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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신씨와 평산 신씨

작성자리핏(신유현)|작성시간15.03.09|조회수2,463 목록 댓글 0

   


고령 신씨의 역사는 고려 중엽에 시작됩니다.

 

그 까닭은 모든 문적에 시조께서 고려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조를 고려의 고종이나 원종 시대의 분이시라고 본다면 고령신씨의 역사는 800년이 가까이 되는 오래된 성씨입니다. 시조의 선조는 신라때의 공족(귀족)이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가야국의 왕족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국내 8대 명당중의 하나라는 만대산이 고령신씨의 소유이고, 고령지방에 있는 6개의 토성(고령의 본을 둔 성씨)중에 고령신씨가 가장 번성한 점들을 보면 추측됩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은 지방에서 세력을 누리던 공족들을 호장으로 임명하여 그 지방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 관례에 따라 시조 성용(成用)께서도 호장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을 지내며 이름과 세력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자손도 등과함으로써 고령신씨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습니다.또한 시조께서 경상도 고령지방에 터를 누리셨기에 우리 씨족은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고령은 경상북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옛 대가야국의 중심지입니다.
고령은 757년(경덕왕)에 고양군이 되었고, 그후 조선 태종때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영'을 따서 고령현이라 하였으며, 1895년(고종)에 성주 9면과 현풍 3면을 병합하여 고령군이 되었습니다.

고령신씨는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들이 지금 사회 각분야 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1985년 당시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2만명에 이릅니다. 이 정도의 수라면 50대 성씨에 속할 만큼 벌족한 성씨입니다.

 

그러나 조사에 누락된 사람이 많고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더 많은 종친 이 늘어났으므로 우리는 통칭 20만 종친이라고 합니다.

 

 

 [관련정보]
  시조묘 : 고령시 쌍림면 산주동 산38번지 만대산
  시향일 : 음력 10월 초하루

  

 

저는 평산신씨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고

오해하는 평산신씨平山申氏와 고령신씨高靈申氏와의 관계를 서술하겠습니다.

 

고령신씨와 평산신씨 사이의 오해로는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평산신씨와 고령신씨는 뿌리가 하나이고, 兄(평산)弟(고령)지간이다.

 

2.고령신씨의 시조는 신숭겸 장군(평산신씨의 시조)이다.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는 한 뿌리가 아니며 형제지간 또한 아닙니다.

고령신씨의 시조는 신숭겸 장군(평산신씨의 시조)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특히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를 한 뿌리요,

兄弟지간으로 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고려 개국 일등공신이신 평산신씨의 시조 신숭겸 장군의  '신숭겸申崇謙'이라는

이름은 태조 왕건께서 하사하신 이름으로, 본명은 삼능산三能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산신씨의 조상들은 신라 말까지만 하더라도 성이 三氏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령신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군기감검교軍器監檢校를 지낸 신성용申成用이십니다.

시조 신성용 이전의 조상 즉 고령신씨의 조상은 신라시대 귀족이요 호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는 시조도 다르고 그 연원도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왜 많은 분들이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를 한 뿌리요,

   형제지간으로 오해를 하고 있을까요?

 

2.정말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는 아무관계도 없는 건가요?

 

 

평산과 고령을 한 뿌리로 오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같은 '신'자에 한자도 같은

'申'자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申氏에 많은 본관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사람 수가 많고 명문인 본관은 크게 2가지입니다.

평산신씨(신씨중 70%)와 고령신씨(신씨중 20%)이지요.

그러니 평산과 고령을 형제지간으로 생각하거나 오해를 했을수도 있겠지요.

 

위에 봄과 같이 고령신씨와 평산신씨는 本이 다릅니다.

그러나 평산신씨와 고령신씨가 정말 아무 관련이 없는 남남은 아닙니다.

먼저 예전에는 가문과 혈통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문이 끊기는 것을 원치 않았지요. 그러므로 부부 슬하에 아들(子)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양자를 아무데서나 데리고 오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선호하는 양자는 같은 가문의 사람이었고, 두번째로는 같은 가문은 아니되 성姓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즉, 고령신씨인 부부에 자식이 없으면 먼저 고령신씨 내의 사람들을 찾아보고

다음으로는 같은 '申'자를 쓰는 평산신씨 중에서 데려오는 것이지요.

평산신씨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평산신씨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고령신씨의 족보에 올라가기도 하고

고령신씨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평산신씨의 족보에 올라가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를 남남으로는 볼 수 없지요.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끼리는 왠만해서는 서로 혼인을 禁했습니다.

