖)
후임 이규봉(李圭鳳)
교사 이규봉
교사 서웅(徐雄)
교사 민화국(閔華國)(중국어 교사)
교관 성준용(成駿用)
교관 김흥(金興)
교관 이극(李克) (격검·유술 교관)
생도대장 김창환(金昌煥)
반장 원병상(元秉常)
본인(원병상)은 여기서 3 년간 전교 생도반장으로 복무하면서 겪은 기숙사 생활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새벽 6시에 기상 나팔 소리 ‘또-또-따-’ 잠든 생도들의 귓전을 울리면 각 내무반의 생도들은 일제히 일어나 신변 환경을 정리하고 3 분 이내에 복장을 단정히 하고, 각반 치고 검사장에 뛰어 나가 인원 검사를 받은 다음 보건 체조를 한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체조가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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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 별로 취식 나팔 소리에 따라 식탁에 나가 둘러 앉는다.
주식물이라고는 부유층 토인들이 이삼십 년씩 창고 안에 저장해 두어 자체의 열도에 뜨고 좀먹은 좁쌀이었는데, 솥 뚜껑을 열면 코를 찌르는, 쉰 냄새가 날 뿐 아니라 바람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끈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영양 가치도 전무한 토인들 가축용의 썩은 곡식을 삶은 명색의 밥이었다.
토인들은 매일 격증하는 이주 동포를 상대로 내 버리게 된 양곡을 돈 받고 팔기에 혈안이 되었다. 돈도 없고 식량도 없는 우리들인지라 이거나마 사먹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 당시의 처참한 실정이었다.
부식이라고는 콩기름에 저린 콩장 한 가지뿐이었다. 썩은 좁쌀밥 한 숟가락에 콩장 두어 개를 입에 집어 넣으면 그만이다. 그나마 우리는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었다. 굶지 않는 것만이 다행으로 알면서 교직원이나 생도들은 함께 모여 항상 화기 애애한 가운데 식사 시간을 보냈다.
이 같은 조의조식(粗衣粗食)과 삭풍한설에 보수도 없는 교직원은 단의(單衣) 초모를 쓰고, 생도들은 주린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매일 맹훈련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예도 공명도 없고 불평 불만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희생 정신으로 일사보국의 일념에 불탈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집합 나팔 소리에 조례가 엄숙하게 시작된다. 조례식에는 교직원 전원이 배석하고 점명(點名)을 한다. 그 때 부르던 애국가 제1절은 다음과 같다.
[애국가]
화려 강산 동 반도는
우리 본국이요
품질 좋은 단군 자손
우리 국민일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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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우리들이
길이 보전하세
이상과 같이 애국가 부르는 생도들 앞에 여(呂) 교장은 양쪽 눈에 망국한의 뜨거운 눈물을 방울방울 흘려 이 무관학교의 교훈을 얼룩지웠다.
윤 교감의 교육 지침은 가령 한쪽 눈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를 지적해 말할 때 한쪽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장점을 들어 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분의 진실하고 인자한 성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교장 이하 모든 교직원은 그 일거 일동, 일언 일행이 다만 애국 정열에서 지성·궁행·실천으로 시범해 주던 그 감명은 아직도 모교의 정신에 아로새겨져 있다.
생도들은 젊은 그 시절 앞산 뒷산이 마주 울리도록 우렁차게 아래와 같은 교가를 부르며 조국 광복의 맹세를 거듭 다짐했다.
[교가(校歌)]
(1) 서북으로 흑룡 태원 남의 영절의
여러 만만 헌헌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준-이가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2)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 낙원은
반만 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좀서름 받-느니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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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3)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나라 세-울-이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
교훈의 요지는 우리가 조국을 찾고 겨레를 구출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생도들의 책임이 중차대하니 인격을 연마하고 군사 지식을 배양하여 부과된 사명을 완수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은 항상 눈물로 거듭 강조하였다.
정신 교육에 있어서는 구국의 대의를 생명으로 하는 목표 아래
(1) 불의에 반항 정신
(2) 임무에 희생 정신
(3) 체련에 필승 정신
(4) 간난에 인내 정신
(5) 사물에 염결 정신
(6) 건설에 창의 정신
이상 6항목의 체득 실천을 유일한 좌우명으로 삼아 왔다.
