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들보'는 자기의 의(義)>
마 7:1~3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를 들자면
다윗이 마땅히 죽을 자라고 정죄한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윗은 그 부자가 한 가난한 사람의 작은 암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손님을 위해 잡은 것으로 믿고 사실상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인 줄도 모르면서 그 부자를 정죄하였다(삼상 12:1~7)
습관적으로 스스로 의롭다는 자세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그 자신도 정죄를 당할 수 있으며, 이 정죄는 사람에게서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도 받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3~35)를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
만일 너희가 무자비하게 비판을 하면 너희도 무지비하게 비판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친절하게 비판을 하면 친절하게 비판을 받고 친절한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들보는 건물 지붕의 서까래들을 가로 받치는 데에 사용하는 무거운 목재입니다.
"티"는 짚이나 나무의 작은 조각을 뜻하는데 들보에게 떨어진 작은 부스러기로, 제 눈 속에 있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들보는 완전히 무시한 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그것을 빼게 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안과 의사를 자청하고 있는 그들은 바리새인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 곧 은혜로 말마암아 아직 온전히 변화되지 못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바리새인이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자기를 살펴 하나님의 은혜로 훈련을 쌓음이 없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 고치려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살필(고전 11:28)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義)
자기 눈에는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그가 겸손하지 못하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의 눈 속에 자기 스스로 의롭다하는 의(義) 곧 자기의(自己義)의 들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님 안과 의사로 만들어 놓습니다.
장님이 어찌 다른 사람의 눈을 수술하려 들 것인가!
스스로 의사인체 하는 사람의 눈에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무리 중대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자기의에 비한다면 하나의 "티"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자기의 의(義)는 아주 두드러진 것이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 비판하는 자의 눈 속에 있는 들보와도 같은 것입니다.
들보가 제거되는 방법은?
롬 3장 9~24이 은혜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심령에 와 닿는자가 바로 들보가 제거된 사람입니다.
이 들보가 제거되면 이전에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던 사람이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뺄 수가 있습니다.
곧 그제아 온유한 심령이 되어 자기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아 자기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갈 6:1)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8)
그러나 우리는 비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여기고 훈련받아야 할 것은 비판받을 줄 아는 훈련입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비판을 받아 들이는 겸손입니다.
그러나 비판은 위험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과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이 세상에는 조심성없이 비판하여 일어난 문제들이 많습니다.
비판은 비난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판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들은 정확하고 빈틈이 없으며 청렴 결백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도 하고 도리어 그들 때문에 교회는 더 어지러워집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른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 되었기 때문에 내가 바른 말을 한 것에는 일절 잘못이 없고 못 알아들은 상대방만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비판이 정확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판을 얼마나 잘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비판의 내용을 잘 알아듣도록 전달할 책임이 비판자에게 있습니다.
비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감정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일에는 이성만 중요한 줄 아나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이 뒤틀리면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잘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대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잘 감싸 줄 책임이 비판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비난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더 격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바른말 한다고 해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는 사랑입니다.
어떤 문제를 지적하려고 할 때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비판이 되고 사랑 없이 정죄만 하면 비난이 됩니다.
일단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비판이나 섬김은 헛수고가 됩니다(고전 13장).
비판은 중독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올바른 바판자는 남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마음 아파합니다.
그런데 비판 중독자는 남의 허물을 찾으면 기뻐합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얘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낌니다.
이들이 비판 중독자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비판 중독자는 쓰레기 같은 정보를 수집합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본받을 점 등 긍정적인 정보는 거부하고 부정적이고 잘못된 정보는 다 수집합니다.
온갖 더러운 정보를 다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물어보면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게 하는 얘기를 다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나깨나 냄새나고 골치 아프고 좋지 않은 생각을 머리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런데 남을 비판하다 보면 마치 우리가 심판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비판은 잘못을 바로 잡도록 돕는 것이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다 보면 자기는 마치 죄가 없는 사람인양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만해지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 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1~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