비록 동성동본은 아니지만, 동성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또평산신씨와 고령신씨는 같은 本은 아니더라도 같은 신씨라는 이유로 다른 성씨와 비교해서

서로의 유대감이 강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경남 사람이 경북 사람을 만나면 같은 경상도라며 반가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말이 길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서술한 글을 요약하자면 평산신씨와 고령신씨를 같은 뿌리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같은 뿌리가 아니며 서로 다른 시조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산신씨와 고령신씨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평산과 고령이 서로 양자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았으며 동성(申)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혼인을

금했고 타성에 비해 서로의 유대감이 강했습니다.

 

 

신 [申] 성(姓)의 하나
문헌상 150여 개의 본이 전하나, 오늘날에는 고령(高靈)•아주(鵝洲)•평산(平山)•곡성(谷城)•삭녕(朔寧)•신천(信川)•영해(寧海)•은풍(殷豊)•이천(利川)•조종(朝宗)•창주(昌洲)•천안(天安) 등 10여 본이 있다.

 

고령신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감(軍器監)을 지낸 신성용(申成用)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신라의 공족(公族)으로 여러 대에 걸쳐 고령에 세거(世居)하면서 호장(戶長)을 지내왔다. 그뒤 후손들이 고령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6세손 대에서 암헌공파(巖軒公派)•정은공파(靜隱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 등으로 갈라졌다. 아주신씨는 고려 말엽에 거제군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신영미(申英美)를 시조로 삼고 있었으나, 근세에 와서는 영미의 상계(上系)로 고려 중엽에 아주군에 봉해진 익휴(益休)를 시조로 삼고 관향을 아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평산신씨의 시조는 신숭겸(申崇謙)이다.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전라도 곡성 출신으로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원훈대장군(開國元勳大將軍)이 되었다. 태조 왕건이 평산에 사냥을 나갔을 때, 그가 태조의 제안대로 날아가는 셋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혔다. 태조는 탄복하여 기러기가 날던 땅 300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그뒤 시조의 14대손 대에서 사간공파(思簡公派)•문희공파(文僖公派)•제정공파(齊靖公派)•정언공파(正言公派)•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등 25파개로 갈라졌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21만 7,591호와 인구수 69만 8,171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13위이다.
 
신 [愼] 성(姓)의 하나
문헌상 거창(居昌)•과천(果川)•신창(新昌) 등 15개의 본관이 전하나, 성씨의 유래와 계통이 확실히 전하는 것은 거창뿐이다. 본래 중국 성으로, 초(楚)나라 혜왕(惠王)의 아들 연(連)이 신현(愼縣)이란 곳에서 숨어살면서 성을 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뒤 그의 후손들이 송(宋)나라에서 크게 번성했는데, 그 후손 중의 한 사람인 신수(愼修)가 우리나라에 와서 거창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수는 고려 숙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으며, 아들 안지(安之)는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그뒤 후손들이 거창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후 13세손 이충(以衷)의 아들 3형제 중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기(幾)가 참판공파(參判公派), 사온서령(司醞署令)을 지낸 언(言)이 서령공파(署令公派),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절도사를 지낸 전(詮)이 양간공파(襄簡公派)의 파조(派祖)가 된 뒤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다. 거창신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愼)자를 쓰지 않고 뜻은 같지만 모양이 다른 신(愼)을 사용하는데, 이는 신(愼)자 속에 칼[匕]을 뜻하는 획이 들어 있어 사람의 성(姓)자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1만 4,232호와 인구수 4만 5,764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68위이다.


고령 신씨 
 
고령 신씨 (高靈 申氏)
관향 고령
시조 신성용 (申成用)
주요 중시조 
주요 집성촌 충북 청원군, 전남 여천군, 전남 고흥군, 경북 고령군

주요 인물 신윤복, 신채호, 신숙주, 신성모, 신규식

인구(2000년)
116,966명

고령 신씨(高靈 申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본래 신라 공족(公族)의 후예로 고려에서 지방 향리인 호장이 되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올랐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누대로 정착 세거해 온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다.


 본관
고령은 경북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옛 대가야국의 중심지인데 757년(신라 경덕왕)에 고양군이 되었고, 그 후 조선 태종때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영을 따서 고령현이라 하였으며, 1895년(조선 고종)에 성주 9면과 현풍 3면을 병합하여 고령군이 되었다.