편제는 둔전병(屯田兵) 제도로서 연대(聯隊) 기준이었으나 토인들에게 배척받는 이역인지라, 일체 표면화는 할 수 없었고, 계급도 실용할 수 없었다.
복장은 교직원은 4계절 백색 무명으로 상의에는 단추 다섯 개가 달렸고 하의는 통으로 되었다. 생도들은 지방산의 염색한 ‘다치푸’라는 천을 구입하여 균일한 제복으로 상하의를 만들었고 양식은 교직원과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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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는 학생모였으며 신발은 대개 만주인이 일상 생활에 항상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밤중에 비상 검사가 있을 때는 캄캄한 밤이라도 각반 치고 복장의 단추 한 개까지 낱낱이 검사하는 엄정한 군기에는 규제 일체가 어긋나지 않아야 했고 총가에는 암흑 칠야에도 자기 이름이 붙은 소지총을 찾아 휴대하여야 하는 등 항상 임전 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캄캄한 밤중 연병장 둔덕에서 적막을 깨뜨리며 꿈에 잠겼던 정신을 번쩍 깨워주던 적전 출동 준비를 알리는 비상 나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일직(日直) 근무에 있어서는 주번 근무라고 불렀는데 주번 사령, 주번 반장, 주번 실장, 당번 보초, 나팔수가 반드시 일정한 시간 지정한 위치에서 상하번이 교체할 때는 붉은 빛 바탕에 검은 빛으로 ‘주번표’라고 새긴 완장과 주번 일지 등을 인계하고 5개항으로 된 수칙(守則)을 하번이 송독한 다음 상번은 복창함으로써 확인한 뒤 교대는 끝난다.
처벌 규칙으로써는 네 가지로 구별되어 있어서 군의 풍기를 위반하면 용서없이 경중에 따라 처벌이 엄격했다.
5. 교육 훈련
학과로는 주로 보(步)·기(騎)·포(砲)·공(工)·치(輜)의 각 조전(操典)과 내무령(內務令)·측도학(測圖學)·훈련 교범(訓練敎範)·위수 복무령(衛戍服務令)·육군 징벌령(陸軍懲罰令)·육군 형법 (陸軍刑法)·구급 의료(救急醫療)·총검술(銃劍術)·유술(柔術)·격검(擊劍)·전략(戰略)·전술(戰術)·축성학(築城學)·편제학(編制學) 등에 중점을 두고 가르쳤다.
술과로는 넓은 연병장에 김창환 교관의 명랑 쾌활한 구령 아래 주로 각개교련(各個敎練)과 기초 훈련을 해 왔다.
야외에서는 이 고지 저 고지에서 가상적에게 공격전·방어전·도강·상륙 작전 등 실전 연습을 방불하게 되풀이하면서 이 산 저 산 기슭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던 나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들려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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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으로는 엄동 설한 야간에 파저강(婆猪江) 70리 강행군을 비롯하여 빙상 운동·춘추 대운동·축구·목판·철봉 등 강인 불굴의 신체 단련을 부단히 연마해 왔다.
6. 경제 투쟁과 둔전병 제도
1914년 봄 거듭하는 천재로 인하여 교포들이 피눈물로 지원하던 성금(誠金)은 지속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신흥무관학교는 문을 닫게 되는 궁지에 빠져 그 운영이 막연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학교 자체에서 해결해 보려고 학교 당국은 춘경기에 토인들의 산황지(山荒地)를 빌려 생도들을 동원하여 밭을 일으키었다.
우리는 일과가 끝나면 편대를 지어 각조 별로 산비탈에 달라붙어 콩알 같은 땀을 흘리며 괭이질을 하여야 했다.
이극(李剋) 교관의 함경도 사투리 섞인 산타령에 장단을 맞추며 기고만장으로 억센 풀 뿌리를 파 헤쳐 양전을 만들어 옥수수와 콩, 수수 등을 파종하여 여름내 가꾸고 가을에 거두어 땀이 등에서 줄줄 흐르도록 고된 노력을 하여서 얻은 돈으로 학교 유지비에 일부 보충하기도 하였다.
