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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옥천서원 경현당과 임청대

작성자김기후|작성시간14.03.02|조회수153 목록 댓글 0

순천향교 전교典校를 지내신 권준표權俊杓씨가 집필한
옥천서원지玉川書院誌(재단법인 순천예술문화재단 2008.10.15.刊)의 
경현당과 옥천청사, 임청대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옮깁니다.

 

내용 중의 한 구절을 옮겨봅니다.
아, 선생이 만난 시대는 난세亂世였고 선생이 섬긴 인군은 폭군暴君이었으니...

한훤당 선생의 마지막 5년(1500-1504)의 유배지 - 순천順天을 되돌아 봅니다.

 


선생이 서세逝世하신지 60년이 채 못 되었건만 이곳 순천의 몇몇 사람이외에는 그 때의 정황(귀향살이와 참형)이 차차 잊혀져가던 차에 선생의 손자(둘째 아들 彦庠의 장남) 김립金立(호 성재惺齎)이 인근 곡성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생의 순천 우거의 내력을 나타내려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1563년(명종 18) 겨울 이런 내력을 잘 아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순천부사로 부임하자마자 뜻있는 주민들과 이 일을 시작하기 위하여 현지를 답사해 보니 「임청대臨淸臺」 는 이미 없어진 후여서 임청대의 옛터를 더 넓혀 한길 높이 정도의 臺를 다시 쌓고 그 북쪽 벼랑에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다 3칸 당을 짓고 이름하여 「경현당景賢堂」이라 하였다.[이 경현당 현판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쓴 것으로 당堂 안에 걸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산해李山海가 쓴 것으로 처마 밑에 달았다.]

 

이정 부사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경현당기문景賢堂記文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고 기대승은 불민不敏함을 이유로 사양하다가 구암 이정의 뜻이 간곡함에 이를 받아들여 1564년(명종 19) 12월에 기문을 지었다.

이정 부사는 경현당 건립 이듬해에 지역 선비들의  권유로 경현당 오른쪽에 정사精舍를 짓기로 하였다. 5개월간의 공사 끝에 준공한 당堂의 편액은 「옥천정사玉川精舍」라 하고 재齋는 「지도재志道齋」 • 「의인재依仁齋」라 하였는데 이는 모두 퇴계 선생이 이름 짓고 손수 쓰셨다. 

 

퇴계선생은 이정부사가 순천부사로 발령된 것을 알고 축시를 보냈으며 또한 매곡 배숙을 순천 교수관으로 천거한 처지이기 때문에 이 두분이 같이 지은 옥천정사 준공에 즈음하여 퇴계선생을 초청했는지 스스로 축하차 방문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순천에 직접와서 「玉川精舍」 • 「志道齋」 • 「依仁齋」 등의 현판은 물론 「臨淸臺」라는 비석의 글도 이때에 같이 쓴 것으로 보인다.  뿐만아니라 당시 임청대 바로 곁에 있는 현존 느티나무 역시 퇴계선생 방문 때 기념식수 했다는 설이 있다. 

 

이정 부사는 이 옥천정사의 낙성 일에 선비들을 거느리고 선성[先聖 즉 공부자孔夫子]의 신위를 「경현당景賢堂」에 진설하고 한훤당과 매계의 신위를 설치하여 술잔을 올리고 告由하였고 고유가 끝난 후에는 다른 신위는 거두고 한훤당 위패만을 「경현당」 왼쪽 한 칸에 봉안하여 당을 사당으로 만들어 매년 춘추의 中丁日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다음 해에 이공이 자친상慈親喪을 당하여 떠나가자 부령扶寧 김후계金侯啓가 와서 이를 주관하였다. 서원의 제도를 둘러보니, 신위가 한쪽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이공에게 질정한 다음 다시 신위를 당 한가운데에 봉안하니, 의식이 이미 잘 갖추어졌고 조리가 또한 구비되었다.  1568년(선조1) 선비들의 상소로 『옥천서원玉川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이 내려지고 아울러 사서四書를 하사받았다.


 

창건 당시의 경현당과 옥천정사의 위치는 어느 곳이었을까?
이부분에 대해서는 한훤당의 참형장소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한훤당은 1500년(연산6)에 순천으로 이배되어 북문밖에 부처되었고 매계는 서문밖에 부처된 후 두분은 옥천변에 자주 나와 거닐던 과정에 매계는 이 옥천변에 돌을 모아 대台를 쌓고 「임청대臨淸臺」 라 명명하고 그 기문記文도 지었다.

 

1503년 매계는 병사하고 한훤당은 1504년의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였는데 이 형 집행장소를 추정해보면 보통 사약에 의한 사사賜死는 부처된 그 집에서 집행되는 것이 상례일 것이나 참형의 경우는 좀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참형 그 자체의 절차가 사약에 의한 사사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따라서 참여관원수도 많고 또한 그 형태가 처절하기 때문에 주변에 민가가 있는 그런 곳을 피했을 것이며, 그 장소 역시 사유지 보다는 공공용지를 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한훤당의 우거가옥이 아닌 민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공공용지를 찾다보니 과거 거닐던 옥천변 임청대 부근 하천변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현당기景賢堂記』에 의하면 이정 부사는 임청대臨淸臺 북쪽에다 경현당景賢堂을 지었다 했으니(당시 이곳은 하천변으로 민가도 인접하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이곳이 혹시 한훤당의 참형장소와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하고 추정해 본다.

 

이렇게 전제한다면 나머지는 간단하다.  즉 참형장소가 경현당 창건 당시까지 비어 있고 또 공공용지(하천부지)로 임청대와 가까운 거리였기에 이곳에 경현당을 창건하는 것이 뜻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 이듬해인 1563년에 창건한 옥천정사玉川精舍는 그 경현당의 오른쪽에 지었는데 그 부지는 사유지여서 다른 공공용지와 교환하여 지었자는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의 기록으로 보아 옥천정사의 위치는 현 옥천서원의 위치와 일치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871년(고종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경현당과 옥천서원이 모두 철폐된 이후 1915년 일제강점기때 토지조사에 의한 등록사항을 보면 경현당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은 현 순천시 옥천동 164변지로, 옥천서원이 있었던 곳은 165번지로 등록이 되었다.

 

그 후 1920-30년에 복원할 때에 이 옥천서원부지인 165번지에 옥천서원만을 복원하고 형집행 장소로 추정되는 경현당 부지를 포함하여 나머지 부지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차츰 민간인들이 밭으로 이용하거나 주택을 짓지고 하였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한훤당의 형장은 과거 경현당景賢堂 창건지로 추정되는 현 옥천동 164번지 일 것이며 옥천정사玉川精舍의 위치는 현 옥천서원이 있는 165번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자료출처 : 옥천서원지玉川書院誌
                재단법인 순천예술문화재단 2008년 10월15일 刊, 집필인 권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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