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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해남파 파조 9世 진(縉) 묘소 이장

작성자편집자|작성시간14.04.11|조회수187 목록 댓글 0

해남파 파조 9世 진(縉) 묘소 이장

제18차 정기총회도 5월2일 해남서 열려

 

해남파 파조(派祖) 9世 진(縉) 현조(顯祖)와 14세 여중(麗重) 顯祖 등 7분의 조상 묘역이 2010년 5월 새로 조성되었다.

 

백운(白雲) 고문이 해남종친회의 숙원사업인 해남파 파조(派祖) 9世 진(縉) 현조님과 14세 여중(麗重) 현조님을 4월22일 이장(移葬)하는 과정에서 15世 진기(震起), 16世 재경(再景), 18世 복손(復孫) 현조님 묘 자리에 물이 고여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에 긴급회의를 소집, 참석자 전원의 동의를 얻어 7분에 대한 신묘소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장은 5월3일부터 시작해 근 일주일간의 작업 끝에 5월8일 완료되었다. 이장 완료한 조상묘는 해남파 파조(派祖) 9世 진(縉), 14세 여중(麗重), 15世 진기(震起), 16世 재경(再景), 재운(再雲), 17세 치공(致公), 18世 복손(復孫) 현조 등 7분이다.

 

해남파 파조(派祖) 9世 진(縉) 현조의 묘소는 후손들의 잘못으로 수백년동안 실전(失傳)해오던 것을 찾아보기로 하고 91년 5월 종균(鐘均), 준귀(俊貴), 백운(白雲), 진복(珍福)씨 등 네 자손이 영암군 학산면 용산리 諱 총(總) 현조 선산 현지 답사를 시작했다. 결정적인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기홍(基弘·作故), 희술(熙述), 남영(南永). 희우(熙于), 대식(大埴)씨 등 많은 호남파 종친분들의 조언과 협력이 뒷받침이 되었다.

 

2008년 2월 이장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위원장에 백운(白雲)고문, 해남종친회 행기(幸基)총무를 간사로하여 14명의 위원과 연식(連植) 고문 등 4명이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2년여의 추진작업 끝에 2010년 5월8일 동 사업을 완료하기에 이르렀다.

 

백운고문은 이장 과정에서 파묘(破墓)하니 500년이 넘는 시간 속에도 진(縉) 현조의 해골(骸骨)과 뼈가 그대로 있고 관(棺) 상부가 석회로 되어 있어 파묘작업이 어려웠으나 이런 자리가 바로 명당(明堂)자리가 아닌가 가슴 깊숙이 느껴졌다고 당시의 감회를 전해왔다. 

해남종친회(海南宗親會)는 5월2일 해남군 문내면 동영리 우수영내 팔팔음식점에서 1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8회 정기총회를 가졌다. 진복(珍福)회장은 참석해주신 종원과 부녀회원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2010년도 정기감사 결과보고 및 년간 재정수입, 지출현황 등을 상세하게 알리고 매년 시제도 따뜻한 봄날 일요일로 정하여 직장근무 자손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날짜를 잡아 공지하기로 했다.

 

해남종친회 서울지역정기총회는 해남지역의 현안사업 때문에 회장과 총무가 참석못하고 대신 진환(珍煥) 부회장이 대종회 회의가 끝난 직후 8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남에서 보내온 유인물(2009년도결산서, 移 葬費 精算書)을 배부하고 문중현안에 도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음은 새로 조성된 묘역에 세워진 해남파 파조(派祖) 9世 진(縉) 현조 비문이다.

 

휘  진  현조  비문(諱  縉  顯祖  碑文)

 

     서흥김씨는 동국(東國) 갑족(甲族)으로 근원이 원대하다. 시조(始祖) 휘(諱) 보(寶)는 신라대보공(新羅大輔公) 휘 알지(閼智)의 34세손으로 경순왕(敬順王)의 6대손이요 보국대안군은열공(輔國大安君殷說公)의 5대손으로 금오 위중랑 장(金吾 衛中郞 將)이시다.

 

2세 휘 덕인(德仁)은 좌우 위정용 장군(左右 衛精勇 將軍)이요 3세 휘 천록(天祿)은 1270년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1274년 원(元)이 일본을 정벌할 때 출정하여 크게 세운 공으로 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상 장군 판판도사사(匡靖大夫 都僉議侍郞  贊成事上 將軍 判版圖司事)에 오르시고 서흥군(瑞興君)으로 봉군(封君)되다. 이리하여 후손들의 관향(貫鄕)을 서흥(瑞興)으로 쓰게되다.

 

시조 휘 보(寶)의 8대손 휘 진(縉)은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曹參議) 중곤(中坤)의 손자요 봉훈랑 의영고사(奉訓郞 義盈庫使) 휘 소형(小亨)의 3자(三子)이시다. 휘 진은 유년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음사(蔭仕)로 직장(直長)을 지내셨으며 해남파(海南派)의 파조(派租)이시다.

 

배(配)는 숙인(淑人) 기계유씨(杞溪兪氏)로 슬하에 생일자(生一子)하니 휘 신(頣)이요 일찍이 학문에 면려하여 문사(文思)가 깊고 음사(蔭仕)로 사헌부 감찰에 이르시다 배는 숙인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슬하에 생(生) 4남 4녀하니 장남 휘 윤문(允文)은 생원(生員)이요 차남 휘 윤장(允章)은 사헌부 감찰이요 3남은 휘 윤준(允濬)이요 4남은 휘 윤철(允哲)이요 장녀는 전승손(全承孫) 차녀는 강문필(姜文弼) 3녀는 민 번(閔 蕃) 4녀는 김 곤(金 琨)에게 출가하다.

 

봉훈랑 의영고사(奉訓郞 義盈庫使) 휘 소형(小亨)의 종손 한훤당(寒暄堂) 휘 굉필(宏弼)이 1498年 무오사화때 점필제(佔畢齌)․김종직(金宗直)선생을 사사(師事)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니 모부인(母夫人)의 상소에 의하여 1500年 경신년(庚申年)에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되다. 이때 중부(仲父) 휘 총(緫)과 계부(季父) 휘 진(縉)이 조카 휘 굉필을 보고자 순천으로 간 것이 영암, 해남에 세거(世居)의 계기가 되다.

 

휘 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때 가죄(加罪)하여 사사(賜死)되고 1507년 원죄(寃罪)가 풀려 도승지(都承旨)로 승직(陞職)되었으며 1517년에 우의정(右議政) 1575년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贈職)되어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諡號)된 뒤 문묘(文廟)에 오현(五賢)의 수현(首賢)으로 종사(從祀)하다.

 

휘 진(縉)의 묘를 실전(失傳)해오다가 1987년 봄 5대 현조 휘 진(縉), 신(頣), 윤뮨(允文), 상(祥), 순의(順義)의 단비(壇碑)를 근수(謹竪)하다. 1991년 종균(鍾均), 준귀(俊貴), 백운(白雲), 진복(珍福) 네 후손이 영암군 학산면 용산리 휘 총(緫)의 선산 현지 답사를 시작으로 오랜 세월 탐색한 결과 휘 진(縉)의 묘를 이장하다. 비문(碑文)은 보책(譜冊)과 경현록(景賢錄) 가문(家門)의 보감(寶鑑)에 의거하여 그 유덕(遺德)을 영전(永傳)하고자 행적을 약술(略述) 자(玆)에 명기(銘記)하다.

 

서기 2010년 경인(庚寅) 3월 상완(上浣)
13대 손  백  운 근찬(十三代 孫 白    雲  謹撰)

 

《서흥김씨대종보 제55호|2010년9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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