시탄으로는 1년간 그 소비량도 막대하다. 동절이 오면 살인적 혹한에 시탄을 달리 구입할 방도는 전연 없었다.
다만 생도들 자신이 강설기를 이용하여 학교 건너편 낙천동(樂天洞)이라는 산턱에서 허리까지 차는 적설을 헤치면서 땔 나무감을 끌어 내리고 등으로 그 나무 토막을 져다가 옮겨 매년 월동 준비는 이렇게 하며 생도들 자력으로 해결해 왔다.
노력 봉사로서 하기 방학이 되면 교직원과 졸업생 및 재학생 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각 지방에 흩어져 1개월씩 각자 기술대로 노력 수입을 만들기 위해 산으로 들로 산재한 교포들 집을 찾아 다니면서 6·7월 염천에 산전 수답에서 서투른 솜씨로 구슬땀을 흘리면서 품팔이로 돈을 벌어 보태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애쓰는 학생들을 보기를 민망해 하는 교포들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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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마음으로 몇 날간의 품값은 주겠으니 그만 학교로 돌아가라는 권고도 간절했으나, 이에 응하는 생도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근본 정신이 민폐 없는 노력 수입이기 때문에 염결을 명심하며 따뜻한 동포애도 고사하고 시종 정성껏 땀 흘려 각자 분담된 책임량을 완수해 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국을 위해서는 항일 투쟁이었고 모교를 위해서는 경제 투쟁이었다는 신흥무관학교의 둔전병 제도는 이렇게 실천해 왔다.
7. 졸업생들의 모교 지원 활동
본교 졸업생들은 교칙에 따라 모교가 지도하여 주는 임무에 2년간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그들은 일선 독립군에 참예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 밖에 교포 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 때 교포들은 아침 저녁 근심을 면하지 못하면서도 민족의 내일을 위하여 자녀 교육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신흥무관학교의 졸업 시기가 되면 각 지방 소학교에서는 서로 앞을 다투어 신흥 졸업생을 교원으로 초빙하기에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 지방 소학교에 배치되면 학교 운영과 지역 계몽에 지도적 역할은 물론이요, 주간에는 아동 교육과 야간에는 지방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 일단 유사시 병력을 대비하는 임무가 가장 주목적이었다.
나도 졸업 후 유하현 대사탄(大沙灘) 소학교로 배치되었다. 이 곳에는 이탁(李鐸)·이장녕(李章寧)·남상복(南相復) 등 애국 전배가 주거하고 있었다.
여기서 특히 생각나는 것은 1915년 가을, 이동녕 선생의 장남 이의직(李義直) 2기생이, 통화현 쾌다모자(快多帽子) 소학교로 발령이 나서 부임 도중 애석하게도 20대 청춘을 일기로 여로 숙사에서 불시로 야반에 급서한 사고가 발생하여 전교가 슬퍼하던 일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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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북차(小北岔) 분교인 백서농장(白西農場)
1917년 봄에 통화현 제8구 8리초(八里哨) 5관하(五管下) 소북차(小北岔)란 곳에 무관학교의 분교를 세웠다.
이 곳은 백두 산맥 인적 미답의 대수해(大樹海) 지대로서 산곰·산돼지·오소리 등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험산 유곡이었다.
이 곳에 막사를 구축하고 웅지를 품은 동지들이 모여들어 나는 새와 뛰는 짐승을 벗삼으며 스스로 밭갈고 나무짐을 지는 초부가 되어 도원 결의의 굳은 맹세를 방불하게 하였다.
이곳 이름을 백서(白西) 농장이라 하고 그 때 중요한 부서는 아래와 같다.