 분파
신성용의 7세손에서 암헌공파(巖軒公派)•정언공파(正言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의 3파로 갈라졌다.
• 암헌공파(巖獻公派) - 신장(申檣) 
o 서윤공파(庶尹公派) - 신맹주 
o 순창공파(淳昌公派) - 신중주 
o 문충공파(文忠公派) - 신숙주 
o 안동공파(安東公派) - 신송주 
o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 - 신말주 
• 정은공파(靜隱公派) - 신평(申枰) 
o 정재공파(靖齎公派) - 신맹정 
o 죽재공파(竹齋公派) - 신중정 
o 성오재공파(省悟齋公派) - 신숙정 
• 감찰공파(監察公派) - 신제(申梯) 
o 사성공파(司成公派) - 신자교 
o 부사공파(府使公派) - 신자강 
o 사정공파(司正公派) - 신자동 
o 사직공파(司直公派) - 신자정 
• 시중공파(侍中公派) - 신인기(申仁杞)  

 

인물
시조의 5세손 신덕린(申德隣)이 고려말에 좌사의대부와 예조와 공조판서 판서에 이르렀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역임한 아들 신포시(申包翅)를 데리고 개성 두류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다시 광주 서석산으로 옮겨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신포시(申包翅)의 아들 신장(申檣), 신평(申枰), 신제(申梯)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맏아들 신장(申檣)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올라 남산지곡을 지었으며, 오랫동안 대제학에 있었고, 둘째 아들 신평(申枰)은 사간원의 정언을 역임했고, 막내 신제(申梯)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신장(申檣)의 아들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신숙주(申叔舟)는 6대 왕조를 거치면서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조선조의 기반을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명상으로 추앙되었다. 신광수(申光洙: 첨지중추부사 신호의 아들)는 조선 영조 때 의금부도사(義禁莩事)로 제주도에 가서 그 곳의 풍토•산천•조수•항해 상황 등을 적은 부해록을 지어 문명을 떨쳤고 그의 대표작으로 당시에 널리 애송되었던 관산용마를 지었다. 근세인물로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申潤福)과 사학자 신채호(申采浩),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신홍식(申洪植) 등이 있다. 

 

 집성촌
• 충북 청원군 가덕면 청룡리, 행정리, 인차리 
• 전남 여천군 쌍봉면 해산리 
• 전남 여천군 화정면 적금리 
• 전남 고흥군 도양읍 가야리 
• 전남 고흥군 점암면 대용리, 남양면 망주리 
•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수리 

• 경북 고령군 운수면 운산동 
 

 

 

신숙주(叔舟, 문충공)(보한재保閑齋)
영의정
신용개(用漑, 문경공)(이요정二樂亭)
좌의정
신익상(翼相, 정간공)(성재醒齋)
우의정

 

 


신덕린 
신   준(浚, 소안공)
신공제(公濟, 이계공)
신광한(光漢, 기재공)
신헌구(獻求,백파공)
고려 예의판서
형조,이조,공조판서, 좌찬성
이조판서, 좌참찬
형조,이조판서,좌찬성
형조,예조,이조판서

  
   

 

 

신   장(檣, 암헌공)
신   정(瀞, 고천군)
신종호(從濩, 삼괴당)
신   담(湛, 어성공)
신   식(湜, 졸재공)
신득연(得淵, 현포공)
신   유(濡, 죽당공)
신좌모(佐模, 담인공)
공조좌참판
이ㆍ공조참판
예ㆍ호조참판
예조참판
예ㆍ공조참판
예조참판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참판
이ㆍ병ㆍ형ㆍ공조참판

 

 

신숙주(叔舟, 문충공)(보한재保閑齋)
신용개(用漑, 문경공)(이요정二樂亭)
신광한(光漢, 문간공)(기재企齋)
예문관 대제학, 보문각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홍문관 대제학    

 

신덕린(德隣, 순은공)
신   장(檣, 암헌공)
신종호(從濩, 삼괴당)
신공제(公濟, 정민공) 
   

 

신   식(湜, 졸재공)
신   담(湛, 어성공) 
 

신   유(濡, 죽당공)
 

 

영의정 신숙주(叔舟)
보한재(保閑齋) 문충공(文忠公)
좌찬성 신   준(浚)
소안공 (昭安公) 소안공 (昭安公)
좌의정 신용개(用漑)
이요정(二樂亭) 문경공 (文景公)
좌찬성 신광한(光漢)
기재(企齋) 문간공 (文簡公)
좌참찬 신공제(公濟)
이계(伊溪) 정민공 (貞敏公)
고원위 신   항(沆)
문효공 (文孝公) 문효공 (文孝公)
우의정 신익상(翼相)
성재(醒齋) 정간공 (貞簡公)