장주(庄主) 김동삼(金東三)
총무 김정제(金貞濟)
훈독(訓督) 양규열(梁圭烈)
교도(敎導) 이근호(李根澔)
농감(農監) 채찬(蔡燦 : 白狂雲)
경리 김자순(金子淳)
의감(醫監) 김환(金煥)
외무 정무(鄭武)
9. 진공 직전의 3·1 운동
1919년 봄 3월 1일, 국치 후 질곡 10년, 민족의 함성은 서간도에도 암호전문(暗號電文)에 뒤 이어 상해 또는 국내 통신이 접지(接至)되자 감격의 눈물, 흥분의 환호 속에 광채로운 축하식과 선언문 배포 등 문자 그대로 지축(地軸)을 흔드는 열광적 경축 일색이었다.
백의 동포들은 방방 곡곡에서 암흑의 구렁에 광명이 비쳐 오는 듯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를 휘날리며 우리도 독립국임를 과시하는 반면, 중국 관민들도 우리들 애국 열정에 한국 독립을 절찬하는 동정적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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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군정부와 한족회 설치
세계 정세의 급전으로 남만 각지 애국 단체 지도자들은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회합하여 남만 독립 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하고. 자치 기관으로는 전 부민단을 한족회로 확장 개편됨에 이탁(李沰)이 총장으로 선임되어 각 부서에 책임을 분담하고 지방에는 총관 이하 백가장 십가장(十家長)을 두어 신속 민활한 비상 체계를 갖추어 일대 혁신을 가져 왔다.
한족회의 조직 부서는 아래와 같다.
중앙 총장 이탁(李沰)
서무부장 김동삼
법무부장 이진산(李震出)
학무부장 김규식 (金奎植)
재무부장 안동원(安東源)
총관 1천 호에 1명
백가장 1백 호에 1명
십가장 1십 호에 1명
 
제3단계 확장기
1. 신흥의 제3기지 고산자(孤山子)
이 격동하는 시국에 따라 지나간 근 10년간 무관 양성의 본거지였던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일대 확장의 시급함을 인정하고, 즉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 하동대두자(河東大肚子) 지역에 광활한 기지를 택하여 40여 간의 광대한 병영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부설하는 등 무관학교의 제3기지로서 구국 혁명의 일대 획기적인 새 면모를 전격적으로 정비하게 되었다.
이 곳은 유하현 고산자 거리에서 약 15리쯤 동남쪽 산길 좁은 길로 들어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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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산으로 둘러 싸인 산간 벽지로서 이 지방에는 한족회 중앙 총장인 이탁(李沰)의 저택과 재무부장 남정섭(南廷燮) 이외 김자순(金子淳)·곽문(郭文)·곽무(郭武)·김정제(金貞濟) 등 제 선배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산간 부락으로 일종 애국자들의 집단촌인 것 같기도 했다.
전기 한 바와 같이 군정부로 개편한 뒤 상해 임시정부를 전 민족의 총본영으로 인정하고 임정에서도 한족회로 문서를 보내며 단독 행동을 취하지 말고 임정 중심으로 총단결하자는 요청이 있어 한족회에서는 남만 대표로 윤기섭(尹琦燮) 선생을 상해로 파견하였다.
2. 임정 산하의 서로군정서
그리하여, 군정부는 서로군정서로 개칭과 아울러 임정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본교에서는 군정서의 지령에 의해 졸업생들에게 비상 소집령을 내려 각지방 일반 교포들에게 부과된 의무 헌금 징수와 아울러 각 분(分)·지(支)교 및 노동 강습소에 배치하여 농촌 청년층에 긴급 군사 훈련을 강화함으로써 진공 태세의 일보 직전에서 시국의 추이를 주시하였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국내에서는 일제에 대한 불만을 품은 수천 수만의 애국 청년들이 압록강을 건너 안동·집안·흥경·통화·유하까지 장사진을 이루워 대거 탈출하여 오는 그 목표가 모두 무관학교 입교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나는 삼원보의 한족회 학무부장 김규식 선생이 불러, 전날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을 선발하여 모교의 교관으로 임명한다는 취지의 하명을 받고, 즉시 본교로 부임하니 전기 ‘합니하’에는 분교를 두어 김창환(金昌煥) 교관이 남아 있었고 본교는 이미 고산자의 새 기지로 이동한 뒤었다.
그러나, 아직 신축 공사가 착공 중이어서 그 때 폐업 중인 만주인 양조장 건물 수십 간을 빌려 시급한 교육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범석 동지도 이 때 이곳에서 교관으로 잠깐 재직하고 있었다.
이 때 교직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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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이천민(李天民=古狂=世永)
교감 윤기섭
교관 이청천
교관 성준용(成駿用)
교관 원병상(元秉常)
교관 이범석
교관 박장섭(朴章燮)
교관 김성로(金成魯)
교관 계용보(桂龍輔)
의무감(醫務監) 안사영(安思永)
이 신축 교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 수십 장의 착정(鑿井) 공사는 당시 재무 부장 남정섭씨 지원하에 다사 다난한 공사 촉진을 위해 현장 실무 감역에도 온갖 심혈을 기울여 노력해 왔다.
이 무렵 이청천·신동천(申東川=申八均)·김경천(金擎天)·세칭 3천이 국내로부터 탈출하여, 신동천은 흥경으로 김경천은 러시아로 향해 떠났기 때문에 무관학교의 교직에는 관련한 바 없으며, 다만 일본군 출신 이청천만이 최신 병서와 군용 지도 등을 지참하고, 신흥무관학교로 와서 교관으로 재직하였던 바이다.
3. 6백여 명의 신입생 입교
국내에서 탈출해 나오는 애국 청년들, 재만 동포 청년들, 또 과거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노년층까지 몰려 들어 신흥무관학교는 개교 이래 최대의 성황을 이루었다.
십칠팔 세의 소년으로부터 5십여 세의 노년 학생을 망라한 이 때의 6백여 명 신입생들의 성분도 가지 각색이었고 한 학년의 학생수 6백여 명이란 것도 개교 이래의 처음 있는 광경이라 하겠다.
이 곳 고산자의 본교 모든 교육 내용은 합니하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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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일군의 박해와 마적단 습격
그러나, 이와 같은 무관학교의 교세 확장과는 달리 서간도 지방의 정세는 우리 운동선에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독립군 토벌과 만주 침략적 야욕(野慾)은 점차 노골화되어 군대 출동의 참살 위압과 아울러 이들의 압력으로 인한 중국 관헌의 피동적 방해도 날이 갈수록 가중해졌다. 더구나, 백주에 횡행하는 마적단의 내습도 빈번하니 우리에게는 이중 삼중의 박해가 닥치기만 하였다. 설상 가상으로 이해 7월 어느날 밤에는 마적단의 기습으로 윤기섭 교감과 박장섭 교관 이하 생도 수명이 불의로 납치되어 갔고 또 뒤에 이어 윤치국(尹致國) 치사 사건 등 불행한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니 무관학교의 사기는 현저하게 떨어져 가는 한편, 이같은 복잡한 관계로 교장 이하 교직원 상당수가 모두 공석인데다가 피해자측에서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보복하겠다고 나서니, 교내 분위기는 극도로 경화되고, 학교 운명이 악화 일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한족회 서무 부장 김동삼 선생의 원만한 거중 조정과 양규열 학무과장이 더불어 사후 수습을 위해 최후까지 필사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겨우 확대되지 않은 범위에서 수습은 되었지만 저하된 사기는 용이하게 만회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5. 청산리 승리와 신흥의 역군들
이 해 8월에 신흥 학우단에서는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요청에 의해서 그 곳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본교 졸업생 중 북로군정서 사관학교(사관 연성소) 교관으로
김춘식(金春植=勳)
오상세(吳祥世)
박영희(朴寧熙)
백종렬(白鍾烈)
강화린(姜化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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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崔海)
이운강(李雲崗)
등을 파견하여 사관 교육을 담당하였다. 다음해 1920년 9월 20일경에 일본군 제21사단이 시베리아에서 장고봉(張鼓峯)을 넘어오고, 나남에 있던 제19사단이 북상하여 북간도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에 있던 북로군정서를 진공하려 들자, 이 정보를 접한 아군측에서는 전원이 근거지를 떠나 청산리 계곡에서 유리한 지점을 택하여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독립전 사상 금자탑을 세웠다.