 

 

* 불천지위를 받으신 조상 : 기제사를 영원히 지내드리는 조상

문충공 신숙주(叔舟)
고천군 신   정(瀞)
소안공 신   준(浚)
고원위 신   항(沆)
영천위 신   의( )
 


관계인사
신성모 (性模, 정은공파) : 국무총리 서리, 국방부장관
신범식 (範植, 영성군파) : 문공부장관
신형식 (泂植, 시중공파) : 건설부장관, 무임소장관
신말업 (末業, 정은공파) : 육군대장
신용우 (庸雨, 감찰공파) : 서울시 부시장, 전남지사, 전북지사
신윤식 (允植, 감찰공파) : 체신부차관
신순우 (洵雨, 시중공파) : 산림청장
신태희 (泰姬, 강원백파) : 여성부차관
신중식 (仲植, 시중공파) : 국정홍보처장

정계인사(국회의원)
신각휴 (珏休, 소안공파)
신규식 (奎植, 귀래정공파)
신정호 (正浩, 소안공파)
신인우 (仁雨, 귀래정공파)
신관우 (灌雨, 소안공파)
신범식 (範植, 영성군파)
신형식 (泂植, 시중공파)
신재휴 (宰休, 정은공파)
신계륜 (溪輪, 귀래정공파)
신중식 (仲植, 시중공파) <3 선>
 

 

 

 

◆고령신씨(高靈申氏)는

고령신씨의 시조는 신라 공족(公族·귀족) 출신으로 고려 때 검교군기감을 역임한 신성용(申成用)이다. 그의 집안은 신라시대 이후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고령지방에 근거지를 둔 대가야의 왕족출신일 것이라고 고령신씨 대종회 측에선 추측하고 있다. 즉 김해김씨가 김해지방에 근거지를 둔 금관가야 수로왕의 후손들이라면, 고령신씨는 고령지방에 근거지를 둔 대가야의 이진아시왕(伊珍阿?王, 뇌질주일)의 후예라는 것이다. 

원래 가야국 건립신화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삼국유사에 실린 것으로 구지봉 거북이 알에서 태어난 여섯 명이 각각 6가야를 다스렸다는 수로왕 신화이다. 다른 하나는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린 정견모주설화(正見母主說話)이다. 그중 정견모주설화를 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가야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성용의 묘 고령신씨 시조인 신성용의 묘는 경북 고령군 쌍림면 만대산에 있다.
어찌되었든 고령신씨의 시조인 신성용의 집안이 대대로 고령지방의 호장을 역임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만큼, 고령신씨는 고령지방의 호족출신으로 추측된다. 그 후 고령신씨는 신성용의 6대손에서 암헌공파(巖軒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로 나뉜다. 암헌공파(巖獻公派)는 다시 서윤공파(庶尹公派), 순창공파(淳昌公派), 문충공파(文忠公派), 안동공파(安東公派),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로 나뉘고, 정은공파(靜隱公派)는 생원공파(生員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성재공파(省齋公派)로, 감찰공파(監察公派)는 사성공파(司成公派), 인천공파(仁川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로, 시중공파(侍中公派)는 상호군파(上護軍派),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나뉘어졌다. 이 중 암헌공파가 주축을 이룬다. 

고령신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357명의 과거 급제자(문과·무과·잡과 포함)를 배출했으며, 그중 상신 3명, 대제학 3명 등을 배출한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 결과에 따르면 총 3만6250가구에 11만69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령신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 이야기했듯이 고령신씨의 시조는 고령지역에서 호장을 지낸 신성용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검교군기감에 올랐는데, 그의 후손들이 그가 누대로 세거한 고령지역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신성용의 현손인 신덕린(申德隣)이 고려말에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친교했다. 하지만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역임한 아들 신포시(申包翅)와 함께 개성 두류산에 은거하다, 다시 전라도 광주의 서석산으로 옮겨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이로 인해 신덕린은 두문 72현에 배향되었다. 특히 그의 뛰어난 필체는 ‘덕린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포시는 신장(申檣), 신평(申枰), 신제(申梯) 등 3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하여 고령신씨의 3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맏아들 신장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오랫동안 대제학에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신평은 사간원 정언을 역임했고, 셋째 신제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특히 첫째 신장의 5형제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했다.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는데, 그들의 후손 중에서 3정승, 3문형을 비롯해 91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왔다. 그중 특히 신숙주(申叔舟)가 뛰어났는데, 그는 성삼문, 박팽년과 함께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다. 세종 2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을 시작으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6대 임금을 섬겼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것을 의논했으며, 경국대전,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는 특히 언어학에 뛰어났다.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고 심지어 인도어, 아라비아어까지 터득했다고 한다. 그의 언어적 재능이 세종의 한글창제에 크게 도움을 준 것 같다. 그가 세조인 수양대군과 친하게 된 것은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했던 것인 계기가 된 듯하다. 그 후 그는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정난공신에 오르고, 세조 때 좌익공신, 예종 때 익대공신, 성종 때 좌리공신 등 잇달아 공신에 책록되었다. 또 벼슬로는 대제학, 병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대학자로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이름을 떨쳤고, 그 후손이 크게 번창했다.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에 은거했으나 후에 대사간을 거쳐 진주목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신숙주 영정 조선의 대표적인 명신으로 6임금을 섬겼으며, 고령신씨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보한재 신숙주이다.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에 기여하였으며, 세조실록, 해동제국기 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숙주의 아들들 중 둘째인 신면(申沔)은 우승지를 거쳐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이시애의 난 때 전사하였다. 셋째인 신찬(申澯)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넷째 신정(申瀞)은 이조참판을 거쳐 좌리공신에 올랐다. 다섯째 신준(申浚)은 중종반정에 참가하여 공신이 되었다. 그들은 각각 봉례공파(奉禮公派), 함길백파(咸吉伯派), 황해백파(黃海伯派), 고천군파(高川君派), 뇌헌공파(懶軒公派), 강원백파(江原伯派), 영성군파(靈城君派), 호군공파(護軍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또 신숙주의 손자 신종호(申從濩)는 과거시험이 있은 뒤 처음으로 진사시와 문과, 중시를 모두 장원급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신종호의 아들 신항(申沆)은 성종의 딸인 혜숙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고원위)가 되고 연산군 때 부종관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신잠(申潛)은 시·서·화에 뛰어나 3절(絶)이라 불렸다. 특히 조광조가 개혁정치를 하며 발탁한 문인현량과 출신으로 덕망이 두터웠다. 신항의 손자 신의(申儀)는 중종의 부마가 되었으며, 종증손인 신경식(申景植)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신숙주의 둘째인 신면의 아들 신용개(申用漑)는 연산군 폐비윤씨와 연루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입어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어 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신응구(申應?)는 인조반정 후 춘천부사를 지냈고, 신응구의 손자 신익상(申翼相)은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뒤 공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신숙주의 일곱째 신형의 아들 신광한(申光漢)은 을사사화 때 소윤(少尹)에 속하여 대윤(大尹) 일파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양관대제학에 좌찬성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신광한의 종증손인 신용(申涌)은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신식(申湜) 형제는 대사헌을 역임하고, 문한으로 유명하다.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申末舟)의 손자 신공제(申公濟)는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신공제의 4대손인 신경준(申景濬)은 지리학을 개척한 실학자이며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저술하여 한글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영조 때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거쳐 서산군수를 지냈다.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與地考)’를 담당하여 그 공으로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 밖에 신숙주의 10대손으로 신호(申澔)의 아들인 신광수(申光洙)는 의금부도사와 승지를 지냈으며 시·서·화에 뛰어나 3절로 불렸다. 

고령신씨 중에서 근세인물로 뛰어난 사람 중에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申潤福)이 있다. 그는 고령신씨의 서얼출신으로 화원에 들어가 첨정에 올랐다. 그의 그림 중에는 기녀, 무속, 주점 등 당시로서는 금기시되는 현실묘사와 인간주의적 욕망을 표현하였다. 

◆고령신씨 근현대 인물

고령신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있으며, 3·1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신홍식(申洪植),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주춧돌 역할을 한 신규식(申圭植), 일제 치하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했던 신백우(申伯雨), 이동녕 등과 함께 이완용 집을 습격했던 신황(申滉) 등도 고령신씨 가문을 빛낸 독립투사들이다. 