당시 전투 병력의 중요 간부 대개가 신흥 출신 이하 그 곳 사관생들이었던 것을 볼 때 교육 훈련면의 단결된 정신적 성과가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무관학교 생도들은 간 곳마다 용감했으며, 이와 같은 혁혁한 업적은 한갓 일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1922년 8월 통의부 당시 백광운(白狂雲=蔡煥)·신용관(申容寬)은 집안·통화 등지로부터 애국 청년들을 모집하여 의용군 제1중대라 칭하고, 백광운 등을 중심으로 군세 확장에 전력을 기울인 나머지 병력 8·9백 명에 달하여 가장 용감히 활약한 유수한 중대로서 압록강 연안 왜인 주재소 기습 등 적도 전율을 면하지 못하였었다.
6. 주구배 사살과 기타 활약상
이 외에도 1925년 정의부 당시 금천현(金泉縣) 주재 왜영사 소속인 악질 분자 중에도 대표적 악질로 지휘를 받아 오던 주구 숙청 사건에 있어서 황교석 이하 수명의 동지들이 잠입, 습격으로 때마침 회의 중이던 왜인 거류민 회장 황정일랑(荒井一郞)과 한인 조영로(趙永魯)가 사살되고, 주 목표인 이규하(李圭夏)는 교묘히 도피하게 되자 사후 포학이 절정에 달하여 산천 초목도 창거(搶擧) 선풍에 벌벌 떨었다.
이외에도 무관학교 출신들의 활약상은 일일히 매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다하였다.
시간도 어느 기간이나 시베리아 벌판 또는, 중원 대륙 어떠한 독립 운동 기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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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곳마다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성실과 정렬로 용감히 싸웠다.
다만 그 때 사정이 누구나 몇 번씩 이름을 바꾸어야 하였고 세월이 오래 흘러가매 이제는 그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하여 여기에 적을 수 없는 것이 가슴 아픈 한이다.
7. 폐교의 비운
마침내, 1919년 겨울, 긴박 일로로 치닫는 시국 밑에 일제의 박해와 또는 중국 관헌의 압력과 잇따른 불행한 사고로 신흥무관학교는 더 이상 지탱 할 수 없는 처지에 임하고 말았다.
결국 지나간 10년의 고난의 역사를 돌아보면 비통한 눈물을 머금고 폐교를 아니 하지 못하게 되었다.
최후 수단으로 이청천이 교성대를 편성하여 약간 명의 생도들을 인솔하고 장백산 지역으로 들어가 재기를 모색하였지마는 종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8. 10년간 졸업생수 3500여 명
1911년 추가가(鄒家街)의 제1회 졸업생에서부터 합니하(哈泥河)를 거쳐서 1919년 11월 폐교에 이르기까지 본교 졸업생수는 본·지·분교를 통해서 3천 5백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상과 같이 제각기 구국 운동의 대열에서 젊은 피를 흘렸다.
그 때 우리들의 피를 끓게 하던 독립군 용진가를 한 번 불러 본다.
[독립군 용진가]
(1) 용동 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 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 보세
(후렴) 나가세 전쟁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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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자 전쟁장으로
검수 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이하 2·3·4절은 생략한다.
기억에 남은 신흥학교 동지들의 명단
김련(金鍊) 평남 김석(金石) 평남
이근호(李根澔) 평남 변영태(卞榮泰) 서울
김성태(金聲泰) 경북 성준용(成駿用) 서울
황병우(黃炳禹) 강원 황병탕(黃炳湯) 강원
박돈서(李敦緖) 서울 김세락(金世洛) 경북
안상목(安相穆) 미상 장기구(張基球) 함경
차용륙(車用陸) 평북 박상훈(朴相勳) 충북
이동화(李東華) 미상 장세진(張世鎭) 강원
김창곤(金昌昆) 평남 김창해(金昌海) 평남
강일수(姜一秀) 서울 이광민(李光民) 경북
김동식(金東植) 평남 이규준(李圭駿) 서울
강보형(康寶衡) 전남 이규훈(李圭勳) 서울
이의직(李義直) 서울 문목호(文穆鎬) 경북
권태두(權泰斗) 경남 황일청(黃一淸) 미상
동만식(董萬植) 경남 엄주관(嚴柱寬) 서울
이찬희(李贊熙) 평남 원병상(元秉常) 강원
홍종낙(洪鍾洛) 미상 이병찬(李秉瓚) 서울
이규동(李圭東) 강원 김성로(金成魯) 경북
황병일(黃炳日) 강원 주대근(朱大根) 강원
이규학(李圭鶴) 서울 정동수(鄭東秀) 강원
서병희(徐丙熙) 서울 이병세(李炳世) 강원
이정준(李禎準) 평북 강한년(康翰年) 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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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헌(裴憲) 전북 신창준(申昌俊) 평남
허식(許湜) 평남 송희(宋熙) 평북
박기남(朴奇男) 경기 강세현(康世鉉) 전북
계용보(桂龍輔) 평북 김기풍(金基豊) 강원
장정근(張廷根) 평북 김창화(金昌華) 평남
손상헌(孫祥憲) 경남 최상봉(崔相奉) 평북
문창호(文昌鎬) 경북 김현락(金顯洛) 경북
하종악(河鍾岳) 경남 박장희(朴壯熙) 충남
박태열(朴泰烈) 황해 오광선(吳光鮮) 경기
이동기(李東基) 경북 백종렬(白鍾烈) 강원
강희봉(姜熙奉) 경북 김정로(金正魯) 경북
김치도(金治道) 평북 한송주(韓松柱) 평북
손무영(孫武榮) 경기 반화정(瀋化正) 경북
육연창(陸然昌) 경기 백광운(白狂雲) 충북
김성윤(金晟胤) 미상 김은석(金恩錫) 평남
이병탁(李秉鐸) 강원 김양렬(金陽烈) 미상
주병순(朱秉順) 강원 최해(崔海) 경기
강화린(姜華麟) 미상 원세기(元世基) 강원
노의준(盧義俊) 평양 신이섭(申利燮) 평남
최영훈(崔永薰) 미상 김중한(金重漢) 경북
오상세(吳祥世) 경기 윤일파(尹一坡) 경기
이운강(李雲崗) 미상 원세걸(元世杰) 강원
김치은(金治殷) 평남 김만현(金萬鉉) 평북
이승우(李承祐) 경북 이웅해(李雄海) 경북
김훈(金勳) 미상 안기영(安基榮) 서울
송종근(宋鍾根) 전라 장호문(張鎬文) 경북
이승호(李昇浩) 경북 이영선(李永善) 서울
김영윤(金永允) 평남 신형섭(申亨燮) 평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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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영(金俊永) 서울 이기연(李起淵) 서울
송호성(宋虎聲) 평북 신용관(申容寬) 미상
이지영(李之榮) 충남 이동산(李東山) 경남
윤치국(尹致國) 경북 권계환(權啓煥) 경북
이석영(李碩英) 평북 송재만(宋在滿) 전라
강태희(姜泰熙) 평북 장두관(張斗觀) 경남
김창도(金昌道) 평북 문벽파(文碧陂) 평북
김철(金鐵) 경북 인건(印鍵) 서울
박달준(朴達俊) 경북 권영조(權寧祚) 경북
조경호(趙京鎬) 경기 이필주(李弼周) 서울
박명진(朴明鎭) 경북 석준상(石俊尙) 평북
황덕영(黃德英) 강원 홍익선(洪益善) 평북
허황(許滉) 쏘취분 이종건(李鍾乾) 경북
고원성(高元成) 미상 김천수(金千洙) 쏘취분
이규서(李圭瑞) 강원 이희산(李熙山) 미상
이희엽(李熙燁) 미상 김군현(金莙鉉) 평북
신호섭(申虎燮) 평북 백기주(白基柱) 평북
김성삼(金省三) 평북 정태성(鄭泰成) 경남
권태원(權泰元) 경북 이성우(李成宇) 미상
이붕해(李鵬海) 경기 한병익(韓炳益) 경북
이덕수(李德洙) 평북 박돈서(朴敦緖) 경기
이기주(李基周) 미상 권태원(權泰元) 경남
김도태(金道泰) 미상 서기석(徐耆錫) 서울
황교석(黃敎石) 강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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