단재 신채호 민족주체사관의 대표적 인사인 단재 신채호의 영정.
그중 단재 신채호는 충남 대덕군(현재 대전시 중구)에서 신광식(申光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균관에 들어가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글을 썼다. 항일조직인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였으며, 친일조직인 일진회 성토에 앞장섰다. 중국 청도로 망명한 후 남북 만주와 백두산 일대의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을 답사했다. 베이징에서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창단하여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며,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주석이었던 이승만에 대한 반감으로 공직을 사퇴하였다. 1925년쯤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하고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기륭항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에 옥사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론(朝鮮史論)’,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채호 사당 충북 청원에 있는 단재 신채호의 사당과 기념관
신규식은 충북 청원에서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역임한 신용우(申龍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신학문에 뜻을 두고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거사를 도모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을 시도했다. 가족들에게 일찍 발견되어 깨어날 수 있었으나, 그로 인해 시신경을 다쳐 한쪽 눈을 잃었다.

상해로 망명한 뒤 손문을 만난 후 교유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하였다. 또한 손문의 중국정부로부터 상해임시정부가 국가승인을 얻는 데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 고질적인 파벌싸움에 25일 동안 불식(不食), 부언(不言), 불약(不藥)을 고집하다 호흡단절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남대문 편액 남대문 편액은 명필로 이름이 높은 고령신씨 암헌공파 파조인 신장이 쓴 글씨이다.
그 외 고령신씨의 근·현대 인사로는 정·관계에 신흥우(주일대사·대한체육회장), 신성모(국방장관·국무총리), 신형식(건설부장관·국회의원), 신범식(문화공보부 장관·국회의원), 신각휴, 신규식, 신재휴, 신인휴, 신정호, 신관우, 신계륜(이상 국회의원), 신영우(전남도지사)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신선호(율산그룹 회장), 신원식(예비역육군소장·전 극동건설 사장), 신석구(진일주택 사장), 신하식(전 대한방직 부회장) 등이 있다. 또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신찬우(숙명여대 교수), 신춘호(고려대 교수), 신원식(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신용순(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신영수(한국일보 부회장), 신우식(스포츠서울 편집인), 신수정(피아니스트·서울대음대 교수), 신양식(전 국립보건원장) 등이 있다. 

  


신성용 을 시조로 하고 신종흡을 입향조로 하는


[연원]
고령신씨(高靈申氏)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신라 왕족의 후예로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했다. 선조들이 고령에 살면서 대대로 호장(戸長)을 지내 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시조의 현손 신덕린은 고려 말 우왕 때 예조판서를 지냈고, 글씨에 뛰어나 그의 글씨를 덕린체라 일컬었다. 『해동필첩(海東筆帖)』에도 명필로 기록되어 있다.

 

신덕린의 맏아들 신장(申檣)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세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신덕린의 둘째 아들 신평(申枰)은 세종 때 사간원정언을 지냈고, 셋째 아들 신제(申梯)는 벼슬이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문충공 신숙주(申叔舟)를 포함한 신장의 아들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이후 정승을 비롯한 91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신용개(申用慨)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수찬과 응교를 지냈고, 중종반정으로 등용되어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는 영조 때 백거이(白居易)에 비교되었던 시인으로 조선 후기 당시 널리 애송되었던 「관산융마(關山戎馬)」를 지었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은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풍속도로 이름을 떨쳤다. 신경준(申景濬)은 1754년(영조 30) 과거에 급제하여 낭관·사헌부장령·강계부사·순천부사·제주목사를 지냈다. 『문헌비고(文献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고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신규식(申奎植)은 대한자강협회·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역사가이자 언론인, 항일 독립 운동의 이념적인 지도자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홍식(申洪植)은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천·원주 등지에서 종교 운동과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신백우(申伯雨)는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고, 신황(申滉)은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이완용의 집을 습격하였다.


[입향경위]
신성용의 10세손이며 신숙주의 손자로 충주부사를 지낸 절충장군 신종흡(申從洽)의 묘를 광명시 광명7동에 이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1세손 신염(申濂)은 사마시에 급제한 뒤 이천부사를 지냈고, 12세손 신수명(申秀溟)은 아산현감(牙山縣監)·의금부동지사·오위도총부총관을 지냈으며 참판에 추증되었다.


[현황]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11월 당시 광명시에 거주한 고령신씨는 총 172가구에 762명이었고, 2000년에는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총 282가구에 6,527명이었다. 광명시에 정착한 고령신씨는 문충공파에서 다시 분파한 봉례공파 후손들로서 1996년 당시 15대째 이어 오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 시제를 지내다가 한글 창제를 기념한다는 취지에 따라 10월 9일에 지내고 있다.


[관련유적]
광명시 광명7동에 신종흡의 묘가 있다. 현재의 묘는 1982년 11월 30일 도굴당한 뒤 새로 만들었다.


http://blog.naver.com/mclhkg/60186608671

[출처] 고령 신씨|작성자 HK 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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